brunch

불씨

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선 회복탄력성 이야기

by 연옥


"112 상황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누가 아파트 단지에서 계속 불을 피우려 하고 있어요."

"불이 크게 번지고 있나요?"
"아니요 저희가 껐어요. 그 사람이 이곳저곳 왔다 갔다 하면서 불을 피워서 뒤따라가고 있어요."
"소방차와 함께 출동하겠습니다. 위험하실 수 있으니 가까이 접근하지 마세요."


현장에 도착하자 신고자는 후문 방향을 가리켰다. 정 경사와 나는 곧장 후문 쪽으로 달렸다. 그곳에는 검은 외투에 모자를 눌러쓴 한 남성이 있었다. 나는 무전기로 위치와 인상착의를 전파한 뒤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그 때, 그자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금새 달아나기 시작했다.


후문을 빠져나간 그는 상가 골목길로 몸을 숨겼고, 우리는 쓰레기와 환풍기가 어지럽게 늘어진 골목을 가르며 뒤쫓았다. 하지만 주차된 차량들에 시야가 가려 결국 놓치고 말았다. 고 경위와 조 경장에게 주변 수색을 부탁한 뒤, 나와 정 경사는 신고자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신고자는 열여덟 살 고등학생. 학원 수업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귀가하던 중, 100동 옆 놀이터에서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얼 하나 싶었지만, 종이를 꺼내 불을 붙이려 하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 남자가 100동 필로티 방향으로 이동한 사이에 확인해 보니, 전선을 태우려 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필로티 앞에 쌓여 있던 낙엽 위에 불을 피운 뒤 자리를 벗어났고, 신고자가 발로 밟아 불을 끄고 그를 뒤 쫓았다고 진술했다.


나는 경비원과 함께 놀이터로 이동했다. 신고자의 말대로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전선이 드러나 있었고 주변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뚜렷했다. 놀란 경비원이 말했다.

"전류가 실제로 흐르고 있는 전선입니다. 끊어졌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순간, 발끝에서 찌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번져왔다. 만약 전선이 끊겨 폭발이 일어나거나 대형 화재로 번졌다면? 누구도 안전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100동 근처에서만 불을 붙이려 했던 걸까. 석연치 않은 기운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정 경사는 수색을 이어갔고 나는 CCTV를 확인하기 위해 관리사무소로 향하던 중, 아파트 담장 너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학생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저쪽 건물 뒤에 숨어서 쳐다보는 사람... 맞는 것 같니?"

한 학생이 힐끗 쳐다보더니 짧게 답했다.

"맞아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나는 곧바로 무전기를 들었다.

"용의자 제과점 뒤편 건물에서 발견! 큰 도로 방향으로 도주 중!"


나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러나 거리는 이미 크게 벌어져 있었고, 장미 덩굴로 뒤덮인 아파트 담장마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순간, 후문에 있던 경비원이 다급히 목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한 골목을 가리켰다. 근처에 있던 정 경사가 재빨리 골목 방향으로 뛰어갔고 나는 그 뒤를 쫓았다. 양갈래 길에 이르자 정 경사와 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추적에 나섰다. 그러나 용의자는 또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그때, 무전이 울렸다.

"100동 앞 필로티 화재 발생! 소방차 어디쯤 왔어요!"

인근 지구대에서 지원 나온 팀이 낙엽 속 불씨가 되살아난 것을 발견하고 다급히 무전을 보낸 것이었다.


'화재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가까운 곳에서 학생들의 외침이 들렸다.

"여기요! 여깄어요!"

아이들의 다급한 목소리는 용의자를 발견한 듯했다. 그런데 왜 학생들이 여기에 있지?


"따라가지 마! 우리가 갈게!"

아이들이 다치는 일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숨이 가빠지고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목소리를 따라갈수록 피어오르는 긴장감에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막다른 골목길. 마침내 용의자를 발견했다. 학생들이 그의 양팔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고, 그는 도망칠 힘을 잃은 듯 고개를 떨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곧장 달려들어 그자의 양팔을 제압하고 수갑을 채웠다. 체포 사실을 고지하고 혹시 모를 흉기를 대비해 서둘러 몸수색에 들어갔다.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 두 개와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신고자들과 같은 열여덟 살. 계속해서 점퍼 속 깊은 곳을 확인하던 중 뭉툭한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을 빼내자 함께 나온 건, 칼이었다. 차갑게 번지는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만약 이 칼이 아이들에게 향했더라면. 생각만으로도 숨이 멎을 듯했다.


"왜 그랬어?"

"... 그냥요."

"네가 사는 아파트도 아니잖아."

"..."

"왜 이 아파트였어?"

"... 걔네가 사는 곳이에요."

"누구?"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수사를 이어가기 위해 용의자와 함께 지구대로 돌아왔다. 잠시 후 그의 부모가 도착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당황과 분노, 그리고 스스로를 탓하는 듯한 죄책감이 얽혀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 전,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학교와 채팅방에서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학교가 끝나면 일진놈들에게 끌려가 수차례 폭행과 갈취를 당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집에서 스스로 죽겠다고 불을 피운 적도 있었습니다."


붉게 충혈된 아버지의 눈과 골목에서 마주한 소년의 눈이 겹쳐지며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 소년은 가장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장소들에 하나씩 불을 놓으려 했다. 삶을 비관해 오던 자신의 집, 폭행 당하던 가해자의 아파트. 이들을 향한 복수심에 그저 어디든 쏟아내야 했던 고통이 더해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열여덟 살.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피어난 그 불씨를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의 고통을 헤아려 주었다면, 소년은 과연 이 자리에 서 있었을까.


하지만 이번 일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외로움과 절망은 분명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이 잘못되어 있었다. 그 불씨는 자칫 수많은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었다. 나는 소년의 고통에는 공감했지만, 그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다.


'형법 제164조. 현주건조물에 불을 지르려 한 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형. 설령 미수에 그쳤다 하더라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


사건은 그렇게 형사과로 인계되었다.


학교폭력 피해자인 그 소년의 선택은 개인적인 복수였다. 그러나 그것만이 과연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법과 제도에 기대어 가해자들이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할 순 없었을까.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은 영화처럼 공평하지 않다. 힘을 가진 자들은 법망의 빈틈을 파고들어 형량을 줄이거나 처벌을 피해 가는 일이 여전하다.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최근엔 '법꾸라지'라는 신조어마저 생겨났다.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무겁고 치명적인 사건조차, 법정에서는 이유와 사정이 고려되며 대폭 감형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 현실 속에서 피해자가 느낀 분노와 허탈감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삶의 뿌리까지 흔드는 거대한 상실감일 것이다.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감히 그 고통을 짐작하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처벌받아야 할 자가 오히려 사회의 보호막 안에서 웃고 다니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누가 과연 담담히 참아내며 아무 일 없는 듯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래도 다행인 건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력이 더해져 곳곳에 CCTV가 설치되었고, 휴대전화와 메신저에는 괴롭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는다. 아무리 법망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는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와 상대만이 알던 일을, 이제는 모두가 알 수 있게 되었다.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사건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그러므로 타인을 심판하기 위해 나를 던질 필요는 없다. 순간의 분노가 이끄는 길은 언제나 파멸로 이어지고, 그 끝에는 나 자신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두려움과 분노, 때로는 책임 앞에서 크고 작은 갈림길을 마주한다. 소년은 분노 앞에서 범죄를 택했고, 학생들은 두려움 앞에서 정의를 택했다. 그것들이 타인을 위협하는 불길이 될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될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한순간의 선택은 각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앞으로의 삶을 이끄는 방향이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언제나 옳은 길만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순간의 감정에 흔들려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를 대하는 자세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더 나은 길을 선택한다면,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욱 성장할 수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