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카리브해이지만, 모든 섬이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매년 수백만 명 이상 찾는 곳이 있는가 하면, 사바처럼 매년 만 명도 찾지 않는 섬도 존재한다.
그런데, 사바만큼 평온한 곳이 없었다. 가기도 쉽지 않고 또 간다 해도 즐길 거리도 그다지 많지 않은 이 작은 섬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사바 섬에는 별다른 비치가 없다. 사실 비치는 고사하고, 죄다 절벽인 탓에 배를 댈 곳도 잘 없는 척박한 땅이다. 지금은 그래도 포구까지 차로 달릴 수 있지만 옛날에는 사람도 짐도 모두 배에서 정착촌까지 800개 넘는 계단을 통해 옮겨야 했단다.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 당시 계단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고생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여튼,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지금. 섬의 유일한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후미진 바닷가에 도착했다. 도로 끝 자갈과 바위로 가득한 해변, 해수욕은 불가능할 터. 그런데 고맙게도 벤치가 하나 놓여 있다. 긴 시간 걸려 온 것은 아니지만 괜히 고맙다.
무작정 앉아 있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고, 왠지 그러고 싶었다. 서울에서도 안 하던 속칭 멍 때리기.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서울특별시 면적의 단 2%에 불과한 작고 외딴 섬이지만, 가파른 화산섬인 까닭에 사바의 최고봉은 무려 해발 877m에 달한다. 그런데 사바는 네덜란드령이니, 졸지에 네덜란드의 최고봉이 대서양 건너 이 섬에 있는 셈.
하지만 등산로 아랫마을이 이미 해발 400m에 있다 보니 등반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주말에 서울 근교 등산하는 기분으로 가뿐하게 가능한 수준이랄까.
허나 봉우리에서 보는 경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정상 언저리에 자주 구름이 껴있다 보니, 잠시 걷힐 때 보이는 섬과 바다 경치가 주는 쾌감이 오히려 더 커지는 듯하다.
네덜란드의 최고봉 외에도 사바에는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상업용 활주로가 이 섬에 있기 때문이다. 활주로의 길이는 단 400m로, 인천국제공항 가장 긴 활주로 길이의 단 1/10에 불과.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소형 프로펠러기만 취항 가능하다.
그래도 불평할 일은 아니다. 1963년 공항 개항 이전에는 인근 섬에서 페리로 두 시간 정도 가야 했던 것이 항공기로 단 15분만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보이는 것과 달리 이 공항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비행 시간 대비 항공 운임이 다소 비쌀 뿐.
섬의 위용에 압도되어 비행기에서 내리니 승객은 단 6명. 시골 버스 정류장 같은 터미널로 들어서니 그래도 나름 여권을 제시하고 네덜란드 입국 심사를 받아야 한다. 여권을 받아든 심사관이 갸우뚱 하더니 “Korea?” 하고 묻는다. 자주 보지 못했던 여권이 신기했던 것일 터. 여행하러 왔다 말해주자 바로 씨익 웃으며 환영 인사를 건네더니 입국 스탬프를 찍어준다. 이보다 한가한 네덜란드 입국기가 있을까.
사바의 마을 이름들은 참 직관적이다. The Bottom은 산에 둘러싸인 저지대란 의미이고, Windwardside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 마을이란 뜻. 하지만 둘 다 직관적인 이름임에도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Windwardside에는 아침이나 저녁이 어울린다. 아침에 구름 쓴 산봉우리를 보면서 모닝 커피와 갓 구운 빵을 즐기기에도 좋고, 저녁에 식당과 바에서 새어 나오는 흥겨움을 즐기며 걷다 한 잔 하기에도 좋다.
반면 The Bottom에는 낮이 어울린다. 햇살을 맞으며 오래된 마을을 한가하게 걷다가 먹는 늦은 점심 (낮술 한 잔은 거들 뿐) 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
인구 2천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사바의 식문화는 예상 외로 푸짐하다. 대부분 양식 또는 캐리비안 요리 위주이기는 하나 중식당도 하나 존재하며, 카페와 바도 존재하여 커피와 주류를 즐김에 불편함이 없다. 여타 콧대 높은 카리브 관광지 대비 합리적 가격과 친절함은 덤.
이는 호텔도 마찬가지. 대부분 객실 열 몇 개 수준의 작은 호텔들이지만 지내는데 불편함 없도록 양질의 시설을 제공한다. 그러면서도 체크인 하러 왔다 부르니 부엌에서 반갑게 뛰어 나오는 주인장의 얼굴에 가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네덜란드의 합리주의가 카리브해의 정을 만난 느낌.
그런데 주인장이 미안하단다. 본인이 직접 조식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아침 일찍 옆 섬에 검진을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것. 잠시 고민하던 주인장은 10달러 지폐 세 장을 꺼내 쥐어 주면서, 아침에 빵집에서 맛있는 것 많이 먹으라며 모레는 꼭 직접 만들어 주겠다며 웃는다. 그 정에 함께 웃었다.
사바를 떠나는 날 아침 7시 반 비행기를 타야 했다. 조식을 먹고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그런데 주인장이 봉투를 하나 쥐어준다. 직접 만든 에그 샌드위치 하나, 우유 한 팩, 그리고 사과 한 개. 체크인 하고 나면 시간 남을 테니 꼭 먹고 가란다. 그 정에 다시 함께 웃었다.
꼭 해봐야 할 일: 네덜란드 최고봉 등반해 보기, 청정 바다 다이빙 해보기 (숙련된 다이버만), Saba Spice Rum 마셔 보기, 그리고… 어디서든 멍 때리기.
날씨/방문 최적기: 겨울 기준 매일 20~30도로 쾌적하며, 여름에도 겨울 대비 크게 더워지지 않음. 5월~11월 초 우기 및 12~1월 성수기 제외 시, 2~4월이 방문 최적기.
위치: 카리브해 북부 소앤틸리스 제도 (Lesser Antilles) 및 리워드 제도 (Leeward Islands) 에 속하며, 이 지역 항공 허브 역할을 하는 신트 마르턴 (Sint Maarten) 섬 서남쪽 약 45km에 위치.
시간대: 대서양 표준시 (한국보다 13시간 느림). DST (서머타임) 제도 없음.
항공편: Winair (https://www.fly-winair.sx) 가 신트 마르턴 공항 (SXM) 에서 하루 2~4편 직항편을 운항 (비행 시간은 15분 남짓). 신트 마르턴 공항까지는 뉴욕, 애틀랜타 등 한국발 주요 행선지에서 직항편 이용이 가능 (비행 시간은 4시간 남짓).
입국 요건: 사바가 네덜란드령인 까닭에 네덜란드 입국 규정이 동일하게 적용되어, 대한민국 국민은 사바도 무비자 입국 가능 (최장 90일)*.
화폐 및 여행 경비: 공식 화폐로 미 달러를 채택하고 있어 별도 환전 불필요하며, 대부분 매장에서 신용카드 사용 가능 (택시 등 제외). RBC (Windwardside) 및 MCB (The Bottom) 은행의 ATM이 있기는 하나, 충분한 현금 소지 권장.
언어: 네덜란드령인 까닭에 네덜란드어로 대화하는 주민을 종종 볼 수 있으나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모두 공용어로 지정), 영어로 의사 소통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음.
교통: 섬은 작으나 도로가 험해 마을 내 이동 외 택시나 렌터카 이용 필수. 택시 요금은 편도 10~20달러 선 (섬 종단 시 30~40달러) 이며, 인구가 적다 보니 기사가 지나치는 모두와 인사하는 진귀한 경험 가능. 렌터카는 하루 60~80달러 선이나 도로가 험해 운전에 자신 없는 경우 택시를 추천하며, 주유소가 단 한 곳 (포구에 위치) 이니 유의할 것. 자세한 정보는 사바 관광청으로 (http://www.sabatourism.com/getting-around).
숙박: 호텔은 대부분 합리적 가격에 만족스러운 환경을 제공 (일 150~250달러 선). Windwardside의 경우 마을 내에 호텔이 여러 개 있으나 The Bottom의 경우 호텔이 마을 외곽에 위치하니 참고. 빌라 렌트도 가능하나 호텔보다는 비싼 편이며 교통 불편한 외딴 곳에 위치할 수 있으니 유의할 것. 자세한 정보는 사바 관광청으로 (https://www.sabatourism.com/business/category/lodging).
식당/바: 양식 또는 캐리비안 요리가 대부분이나 중식당도 하나 존재. Bizzy B나 Bottom Bean Café에 가면 모닝 커피와 갓 구운 빵을 즐길 수 있으며, 근사한 저녁 식사는 Chez Bubba Bistro나 Brigadoon을 추천 (그러나 다른 식당도 모두 만족스러움). 식당 별로 휴무일 및 영업시간이 상이하니 반드시 사전 확인 후 방문을 추천. 자세한 정보는 사바 관광청으로 (https://www.sabatourism.com/business/category/restaurants).
전압/콘센트: 110V/60Hz에 플러그 타입 A/B 사용 (즉, 미국과 동일). 따라서 대부분 한국 전자기기의 경우 여행용 어댑터 필요.
국제전화 국가 번호: +599 (네덜란드령 카리브해 공용).
주요 연락처: 긴급전화 (경찰/의료 911), 사바 관광청 (+599-416-2231/2322), Winair (+1-721-545-4237), 주네덜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31-70-740-0200), 주도미니카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 (+1-809-482-6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