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해석한다
모든 걸 내려놓고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소개팅이라 다짐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12월 초. 서울의 겨울은 조금 쌀쌀하고 건조했다.
나는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총알 숫자를 세는 마음으로 마지막 소개팅에 대비해 나의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얌전하게 보이는 게 낫겠지?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너무 튀지 않는 차림으로 가자.
나는 검은색 단정한 원피스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와인색 목도리를 둘렀다.
상대방의 키가 큰 편이라고 귀띔해 준 주선자의 이야기가 떠올라 9cm 높이의 밤색 부츠도 신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마지막 소개팅 장소로 향했다.
이번에도 아니면, 정말 그만둘 거야.
다시 한번 다짐을 견고히 한다.
주말의 쇼핑몰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댔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주변을 서성이며 많은 인파 속에서 그 남자를 찾기 시작한다.
저 사람인가. 아냐 키가 크댔어.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하아... 저 사람은 아니었으면.
저 멀리 그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인다.
아!!! 저 사람이 맞는 것 같아!
멀리 보이는 그는 지난 스물아홉 명의 그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외모.
185cm는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은 보기 좋은 체격.
눈에 띄게 세련된 얼굴은 아니지만
보기 좋게 인상 좋은 서글서글한 이목구비.
흠...
듣자 하니 서울 사대문 안에 손꼽히는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의 마케팅팀 과장이며,
술, 담배 할 줄 모르고, 집안 경제 상황도 꽤나 넉넉한데, 종교마저 나와 같은.
하아... 심봤다..............
내가 서른 번째 이 남자를 만나려고
그동안 그런 맘고생을 해야 했던 것이구나.
성격만 사이코 같지 않으면 이 사람과 잘해봐야지.
수줍게 인사를 나누고 그를 맞이한다.
가까이서 보니 옷이 좀 허름하긴 하다.
누구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옥색 니트에
빈티지 청바지가 아니라 진짜 낡아서 찢어진듯한 데님 바지...
삭고 삭은 가죽 장갑.
괜찮아.
스타일은 내가 바꿔줄 수 있어.
남자가 너무 본인 멋 내기에 몰두해 있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지.
암 그럼 그럼... : )
카페의 한 귀퉁이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보통의 소개팅 남녀가 그러듯 서로의 인적 사항을
살금살금 탐색한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시면... 퇴직연금이 꽤 되시겠네요. 그럼 부모님을 책임지시진 않겠어요.
라든가,
대학 졸업하고 일하신지 10년이 다 되셨으면
연봉이 꽤 되실 거 같은데
같은 꽤나 거슬리는 말들을 간혹 내뱉기도 했지만
30대 중후반의 남녀가, 결혼을 전제로 한 소개팅 만남에서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 애써 위안하고 포장했다.
그런 계산적인 얘기들만 나눈 건 아니니까.
부츠가 참 멋있네요.
향수 냄새가 매력적이네요.
같은 가볍고 대수롭지 않은 농담 따먹기도
곧잘 했으니, 뭐 그 정도쯤이야.
오후 1시쯤 만난 우리는 저녁 7시가 될 때까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서로에 대한 탐색을 이어갔다. 아침부터 마지막 소개팅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느라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출발했기에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을 거 같은데
이 인간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아사하기 직전까지 입을 털어댄다.
아 밥 언제 먹지, 배고파죽겠는데.
이 사람의 최대 단점은 눈치가 없는 건가..
밥 먹고 싶다.
하루 종일 커피 한 잔으로 버티며
저 사람의 탐색전에 기를 빨리고 있으니
머리가 팽팽 돌며, 쉬지 않고 떠드는 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머릿속엔 더 이상 상대에 대한 탐색이고 뭐고 없다.
그저 밥 먹고 싶다는 욕구만 가득 차 있을 뿐.
배가 고프다 못해 짜증이 솟구치려고 할 무렵
그가 말한다.
저녁 먹으러 갈까요?
그래, 제발 밥 먹으러 가자
내가살께 그놈의 밥.
시간이 몇 신데 일찍도 말한다 정말 ㅠ
걸신들린 듯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쇼핑몰을 한 바퀴 돌자는 제안을 승낙한다.
배가 차서 기분이 좋아졌거든 : )
그러고는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준다.
스물아홉 번의 소개팅을 하며 역까지만 바래다준 것도 니가 처음이긴 하다.
신박하네 정말.
지하철역에서 내가 타고 갈 지하철이 먼저 도착했다.
잘 들어가세요.
이 역도 자주 오게 되겠군요.
응? 자주 오게 된다고?
너 나랑 계속 볼 생각이니?
의문점만 가득 남기고 서른 번째 소개팅은 그렇게 마무리 됐다.
집으로 돌아와 오빠와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 소개팅은 어땠어?
음... 나쁘지 않았는데, 뭔가 계산적인 거 같아.
우리 아버지 공무원연금 얘기랑, 내 연봉 얘기 같은 걸 해서 그 부분이 좀 별로였어.
속물 같지 않아?
바보야, 남자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
근데 그 남자는 순진한거네, 그러니까 마음속으로 할 얘기를 겉으로 드러내서 하는거지.
선입견 같지 말고 세 번은 만나봐.
그 정도 조건이면 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으니까.
오빠의 충고가 내심 귀에 쏙 박혔다.
아니. 어쩌면 속물은 그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 사람의 조건이 결혼 상대자로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분에 넘치니, 단점도 장점으로 보이고
계산적이라 여겼던 그 사람의 발언도 현실적이라 애써 바꿔 생각한 걸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기 편한 대로 그렇게 상황을 해석한다.
여하튼, 두 번은 더 만나보기로 나 혼자 결정하고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다행히 그 역시 나를 두 번쯤은 더 만나기로 작정했는지 연락이 온다.
그와 드문드문 연락을 이어가던 어느 날,
일주일쯤 시간이 흘렀을까.
퇴근 후 우리 집 근처에서 보자는 그.
지금요?
밖에 눈보라가 치는데요?
실로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이미 눈이 꽤 많이 쌓여있었고 해는 이미 넘어가 칠흑같이 어두운 때였다.
근데 지금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온다고?
그의 직장에서 우리 집은 40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8시가 다 된 시간에 눈보라가 이렇게 치는데
운전을 해서 이곳까지 온다고 한다.
허허.
너도 내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주섬주섬 그를 만날 준비를 한다.
오늘은 빨간색 코트.
실제로 보니 키가 꽤 컸어. 오늘도 높은 굽을 신어야지.
그가 도착했다.
퇴근하고 넘어온 그는 지난번 옷차림보다는 훨씬 나은 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사복을 못 입는 모양이군...
출근 복장은 심플한 비즈니스 캐주얼이었는데
지난번 그 말도 안 되는 옥색 터틀넥보다는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우리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첫 만남 때처럼 계산적인 발언이 오늘은 다행히 나오지 않아 실망스러웠던 그의 이미지가 점차 회복되고 있었다.
저녁만 먹었는데도 시간이 꽤 늦어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주차장으로 가는데,
눈길은 이미 빙판이 돼 미끄럽고 나는 오늘도 하이힐을 신어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는데, 그는 내 손도 잡아주지 않는다.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여기 밟으세요. 저기 밟으세요.
이러는 꼴이라니.
모야 이건 또.
어떻게 겨우 차를 타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내려주고 작별 인사를 한다.
전에 소개팅남들은 무조건 집 앞까지 가려고 했다.
또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손 한번 잡아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런데 이 남자는 손잡을 기회가 이렇게 버젓이 있음에도 오히려 조금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모습이 그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
음... 나쁘지 않은데.
근데 참 의심스러워.
이렇게 젠틀하고 멋지고, 조건도 좋은 남자가
왜 여태 결혼을 안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눈이 높아서 결혼을 안 했다 치자.
왜 나같이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여자한테 관심을 갖지.
음... 나이가 꽉 차 다 보니 이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아니지, 내가 그냥 남들 눈에는 평범하고 별 볼일 없어도 어쩌면 저 사람 취향일 수도 있는 거지.
또 나는 나한테 유리하게 상황을 해석한다.
저 사람의 의중이 슬슬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