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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전용도로

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선 회복탄력성 이야기

by 연옥


"감사합니다. 지구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노인 한 분이 찻길을 걷고 있어요. 너무 위험해 보여요."

"어디시죠?"

"38번 국도, 시내 가는 방면으로요."

"출동하겠습니다."


신고 장소는 자동차전용도로, 관내에서 가장 사망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인도는 당연히 없고, 갓길도 턱없이 좁아 고장 차량이 잠시 멈추기만 해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곳. 그래서 처음엔 신고자가 뭔가 착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주변을 둘러보며 확인했지만, 역시 잘못된 신고인 듯했다. 차를 돌려 지구대로 복귀하려던 찰나, 램프 구간을 막 지나 사람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다리가 성치 않아 절뚝거렸고, 신발도 한 짝만 신은 채였다. 그 옆을 차량들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급히 순찰차를 세우고 다가가 노인을 태웠다.


"어르신, 위험하게 왜 여기 계세요. 어디 가시는 길이셨어요?"

"... 뭐?"

"어디 가시는 길이셨냐구요!"

"읍내... 의원..."


병원에 가야 한다며, 버스를 놓쳐 걸어가던 중이라고 하셨다. 버스를 놓쳤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자동차전용도로까지 오게 된 것일까. 지도 앱을 열어 보니,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시내 병원까지도 5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성인 남성이 걸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노인의 절뚝이는 발걸음으로는 결코 혼자 닿을 수 없는 길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금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냐구요!"

"... 이름? 김철수지."

"나이는요?"

"... 뭐라고?"

"몇 살이시냐구요!"

"... 찹쌀?"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치매 증상도 있어 보였다. 자녀가 셋이라 했지만 연락처는 기억하지 못했다. 지구대에 신원 조회를 의뢰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이 인근 마을, 마을회관 옆 집에 산다고 말했다.

이 상태로는 홀로 병원을 다녀오는 건 무리였다. 자녀와 동행해 다시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순찰차를 타고 인근 마을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며칠째 이어진 장맛비로 무너져 내린 토사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오가며 복구 작업을 이어갔지만, 차량이 더는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노인과 함께 걸어 들어가야 했다. 거리가 멀지 않다 하여 처음엔 가볍게 발을 옮겼다. 그러나 불편한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노인 곁을 지키다 보니, 짧을 줄 알았던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은 시간이 삼십여 분쯤 되었을까. 드디어 노인이 가리킨 집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현관에 걸린 문패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순간, 가슴속에 알 수 없는 허탈감이 찾아왔다.


"여기가 맞나요?"

"어디여 여기가..."


노인은 끝내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낯선 동네라고만 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마을회관으로 모시고 가 주민들에게 물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최초 신고 지점부터 역으로 CCTV를 추적해 봤지만 화면 속 노인의 모습은 어느 순간 불쑥 사라지듯 끊겨 버렸다. 마치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처럼. 관내 마을 이장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읍내 방송까지 요청했지만 끝내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지구대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이 어르신의 집을 찾아드릴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붉게 물든 노을이 지고 결국 노인을 야간 순찰팀에 인계를 하려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저희 아버지 계신가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자신이 딸이라고 소개했다. 노인의 행방을 애타게 찾던 가족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앞뒤 사정을 들어봤다. 아버지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가 집을 찾았다가 아무도 없는 걸 보고 딸에게 연락을 했고, 그제야 사정을 알게 된 딸이 황급히 우리 지구대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어르신 전화받아보세요. 딸이래요."

노인에게 전화를 건넸다.

"아빠! 나야 옥순이."

"그... 금요일?"

"나라고! 막내딸!"

"... 딸이 금요일이었나?"

대화가 되질 않는다. 전화롤 돌려받았다.

"아버지, 치매가 있으시고... 다리도 좀 안 좋으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여행 중이에요. 좀 멀어서... 주소 드릴게요. 집에 모셔다 주세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직접 모셔가셔야죠."


딸은 난처해하며, 지금은 사정이 있어 올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노인을 인계 받기를 거부했다. 다른 형제들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지금은 안 돼요."

"막내가 맡았어요."


자식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누구도 노인을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마침내 인근 주민 한 분이 지구대로 찾아와 노인을 데려갔다. 돌아서는 노인의 뒷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작고 외로워 보였다.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오늘 하루, 이 노인이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길 위에서 쓰러졌을 수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수도, 아니면 빠르게 달리는 차량에 치여 대형사고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그 사실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 저마다의 사정은 있을 수 있다. 오래전에 관계가 끊겼을 수도 있고, 평범하지 않은 가정사가 얽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단지 혼자라는 이유로 위태로워질 뻔했던 순간이었다. 결국, 그 속에서도 노인은 끝내 혼자였다.


우리는 점점 무관심에 익숙해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나치게 무뎌져 가고 있다. 뉴스에서 '독거노인' '실종' '고독사' 같은 단어를 접해도 더는 놀라지 않는다. 모두가 바쁘고, 각자의 생존에 매달리느라 마음을 쓸 여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건네는 시선은 점점 차가워지고,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를 외면하는 일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들을 위한 복지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도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저 누군가를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말을 건네는 작고 따뜻한 관심이다. 그 작은 손길 하나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 서 있는 누군가를 붙잡는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누군가의 관심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마음속에 "나 역시 외면당하겠지"라는 체념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손 내밀어 줄 사람이 있을 거야"라는 작은 희망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작은 관심은 때로는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고, 때로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켜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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