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코 (Abacos)

B cut

by LHS

바하마에서 겪은 항공 교통 관련 세 번의 횡액 (지연 1회, 사전 고지 없는 취소 1회, 그리고 가방 파손 1회) 중 두 번째 이야기. 이번에는 아예 항공편이 취소되었는데도 사전 고지 하나 없어서 된통 당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에 비하면 지연은 양반이리라).


아바코에서 1박 후 그랜드 바하마로 이동하고, 다시 1박 후 수도 Nassau로 돌아가야 하는 스케줄. 따라서 항공편이 어느 한 곳에서라도 어그러지면 당연히 어느 한 섬은 '주마등 투어'로 만족해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충분한 여유를 두고 공항에 도착했고 (바하마 국내선은 대부분 10~20인승 작은 비행기 또는 커봐야 40~50인승 비행기로 운항하기 때문에 한 시간 전에만 도착해도 충분하지만, 이날은 2시간 이상 일찍 도착), 차를 반납한 뒤 체크인을 하러 터미널에 들어갔다.


그런데 Flamingo Air의 카운터가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빨리 와서 아직 오픈을 안 했겠지 생각하면서도 어딘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있을 때쯤, 다른 항공사 직원이 체크인 카운터를 정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혹시 Flamingo Air 직원들은 아직 출근 안 했냐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걔네 오늘 오후에는 항공편 없다던데? 혹시 아직 사무실에 누구 없는지 확인해볼테니 직접 문의해볼래?"


막연한 불안함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현실화 되는 순간. 그나마 다행히도 그 직원이 사무실에 남아 있던 Flamingo Air 직원을 불러줘서 직접 확인이라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매우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예약했던 항공편은 무슨 이유에선지 취소가 된 것이 맞고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것이 어째 손님이 적다고 다음날 항공편과 합쳐버린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고...), 승객들에게는 이메일과 문자로 항공편 취소 안내가 나갔고 (하지만 이메일도 문자도 받은 것이 없는데... 분명 예약할 때에는 예약 확인 메일을 잘 받았으니 동일한 메일로 보냈다면 받았어야 했을텐데...), 그러니 다음날 이른 아침 항공편으로 이동하라는 것 (그나마도 '취소 사실을 몰랐던 것이 잘못이지만 무료로 내일 항공편으로 옮겨 주겠다'는 생색과 함께... 이 지역 항공사들이 탑승객 실수라면 이를 곱게 눈감아줄 리가 없는데...).


여튼 기어코 큰일이 나버렸다. 그랜드 바하마에 잡아두었던 호텔과 렌터카는 둘째 치고, 당장 아바코에서 하루 더 지내야 하는데 호텔도 이미 체크아웃을 했고 렌터카도 이미 반납을 했으니 말이다. 당장 공항 터미널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할 판이 되어버린 것. 어떻게든 대처를 해야 한다.


가장 급한 것은 먼저 아바코의 렌터카를 하루 더 연장하는 것 (차가 없으면 아무데도 가지를 못하니). 렌터카 업체에 연락.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하루 더 연장을 요청했다. 다행히 업체 사장이 바로 승인해 주어 렌터카 문제는 곧바로 해결. 어차피 공항 주차장에 차를 대고 떠나면 업체에서 나중에 픽업해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반납을 위해 주차해 두었던 차를 그대로 다시 끌고 나가면 된다.


그 다음 급한 것은 아바코의 호텔을 하루 더 연장하는 것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 호텔에 전화를 걸었는데 한참 동안 답이 없더니, 다행히도 호텔 직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상황을 설명하고 하루 더 지낼 수 있겠냐 물었다. 직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그렇게 하라고 승낙을 해준다. 단, 원래 그날 투숙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코로나 팬데믹 중이어서 여행객이 많지 않았다), 자기도 막 호텔 문 닫고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며 (실제로 바로 전날도 유일한 투숙객이었던 터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집에 가서 챙겨야 할 일이 좀 있으니 조금만 천천히 돌아와 달라는 것이 아닌가. 항공사의 태도와는 너무도 다른 솔직함과 친절함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 다음으로 급한 것은 그랜드 바하마의 호텔과 렌터카를 조정하는 것. 호텔은 너무나 야멸차게 '투숙일 당일이니 전액 환불 불가'를 통보했고, 그나마 렌터카는 무료로 일정을 조정해 주었다. 절반의 성공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패널티를 줄인 것이 다행이라 봐야 할 터. 드디어 다 정리되었구나.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시계를 보니 무려 한 시간 이상이 지나버렸다. 다시금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그래도 하루 더 보낼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다시 차를 몰아 호텔로 이동하기 시작. 기왕 이리 된 김에 아바코를 조금 더 둘러볼까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이미 너무 지쳐버린 지라 차라리 그냥 하루 푹 쉬어버리기로 결정. 괜찮아. 주마등 투어가 처음도 아닌걸. 그랜드 바하마도 어떻게든 볼 수 있을 거야.


이 모든 일을 겪고 호텔에 다시 도착하니 마치 집에 도착한 듯 편안한 느낌이다. 그리고 직원을 다시 만나니 어이가 없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직원도 위로해 주면서도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함께 헛웃음을 터뜨리고... 하지만 기왕 쉬기로 한 것 잘 쉬면 될 일 아니냐며, 저녁 맛있게 해주겠다며 이내 저녁 준비를 하러 간다. 그래. 기왕 이리 되었으니 푹 쉬는 거야. 낮잠도 좀 자고,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멍도 때리고, 석양도 감상하고, 맛있는 저녁도 즐기고. 그만큼 남은 여행은 더 활기차게 할 수 있겠지.


이렇게 가능해진 '하루 더 멍 때리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바하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개의 순간들 중 하나가 되어 있다. 특히, 굳이 관광지를 쫓아다니지 않고 소소한 즐거움을 챙겨가다 보니, 다양한 형태의 'mindfulness'를 실천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 싶다 (예를 들어, 맨발로 해변을 걸으며 바닷물의 간지럽힘을 느껴본다든지, 아니면 일출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면서 바람 한 올 한 올을 느껴본다든지 등등). 워낙 바쁘게 돌아보는 일정을 짰던 터라, 이렇게 강제로 하루 더 있게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아마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바쁘게 지내려 했을 터. 그 당시에는 상당히 화가 나는 경험이었지만 (그리고 Flamingo Air는 항공편 취소로 인해 발생한 손해를 보상해주겠다 하더니 결국 끝까지 보상해주지 않았다... 하긴, 그런 항공사가 갑자기 보상을 해준다면 그게 더 어색했을지도...), 그래도 그 덕에 모처럼 잘 쉬고 가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여행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듯하다.


20210215_124418.jpg 아바코에 도착하기 전 발견한 이름 없는 섬 (섬도 아닌 모래톱 수준이려나?). 모양이 마치 새 머리처럼 생겼다.


20210215_125101.jpg 아바코 공항에 착륙. 별 생각 없이 찍었는데 묘하게 레트로 색감과 감성이 되었다.


20210215_153102.jpg 호텔로 향하는 도로가 말도 안 되게 쭉 뻗어있다. 바하마 주요 섬들이 극단적으로 좁고 긴 형태라 가능한데, 아바코의 경우 15km 이상 일직선인 구간도 존재. 여튼 특이한 풍경.


20210215_160006.jpg 30분 정도 달려 드디어 호텔에 도착. 방 7개에 불과한 작은 호텔이지만, 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관리도 잘 되어 있다. 게다가... 신기할 정도로 정감이 간다.


20210215_162435.jpg 호텔이 Schooner Bay라는 택지 개발 지구 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호텔과 주변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단, 아직까지 분양 실적은 매우 저조해 보인다...).


20210215_161957.jpg 한 5분만 걸어나가니 평화롭기 그지 없는 해변이 나타난다. 누군가의 발자국은 있지만 아무도 없는 해변. 세상의 끝에서 해변을 혼자서 전세 낸 기분.


20210215_161944.jpg 맨발로 해변을 천천히 걸으며, 이 해변의 느낌을 온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눈으로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귀로 파도의 소리를 들으며, 발로 바닷물의 간지럽힘을 느끼며.


20210215_162203.jpg 충분히 걸었다 싶을 때쯤, 카바나 아래에 앉아 바닷바람과 바다 내음을 마저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지금 이 환상적인 공간에 나 혼자 오롯이 존재한다는 인식의 재확인.


20210215_181317.jpg 전세 낸 바다를 즐기는 사이 어느새 석양이 내리고 있다.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 또한 마음 속에 온전히 담는다.


20210215_181609(0).jpg 석양과 함께 태양이 왼쪽 하늘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물러나는 차분한 장면. 참고로 왼쪽 바다가 동쪽이고 오른쪽 땅이 서쪽.


20210215_180828.jpg 서쪽으로 물러가는 태양이 구름을 배경 삼아 마지막 쇼를 연출한다.


20210215_182604.jpg 그리고 이내 마지막 빛줄기를 선사하고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혼자서 온 몸으로 즐기는 기분. 묘하다. 묘하게 좋다.


20210215_182340.jpg 이제 저녁식사를 즐길 시간이니 호텔로 돌아간다. 오늘 투숙객이 단 한 명임에도 환하게 불을 밝혀주는 친절이 새삼 고맙다.


20210215_184618.jpg 호텔의 유일한 투숙객이지만 저녁식사가 외롭지는 않다. 호텔의 유일한 직원 겸 셰프와 담소를 나누며 즐기는 저녁이라 오히려 더 정감이 간다.


20210215_190245.jpg 그렇다고 음식이 대충 나오는 것은 또 아니고, 식전 빵부터 샐러드와 메인 요리 그리고 칵테일까지 모두 훌륭하다. 알고 보니 수도 나소의 유명 호텔 셰프 출신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


20210215_191948.jpg 마지막 디저트까지 완벽. 담소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다음 디시를 내오는 셰프의 내공 덕분에, 바하마 외딴 시골에서 기대 이상의 즐거운 식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20210216_060642.jpg 즐거운 저녁 식사 후 숙면을 취하니, 새벽 같이 눈이 떠진다. 6시를 막 넘긴 시각. 동녘 하늘부터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재빨리 바닷가 쪽으로 산책을 나선다.


20210216_065050.jpg 걸어가는 동안에도 순간 순간 밝아지고 있는 하늘. 계단 몇 개만 오르면 바닷가 쪽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계단 너머 하늘은 이미 신비로운 붉음으로 타오르고 있다.


20210216_064556.jpg 단숨에 계단을 오르니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잃는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직전 가장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이리도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20210216_065119.jpg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니 떠오르는 해가 동쪽 하늘부터 차츰 붉게 물들여 가는 것이 보인다. 보고만 있어도 따사로운 느낌.


20210216_065600.jpg 그리고 드디어 해가 두둥실 떠올랐다. 이 느낌 또한 온 몸으로 느껴 본다. 햇빛의 눈부심과 따사로움을, 해와 함께 몰려드는 파도의 소리와 냄새를, 그리고 따스한 바람의 촉감을.


20210216_065619.jpg 해가 떠오르면서 조금씩 밝아지는 세상. 이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20210216_065510.jpg 문득 시계를 보니 그제서야 한 시간 가까이 홀린 듯 일출을 감상했음을 깨닫는다. 이제는 호텔로 돌아갈 시간.


20210216_075902.jpg 조식을 먹기 전에 간단히 드라이브를 즐긴다. 차 한 대 없는 한적한 도로를 혼자 내달리는 호젓함. 그런데 달리다 보니 표지판에 Sandy Point 공항이라 적혀 있다.


20210216_080229.jpg 터미널도 없이 활주로만 덩그러니 있고, 진입을 막는 펜스도 없어 잠시 들어가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정기편은 한번씩 내리는 모양). 활주로에 홀로 서있는 경험을 해볼 줄이야.


20210216_084150.jpg 다시 호텔로 돌아와 어제 그 즐거웠던 해변을 다시 찾는다. 떠나기 전 한번이라도 더 들르고 싶은 곳이니까.


20210216_084320.jpg 선베드 옆 탁자에 귀여운 conch 껍데기를 올려둔 누군가의 아기자기함에 감사하며, 그 옆에 선글라스를 잠시 벗어두고 평온한 아침 바다를 즐긴다. 휴식의 상징과도 같은 사진.


20210216_085607.jpg 이 아름다운 광경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에 담고, 체크아웃 전 조식을 즐기기 위해 호텔로 돌아간다.


20210216_100002.jpg 저녁에 이어 매우 만족스러웠던 조식. 투숙객이 한 명 뿐이라 해도 절대 대충 대접하지 않겠다는 셰프의 정성이 느껴진다.


20210216_141428.jpg 공항에 가기 전 (이 때만 해도 예정대로 출발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들러볼 마지막 한 곳으로 고른 Treasure Cay. 그런데 모래와 물이 모두 극적으로 아름답다.


20210216_140808.jpg 끝없이 펼쳐진 하늘색 바다, 그리고 그 위에 살포시 얹혀진 하늘과 구름.


20210216_141116.jpg 그 바다 앞에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모래사장.


20210216_141445.jpg 그리고 이 새하얀 모래사장을 배경 삼아 지어진 고급 별장들.


20210216_141513.jpg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떠나려 할 즈음 강렬한 태양이 구름을 뚫고 마지막 한 방을 선사한다. 사진에 포착된 바와 같이, 이 순간 풍경은 분명 천상계의 것이었다.


20210216_174808.jpg 그러나 이후 공항에서의 횡액 (사전 고지 없는 항공편 취소) 때문에 다시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덕에 다시 한번 장엄한 석양을 기억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20210216_195038.jpg 그리고 이렇게 된 김에, 또 한번의 즐거운 저녁식사도 즐기고. 이날 셰프의 정성과 배려 덕분에 공항에서의 당황과 분노를 꽤 씻어낼 수 있었던 듯하다.


20210217_064606.jpg 그리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기필코 타기 위해 새벽같이 공항에 도착.


20210217_074947.jpg 그리고 드디어 그랜드 바하마로 떠나는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아바코는 언젠가 다시 오고 싶지만, 이 항공사는 가급적 피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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