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선 회복탄력성 이야기
"코드1"
순찰차에 올라타 신고 녹음을 들어본다.
"감사합니다, 112 상황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들이 상태가 좀 안 좋아요. 도와주세요."
"어떻게 안 좋으신가요?"
"정신질환이 있어요. 지금 행복빌딩 앞인데 아들이 다칠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빨리 와주세요."
"출동하겠습니다."
평소 정신질환자 관리는 보건소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담당한다. 하지만 오늘처럼 자신이나 타인을 해할 가능성이 있는 급박한 순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찰관이 직접 보호조치를 하거나 응급입원을 의뢰할 수 있다. 경찰의 개입 여부는 결국 "급박성"에서 갈린다.
조수석에는 고 경위가 앉아 있다. 그의 별명은 '순경 킬러'. 처음 지구대에 출근하던 날, 다른 팀 동기가 귀띔해 준 말이 떠올랐다.
"형, 우리 팀 선임이 그러는데 고 경위님 조심하래. 순경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래."
고 경위. 쉰을 갓 넘긴 나이에 희끗한 머리, 불룩한 배, 얼핏 보기엔 전형적인 동네 아저씨 같아 보였다. 다만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만이 과거 강력팀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는 징계를 받은 뒤 지구대로 발령 난 지 몇 년째 자리를 지켜오고 있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변화를 싫어하시는 팀장님 덕에 몇 달간 정 경사와 고정으로 순찰을 돌았기에 고 경위와 직접 부딪힐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갑작스러운 조원 변경으로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고 경위와의 첫 신고 출동,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길을 알려주는 것 같아 내가 아는 길로 방향을 틀었다.
“야, 뭐 하냐?”
“네?”
“뭐 그리 서두르냐고.”
“코드1이라서요.”
“그럼 운전을 똑바로 하든지. 너처럼 몰다가 사고라도 나면 네가 책임질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운전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수년간의 운전 경력도 있었고 경찰학교 시절엔 운전조교까지 담당했었다.
현장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어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고 경위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건 다른 차량들과 도로를 건너는 보행자에게 또 다른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나는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는 거리낌 없이 맞서왔지만 고 경위의 말은 억지스럽지 았았다. 말투만 놓고 보면 나를 작정하고 갈구려는 듯 하였지만 그 안에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기 직전, 신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주차장 5층으로 올라가고 있어요. 어, 어! 빨리 와주세요!"
순찰차를 몰고 곧장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난간에 바짝 붙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난간 위로 양손을 올려둔 채 왼발을 들어 올리고 있다.
"가까이 오지 마."
예상과는 다르게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신고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멀리서 울먹이며 자신의 아들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고 경위는 무전기로 상황실에 119 지원 요청을 했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선생님. 우린 그냥 얘기 좀 들어주고 싶어서 온 거예요."
무의식 중 오른손이 그를 달래듯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허공에만 맴돌 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노려 한 걸음 다가가자 그가 소리쳤다.
"오지 말랬지!"
들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난간을 올라탈 듯한 자세를 취했다. 더 다가갔다간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와 나의 거리는 10미터 남짓. 고 경위가 신고자에게 이름과 병명을 조용히 묻는다.
"조현병이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나는 한 귀로 그 말을 들으며 다음 행동을 생각했다.
'말을 좀 더 걸어봐야 할까? 아니면 빈틈을 노려서 붙잡아야 할까? 그러다 놀라서 뛰어내리면 어떡하지? 떨어지면 징계는 당연할 거고 소송도 감수해야겠지?'
섣불리 움직여도 무너질 것 같고 가만히 있어도 무너질 것 같은 이 불안감. 선택지는 둘 뿐인데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양발이 난간 위로 올라섰고 양손은 허공을 짚었다.
늦었다. 달려가야 한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느리게 재생됐다. 뒤를 돌아봤다. 고 경위는 나보다 몇 걸음 더 뒤에 있다. 나이가 지긋한 고 경위보다 내가 먼저 가야 한다. 그래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눈동자는 그 남자를 따라가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발 뒤꿈치가 점점 들린다.
"안 돼!"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고 경위가 순식간에 뛰쳐나가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바닥으로 넘어졌다. 두 사람이 바닥에 뒤엉켜 있는 사이, 나는 곧장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아 수갑을 채웠다.
십 년, 아니 이십 년은 감수했다. 뱃살이 두둑하게 나온 고 경위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보릿고개 시절, 학급 대표 달리기 선수였던 게 틀림없다. 남성은 양손에 수갑이 묶인 채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다 죽여버릴 거야!"
우리는 그를 진정시킨 뒤 현장에 도착한 구급차와 함께 인근 정신병원으로 이동했다. 강제입원을 의뢰하기 위해 담당 의사를 기다리던 중, 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에 고 경위가 없었다면?'
왜 나는 망설였을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구해낼 수 있었을까. 도저히 혼자서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빨랐어요?"
고 경위는 나를 흘겨보며 툭 내뱉었다.
"넌 준비가 안 됐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빠르고 느리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 경위는 이미 그전부터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치 이런 순간을 몇 번이고 겪어본 사람처럼. 경험, 판단, 순발력, 모든 게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반면 나는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 결국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게 나와 그의 차이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지진, 화재, 붕괴처럼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왔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준비가 늘 부족했다. 신고는 늦었고 대처는 미흡했다. 누구도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그리고 그 대가는 결국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했다.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망설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망설임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마지막 숨 고르기다. 그들은 충분히 고민하고 두려움을 마주한 채 한 걸음을 내딛는다. 흔들릴지라도 멈추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 앞으로 나아간다.
퇴근 후 번개로 팀 회식을 가졌다. 장정 여섯이 원탁에 둘러앉아 말없이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삼켰다.
“고생했어.”
팀장님께서 고 경위에게 술잔을 건넨다.
“아니에요.”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말투에 적대감은 없었다. 잠시 후, 팀장님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출동은 고 경위에겐 쉽지 않았을 거야."
팀장님의 말씀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몇 년 전, 현장에서 가해자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걸 고 경위가 붙잡았는데 어깨가 빠지면서 결국 놓쳤어."
그 일로 그는 수술대에 올랐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장기 병가를 떠나야 했다. 옆에 앉은 고 경위는 묵묵히 술잔을 비웠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라 해도 그 기억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한 듯했다. 걷어 올린 반팔 속 어깨 흉터가 증명하듯, 그는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거친 말투와 날 선 태도는 타고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겪었던 실수를 후배들만큼은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는 마음, 죄책감에 더해진 책임감이 때로는 후배들에게 날카로움으로 드러났던 것이었다.
"그래도 타지에서 온 놈 치고는 지리 좀 알더라고요. 싹수도 나쁘지 않고."
고 경위의 투박한 칭찬에 나는 얼굴이 벌게졌다.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아마 지구대 순경 중에서 고 경위에게 칭찬을 받은 건 내가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나도 조금은 괜찮은 경찰이구나. 뜨겁게 일렁이는 감정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이 길이 결코 가벼울 수 없다는 사실이 이내 가슴을 짓눌렀다.
우리는 누구나 예기치 못한 순간, 삶의 무게와 맞닥뜨린다. 질병, 사고, 관계의 단절, 혹은 마음을 짓누르는 불안과 절망... 그 수많은 위기 앞에서 우리는 외면하지 않고 마주서야 한다. 숨이 막히고 두려움이 몰려와도 결국 삶은 그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 흔들리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그런 경험은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자는 삶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고통과 두려움의 기억은 무겁지만, 동시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된다. 오늘 내가 내디딘 발걸음 역시 두려움이 아니라, 비상을 향한 한 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