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Galante, an island where time stands still between traditions, rum, and endless horizons."
과들루프 관광청 홈페이지에서는 마리 갈란트 섬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진짜 평이한 문구이기는 하지만, 틀린 부분 하나 없는 정확한 설명이다. 특히 카리브해 섬 중에서 드물게 험준한 산 없이 전반적으로 평탄한 지형이다 보니, 그리고 인구 또한 섬의 세 마을에 고르게 퍼져 있다 보니, 돌아다니며 체감하는 속도는 생각보다도 더 여유롭게 변하는 듯하다 (그래서 'where time stands still'이라고 표현했으리라).
하지만 섬에 여유가 넘친다 해서 지루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차로 한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면 충분해 보이지만, 그 사이 사이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공존함은 당연하고, 카리브해에 이식된 프랑스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도 즐길수록 매력적이다. 그리고 고민이란 고민은 모두 내려놓고 쉬고 싶어지는 아름다운 해변이 섬 전역에 걸쳐 퍼져 있으니, 실제로는 차로 한바퀴 도는데 하루도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과들루프에서 마리 갈란트로 가는 아침 페리에 탑승했는데 (2025년 10월 기준 항공편도 존재하니 참고), 하늘에 겹무지개가 걸려있다. 마리 갈란트 여행을 축복해 주는 듯하다.
소요 시간은 약 한 시간. 그런데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마리 갈란트 섬은 평평할 뿐 험준한 산은 전혀 없어 보인다 (현지인들은 팬케이크 모양이라 한다고).
지형이 평탄하면 운전은 아무래도 더 편하니, 여유로운 마음으로 차를 빌린 후 호텔로 향한다. 소박한 호텔이지만 창에서 보이는 뷰는 화려하다. 바다가 내려오라 연신 손짓을 한다.
하지만 일단 간단히라도 럼 투어를 하고 싶어 내륙으로 차를 달리니, 이내 드넓은 사탕수수 밭이 연달아 나타난다. 사탕수수가 훨씬 중요했을 옛날, 이 섬은 꽤나 번성했으리라.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 한 마리가 더해지니 더더욱 여유로운 풍경이 되었다.
일단 Habitation Bellevue부터 방문. 진입로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부터 너무나 낭만적이다.
과거 사탕수수를 착즙할 때 사용했던 풍차도 잘 보존하여 남겨 두었다. 평탄한 지형이다 보니 바람이 센 대신 강 물살이 세지 않아 물레방아 대신 풍차를 쓰지 않았으려나.
양조장 한 켠의 전시장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구매 욕구가 상승한다. 시음 후 가장 마음에 드는 한 병을 구입. 럼 치고는 비싼 편이지만 그만큼 고급진 맛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번에는 Distillerie Bielle에 방문. Bellevue보다는 소박한 모습이, 관광지 느낌은 좀 덜한 듯하다.
실제로 전시장 바로 옆에서 사탕수수 착즙을 포함한 주요 공정이 바로 바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소박한 외관과 달리 생각보다 실험적으로 다양한 럼을 만들고 있어 놀라울 따름. 좋은 럼과 친절한 직원을 만나면 절대 한 잔 시음으로 끝날 수가 없다. 여기서도 한 병 구입.
마지막 행선지는 Distillerie du Père Labat. 하지만 앞에서 너무 즐기다 보니 폐점 시간을 넘겨 버렸다.
그래서 아쉽지만 양조장 전경만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이동. 하긴, 이미 앞에서 럼 많이 마셨잖아.
달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Ecomusée Murat. 과거 설탕 플랜테이션 유적을 잘 보존해 두었다.
Habitation Roussel-Trianon도 과거 설탕 플랜테이션이었지만, 잘 보존되어 현재는 관광지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지금은 유적에 불과하지만 건물 기단부 사이즈만 언뜻 보아도 과거 꽤나 번성했던 플랜테이션이었을 터. 세월의 무상함까지 살짝 느껴지는 순간이다.
물론 이렇게 이름 없는 농장 유적도 섬 곳곳에 널려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두 평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드디어 이 섬의 중심지 Grand-Bourg에 도착 (단, 이곳의 인구가 다른 마을보다 특별히 더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네 앞바다가 그냥 미쳤다.
평탄한 해변에 잔잔한 앞바다, 그리고 평온하게 해수욕을 즐기는 어른들과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느낌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나.
바다 건너 멀리 다른 섬이 보인다. 바로 Dominica 섬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한가롭게 해변을 거닐다 문득 바닷가 카페를 발견. 소박하지만 깔끔한 느낌, 그리고 연신 새어나오는 커피와 빵 냄새... 완벽하지 않은가.
그래서 예정에 없이 잠시 눌러 앉았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젤라도 한 스쿱을 놓고 바다 경치를 감상하는 호사. 지금도 한 번씩 떠오르는 추억의 장면이다.
그런데 마을 거리에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어찌된 일일까.
왜긴 왜겠나. 일요일을 맞아 모두 성당에 갔겠지. 한가로움과 평온함이 공기중에 가득한 진짜 일요일이 어떤 것인지를 지구 반대편에서 새삼 깨닫는다.
다시 차를 달려 이번에는 Saint-Louis에 도착. 부두 앞에 세워진 동상이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이 마을 출신 장병을 기린다. 전쟁은 항상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Saint-Louis는 너무나 평화롭다. 그리고 이곳도 마을 앞바다가 너무나 아름답다.
Saint-Louis가 섬의 서쪽 해안에 있다 보니 풍랑을 피하기 좋아서일까, 바다 앞에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다.
부두 끝에서 바라본 마을과 섬의 모습. 유독 이 섬은 모든 풍경이 평온하기 그지 없다. 지형 탓일까.
그래서 이 분위기에 취해, 부두에서 해변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 때리고 있었다.
Saint-Louis 성당의 모습. Grand-Bourg 성당보다 훨씬 소박한 모습이지만, 오히려 정감은 더 가는 느낌이다.
다시 차를 달려 Plage de Moustique로 이동. 1km가 훨씬 넘는 길이로, 아마도 이 섬에서 가장 큰 해변이지 싶다.
모래도 깨끗하고 물도 투명한, 아름다운 해변의 정석. 그런데 이 해변을 전세 낸 기분이랄까.
이번에는 Anse Canot. Plage de Moustique보다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오히려 사람은 더 많다.
왜인지는 잘 모르지만, 추측컨대 물빛이 조금 더 예쁘고, 또 요트가 정박해 있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는 Plage du Vieux Fort. 이곳도 아름다운 해변이지만, 모래 해변 바로 앞바다까지 바위가 깔려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이지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얕은 물 속 바위가 단조로움을 막아주는 느낌.
하나 특이한 점은, 해변 앞 바다에 바위섬이 하나 있다는 것. 그 위에 홀로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
Gueule Grand Gouffre에 도착. 섬의 북쪽 해안은 서쪽과 달리 절벽 해안이 많이 보인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색이 진한 것이 살짝 무서운 느낌도 들고.
여튼, 파도가 쉴새 없이 때리니 절벽에 기어코 구멍이 나버렸다. 아루바 등지의 Natural bridge와 비슷한 느낌.
그런데 마침 살짝 내린 비 덕분에 그 위에 무지개가 뜬 것 아닌가. 진귀한 광경을 허락해준 자연에 감사할 따름.
Caye Plate. 섬의 북동쪽 해안에는 이와 같은 절벽이 다수 존재한다. 비교적 평탄한 섬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지루해질까봐 갖출 것은 다 갖춘 느낌.
이제 럼 투어, 유적 투어, 해변 투어까지 모두 마쳤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섬의 남쪽 해안으로 향한다. 이 풍요로운 경치는 앞으로도 쉽게 잊히지 않을 듯.
차로 한 20분 달리니 섬의 남쪽 해안에 도달한다. 이곳에 있는 마을은 Capesterre-de-Marie-Galante.
다른 마을의 성당도 확인해봤으니, 이 마을의 성당도 찾아가 본다. 셋 중에서는 가장 위압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디자인. 하지만 성당 투어를 하러 이 섬에 온 것은 아니니까.
이 마을도 앞바다에 멋진 해변이 있고, 특히 비치바가 두 개나 있어 해수욕과 함께 즐거운 식도락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일찍 닫는 바람에 입장은 실패.
그나마 이 비치바도 원래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지만, 딱한 사정을 듣고는 손님들 나갈 때까지 럼이라도 마시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리 하여 시작된 럼파티. 일단 Bellevue의 럼 한 잔 마셔주고...
... Bielle의 럼도 한 잔 더해준다.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한 시간 이상 앉아서 노닥거리게 되었다.
정작 저녁은 먹지를 못했으니, 일요일 저녁에도 은혜를 베푸는 식당을 찾아본다. Le Murat라는 프렌치 식당이 끌려 그곳으로 향한다.
일요일 밤이라 손님은 적었지만 음식과 서비스만큼은 대만족. 추천 받아 주문한 뇨끼도 정석대로였고...
... 생선 구이도 딱 맞는 익힘 정도로 든든하고 맛있게 배를 채워 주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푹 자니, 다음날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한창 해가 뜨는 중.
아침 일찍 Terre-de-Haut로 향하는 페리를 타야 하기 때문에, 일찍 길을 나선다. 마음은 급하지만 공항 활주로와 바다의 모습이 아름다워 잠시 차를 세우고 감상.
Saint-Louis에서 차를 반납하고 부두로 걸어가다 보니, 새벽부터 연신 빵을 구워내는 중이다. 이미 맛있게 아침을 즐기는 사이클리스트를 보는 순간 발길은 이미 빵집으로.
시골 마을 빵집이지만, 아침부터 다양한 빵과 샌드위치 그리고 디저트를 구워내는 중이다. 다 맛있어 보여 고르기 힘들다.
하지만 결국 가장 기본에 충실한 잠봉 뵈르로 결정. 커피 한 잔과 즐기는 빵 하나에 하루가 이리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이 작은 사거리에 새벽부터 빵을 구워내는 빵집이 두 개나 있다. 이렇게 보면 카리브해의 섬이지만 확실히 프랑스령이긴 하다.
Saint-Louis 부두에 누군가가 예쁜 그래피티를 그려 두었다. 'Senlwi'라 적어둔 것은 아마 Saint-Louis의 크리올 발음이리라.
탑승 시간이 임박하자 저 먼 바다에서부터 배가 나타나 부두로 다가온다. 알고 보니 과들루프에서 출발한 배가 이곳을 잠시 들러 Terre-de-Haut까지 가는 것.
내릴 사람 내려주고 탈 사람 태운 페리는 다시 Terre-de-Haut를 향해 출발한다. 떠나는 순간까지 평온한 느낌으로 배웅해주는 마리 갈란트. 꼭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