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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May 17. 2022

# 3. 그를 향한 의심의 불꽃이 타오르다.

두 번의 만남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감은 오지.

아, 이런 조건의 사람을 나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나이가 나보다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섣불리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여느 연인처럼 삼청동, 포천 산정호수, 북악스카이웨이 같은 데이트 명소들을 골라 함께 다니며,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평범한 연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킨십이 전혀 없었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한 달 남짓 데이트를 하며

결혼을 전제로 한 썸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밤에는 통화를 잘 안 한다는 점 외엔.


낮에도 퇴근시간에도 쉴 새 없이 카톡과 전화를 해가며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했다.

왜 사귀자는 말을 안 하지?

무슨 간을 이렇게 오래 보는 거야?

결혼을 생각하며 만나느라 신중의 신중을 더하는 거니?


평소 성격 급한 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다.

보수적인 꼰대 마인드로 그래도 여자가 먼저 사귀자고 할 수 없지,

기다리자 기다리자, 기다리자.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못 기다렸다 결국 나는.

이 훌륭한 조건의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저 넓은 등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빨리 나의 남자친구로 확정 짓고 싶은 성급함이 밀려왔다.


여느때처럼 그와 한참 통화하던 어느 밤.

우리는 무슨 사이죠? 왜 사귀자는 말을 안 해요?

혹시 나 모르게 우리 사귀고 있었던 건가요?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그가, 평소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던 그가 갑작스레 언어장애가 온 듯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제나만 괜찮다면 난 제나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그렇게 우리는 연인으로서의 첫날을 맞이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이제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다는 정도.

그리고 뭔가 모르게 자만심에 가득 빠진듯한 그.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엄마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

엄마 아버지, 드디어 딸이 시집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고

외아들이며, 꽤나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어디 대기업을 다니고 있어요.

집이 어디인데 돈이 꽤나 많은 집이에요.

키도 크고 인상도 좋고 참, 종교도 같아요!!!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는지 몰라요.

이제 엄마 아버지 근심 걱정 놓으세요.


부모님의 반응은 사뭇 상반됐다.

엄마는, 외아들이야? 걔 마마보이 아니니? 나이도 너무 많고.

이에 반해 아버지는,

제나한테 분에 넘치는 조건이다. 잘 만나봐라.


마마보이를 걱정한 엄마를 차근차근 설득하고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여느 연인과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세 달 가까이 연애를 계속했을 때 그가 결혼을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그리고 너를 우리 집에 소개하고 싶다고.

나는 그래도 사계절은 서로 만나봐야 결혼을 결정지을 수 있을 거라고 그를 다독였지만, 그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때부터 였을까.

여자의 육감은 무시할 수 없는 타고난 무엇이다.

놀랍도록 발달된 나의 촉.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자꾸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갑자기 이 사람의 모든 것에 거부반응이 일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뭇사람이 물으면, 과민반응 아니냐고 나를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심이 드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한 번은 둘이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본인이 혼자 거주한다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전날 잠시 들르게 되었다.

집 여기저기를 꼼꼼히 보는데, 세탁기에 아주 화려한 그레이 컬러의 여자 속옷이 들어있었다.

이게 뭐죠?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그는, 혼자 사는 아들이 걱정된 어머니가 종종 오셔서 머무르시는데 어머니 속옷이 빨래통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 해명했다.


아니 그럴 수는 있는데, 어머니 연세가 환갑이 지나셨는데 이렇게 요란한 속옷을 입는다고요?


어머니들은 그런 속옷 입으면 안 돼?


라고 반문하니, 조가비처럼 입이 꼭 다물어졌다.

그래, 입을 수 있지.


한 번은 밤늦게 통화를 잘 안 하는 그가

새벽 한~두시까지 전화를 붙잡고 끊을 생각을 안 한다. 집이에요? 물으니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이란다.

혼자 산다면서 집에서 통화 안 하고 왜 이 시간에 밖에 있어요. 물으니 집에 어머니가 와계신다고 했다.


어머니가 계시면 통화하면 안 돼?

어머니는 아버님도 계신데 아들 집에 왜 이렇게 자주 오시는 걸까.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집집마다 각각 문화도 다르고 사는 모습도 다르니

하나뿐인 아들이 걱정되어 어머니가 자주 드나드실 수 있다 여겼다.


지난번 말 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해석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여러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이 사람이 말했던 자신의 모든 조건들, 이를테면 학력, 직장 같은 내세울 만한 조건들이 의심스럽다.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옳거니!!!

나는 예전에 한 대학에서 계약직 교직원으로 근무하며 이 남자가 졸업했다고 하는 학교의 교직원 중 한 명을 알고 있다.

그 교직원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 생년월일과 이름, 전공을 알려주고 졸업 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학력위조는 아니었다.

재수를 하긴 했지만, 그가 말했던 그 대학 그 과를 졸업한 것이 맞았다.


그래도 뭔가 찝찝한 이 기분.

하아... 뭘까.

대체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걸까.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의 다른 지점에 내 친구의 건너 지인이 근무 중이다.

혹시 ooo 란 사람이 거기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게 맞나요?

다행히, 그가 말한 회사의 정규직 과장으로 근무 중인 것도 확인했다.

그럼 직장을 뻥치지도 않았다.


근데 나의 촉은 숨죽일 생각이 없다.

의심의 폭이 더욱 커지며, 이 사람을 만나 데이트를 해도 집중이 안 된다.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자꾸 의심이 드는 걸까.

이게 의부증의 초기 증상 같은 걸까.

그럼 나는 이제 결혼 따위는 포기하고 정신과 치료부터 받으면 되는 걸까.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숨통을 옥죄어 오던 그때 즈음. 헤어짐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우리요.

건너건너 멀게 소개로 만났잖아요.

그리고 과장님은(나는 그를 과장님이라 불렀다, 왠지 모르게 오빠 소리가 안 나와서...) 빨리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과장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 서로에 대해 확인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는 내가 비밀리에 본인의 뒷조사를 한건 모르니)

이를테면 졸업 증명서, 재직증명서, 그리고 혼인관계 증명서 같은 걸 교환했으면 해요.

제 것도 떼올게요. 못 믿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해 더 신뢰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어서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릴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그가 혹이라도 내 제안에 기분이 상할까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허나 나의 조심스러웠던 태도와는 다르게

그는 매우 흔쾌히 답을 줬다.

좋아요! 다음 만남 때 가져오는 걸로 하죠.


오... 괜히 걱정했어.

미안해라 ㅠㅠ 이렇게 흔쾌히 답하는 걸 보니

그는 나를 속인 게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나에게 너무 과분한 상대를 만나다 보니

도둑이 제발 저리듯 의심을 했나 봐.

안제나 이 멍청한 년.

그러니 맨날 남자한테 차이지.


자리에 앉아 졸업 증명서, 재직증명서 발급을 받고

혼인관계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잠시 근처에 구청을 다녀왔다.

다녀오는 동안 내내 그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는 발급받은 서류를 챙겨

약속 장소로 향했다.


두근두근 두근, 이렇게 떨릴 수가.

다행히 그는 전과 다름없이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았다.

많이 기다렸나요?

(서류를 내밀며) 저 준비해왔어요.

내 서류를 받아든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서류를 찬찬히 보던 그가 내가 준비한 서류를 곱게 접어 자기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과장님은요?

아 저는 깜빡하고 놓고 왔어요.

다음 번 만날 때 꼭 가지고 올게요.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장난하니??

이거 정말 미친놈이네.

내 주민번호가 다 적힌 내 서류를 지 가방에 쑤셔 넣더니 지건 안 갖고 왔다고??

역시 난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게 아니었어.

합리적 의심이었어.

이 새끼 뭐야 도대체.


약속을 어긴 그를 보며, 나는 이제 그의 머리카락 한올까지 믿을 수 없게 됐다.

혹시 입양아인가.

뭐지 대체.


지금껏 잘 숨겨왔던 나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이 말 같지도 않은 상황에 더 이상 웅크리지 못하고

그 기괴한 자취를 드러냈다.


과장님, 서류 준비되면 연락하시고요.

다음번에도 빈손으로 오신다면

저는 더 이상 과장님과 만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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