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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May 18. 2022

# 4. 세상에 절대란 없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내 혼인관계 증명서를 들고 튀었던 그에게

연락이 왔다.

서류는 준비되었다고.

내일 본인의 연차이니 나의 퇴근시간에 맞춰

우리 회사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 했다.


그 며칠간, 나는 별의별 상상을 다하고

온갖 막장 드라마의 줄거리를 되뇌며

나는 아닐 거야, 설마 아니겠지를 연발하며

나를 위로했다.

불안과 초조 속의 며칠이 어찌나 더디게 지나가던지.

도대체 나는 왜 평범할 수 없는 거야.

하느님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원망했다.

지겨워 지겨워 정말 지겨워,

평범하고 싶은 게 그렇게 욕심인 거야?

온갖 부정적 단어로 나를 무장하면서도

아닐 거야. 별일 아닐 거야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6시 퇴근 시간.

가방을 챙겨 쏜살같이 회사 정문을 나왔다.

건물 1층 앞에 많이 보던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다.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며 차 문을 열어 나를 태운다.

여느 때와 다름이 없다.

그는 친절했고, 자상했다.


반면 나는 일그러진 얼굴이 도저히 펴지지 않는다.

이 모든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건

그의 매너도 자상함도 아니다.

오로지 그가 준비한, 그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들뿐이다.

차에 타자마자 급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말을 뱉었다.


서류 가져오셨나요?


어디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해요.


조용한데 이 근처 많은데 굳이 멀리까지 뭐 하러 가나요? 서류 가지고 왔으면 빨리 주세요.

보기 전엔 어디도 가지 않겠어요.


일단 조용한데 가서...


조용한데 가고 싶지 않으니 당장 여기서 네 서류 내놓으라고요!!!


성깔을 부리며 난동을 피우니, 그제서야 내 서류를 쑤셔 넣었던 그의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본인의 서류를 꺼내 나에게 내민다.


판도라의 상자는 그렇게 힘없이 열렸고,

그가 그렇게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은 진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혼인관계 증명서.

나는 이번 일을 통해, 혼인관계 증명서란 서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의 서류를 발급하면서 아...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작은 정보를 얻었을 뿐이다.


나의 것은 깨끗했다. 그와는 달리.

그의 것은 나와 사뭇 다른 모양새였다.

결혼을 하셨었네요...?

여기까진 예측 가능했다.

지난번 만남 때 서류를 까먹고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개드립을 칠 때부터,

이혼 혹은 동거 혹은 입양아? 정도의 시나리오는 예상해서인지 조금 떨렸지만 아주 놀라지는 않았다.

서류를 보니 2년 남짓의 결혼생활을 했던 터였다.

그래.

요즘    집이 이혼을 한다는데

그럴 수 있지.


혹시, 아이도 있으세요...?


저... 그게...


아이 있으시냐고요.


7살짜리 딸이 있습니다.

띠로리....

이건 내 예상 시나리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설마... 설마 아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고작해야 동거 경험이 있거나.

혹은 그래, 이혼을 했다거나!!!

아니면... 부모님이랑 1도 닮지 않았던데, 혹시 입양아인가?

까진 생각해 봤지만 아이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럼 그 집에 갔을 때만 해도 없었던 아이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차 세우세요.


어디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차 세우시라고요.


아니 그러지 말고 어디 조용한데...


조용한 데는 너 혼자 가고 차 일단 세우라고!!!!!!!!!!!!


끝내 세우지 않는 그의 차에서

나는 과감히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한번 데구루루 굴러 엉금엉금 기어가보니

웬 지하철역 입구이다.


숨도 쉬어지지 않을 만큼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눈물이 아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이 말로 표현 안되는 기막힘이

오열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나 상황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내 안에서 폭발한 나의 감정만이 존재할 뿐.


웬 젊은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있으니

친절한 몇 행인들은 말을 건네온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말도 나오지 않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한 손으로 괜찮다는 손짓을 해 보인다.

안 괜찮다. 젠장.


기막혔다. 왜 나는 늘 이런 식일까.

이제야 완벽한 남자를 만났다고 한껏 기뻐하고 자랑을 해대고 나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며 스스로 위안한 게 고작 몇 개월이다.

나는 좀 그런 사람 만나면 안 돼?

완벽한 조건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결혼 좀 해보면 안 되냐고.

서른셋에 결혼을 약속한 남자에게 환승 이별 당하고, 스물아홉 번에 말도 안 되는 소개팅을 거쳐

이제야 좀 괜찮은 결혼 상대자를 만나,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그리 들떠있었는데,

뭐?? 이혼남?? 거기다 애도 있어?

좋아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걸 숨기고 결혼할 생각이었다고?


진짜 대단하다.

너의 배짱과 정신력은 내 높이 살게.

하지만 난 싫어.

난 평범한 가정, 행복한 가정 이루어서

좋은 엄마, 현명한 아내로 살고 싶다고.

제발 내 꿈을 망치지 말고 어서 빨리 내 인생에서 빛의 속도로 꺼져주길.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더 이상 울 기운도, 일어설 기운도 없을 것 같던 그때

웬 손길이 느껴진다.

저 도로 끝에서 차를 돌려 어딘가 차를 대놓고

그가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얘기 좀 해요...

끝내도 되니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잔뜩 풀 죽은 그를 보니,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일 기운도 없는 나를 보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긴 했다.


얘기만 들을게요.

우리 관계는 정리하는 걸로 하죠.


그렇게 다시 그의 차를 타고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딘가의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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