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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May 11. 2022

# 1. 누구에게나 리즈시절은 있다.

그와의 첫 만남

누구나 인생에서 제일 잘나가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나의 그 시절은 서른셋 즈음.

갓 서른이 되었을 때 나는 한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고(차암... 지금 생각해도 별별 직종을 다 경험했다)

그때 내가 일하던 병원에 환자로 방문했던 한 사람과 꽤나 진지하고 오랜 연애를 했었다.


한 살 위의 오빠였는데, 첫눈에 반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급여도 많지 않았고,

차도 없는 뚜벅이어서 늘 버스나 지하철로 이동하며 데이트를 하고 내가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그와 데이트를 했어도 나는 무척이나 행복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엔 내가 더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사람과는 미래를 함께 할 수 있겠다.

함께 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며 3년 가까이 연애를 했다.


그의 부모님은 병원에서 나를 잠깐 본 바로는

내 인상이 기가 무척 세 보인다며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고 초반부터 우리의 만남을 반대하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의 아버지가 보낸 메시지.


그 애 버리고 얼른 집으로 오너라.

야속하구나.


허허.


그러나 그때 그의 눈에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그 애를 버리고 집으로 오라는 그의 부모님을 찬찬히 설득하고 뜻을 거스르며까지 나와의 만남을 계속했다.


그렇게 1년, 2년 해가 거듭되며 내 나이 서른둘이 되었을 때 나는 그를 우리 부모님께 인사시키기로 했다.

결혼할 사람으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고, 많이 배우지도 않았으며

공공기관의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어 급여도 많지 않았지만 김치 하나만 놓고 밥을 먹어도 그와 함께라면 나의 인생이 행복할 거라 여겼다.

넉넉하진 않겠지만 내가 벌면 되니까.


그 시절 나는, 사랑에 목숨 거는 그래도 조금은 순진하고 여우 같지 못한 그런 여자였다.


아버지는 조금 더 여유 있는 사위를 탐냈을 법도 한데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며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셨고 어머니 역시 귀엽고 애교 있는 성격의 사위가 무척 마음에 든다며 참 예뻐해 주셨던 터였다.


그렇게 우리 집 인사를 마쳤지만, 어쩐 일인지 몇 달이 지나도 그는 나를 자기 집에 인사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어머니 몸이 안 좋으시단 얘기를 전해 들으면 영양제를 사서 손에 쥐어보내기도 하고

그의 형수가 출산을 했다고 하면

유기농 면으로 만들어 꽤나 값이 나가는 신생아 옷을 한 꾸러미씩 들려보냈다.

어버이날이 되면, 한 번도 뵌 적 없는 그의 부모에게

카네이션 한 다발을 사 보내기도 했었는데

그는 나를 그의 부모에게 인사시킨 적이 없었다.

아니 부모는 고사하고 그의 친구도 만나본 적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아버지는 언제 상견례 일자를 잡을지 계속해서 물어오셨고, 이 문제로 남자친구와 다툼이 일어나 결국 서로 시간을 갖기로 했는데, 뭔가 점점 여자의 육감이 발동되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쌓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만나 주지 않고 연락해도 받지 않는 그의 회사 앞에 찾아가 해가 지고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차라리 헤어지자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럼 실낱같은 희망조차 접어버릴 텐데,

그는 헤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시간을 좀 갖자.

반복해서 같은 말만 뱉어댔다.


나는 그가 간절했다.

그때만 해도 사랑에 목숨을 걸던 나였다.

날 차버릴까 두려웠고,

이제 결혼 적령기에 들어간 내 나이가 겁났으며,

이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흔히들 이별을 겪을 때 누구나 하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 온갖 망상들이 내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서른둘, 가을에 시작된 이별의 징조는

다음 해가 오고서야 매듭을 지었다.


역시나 그는 몇 달이 지나도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았다.

아주 드문드문 연락을 받아주며 기다리라고,

좀 더 기다리라고 나를 달랬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어떤 식의 기다림이든, 기다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를 만나는 3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그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 나는 늘 데이트 비용을 대고, 이벤트를 했으며, 사무실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그의 말에 떡을 맞춰 그의 사무실로 보내기도 하고

잘생긴 얼굴에 맞지 않는 허름한 옷차림이 맘에 걸려 그의 집으로 줄기차게 옷을 사 보내기도 했었다.


반면 그는, 데이트할 때마다 편의점 샌드위치나 김밥, 컵라면을 사거나 아주 가끔 인심을 쓰며 순댓국을 사주는 정도의 비용을 지출했다.

그래도 좋았다.

내 주머니가 가벼워지고 내 통장이 텅텅 비어도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가 나에게 돈을 쓰지 않는 건 정말 그의 주머니에 든 돈이 없어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나에게만 항상 비었었나 보다.

본인 어머니의 세탁기와 냉장고를 바꿔주거나,

본인 어머니 아버지를 비행기 태워 호주에 보내줄 때는 주머니가 꽉 차는 기이한 현상이 번번이 일어나더라.

그게 미안했는지, 아니면 지도 사람인지라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나에게 10만 원씩, 딱 두 번 용돈을 준 일이 있었는데 이별의 징조가 발생한지 약 4개월 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빌려준 돈 돌려줄래?

xx 은행 123-456-7890


내가 오빠한테 돈을 빌렸었어?

얼마를 빌렸는데?


너한테 10만 원씩 두 번 줬잖아.

20만 원 돌려주면 돼.


아... 그게 빌린 거였구나

내가 빌려줘, 언제까지 갚을게라고 한 게 아닌데

그걸 갚아야 했던 거구나

알았다.


기막혀 뒤지겠네.

그렇게 내게 남아있던 그를 향한 먼지만큼의 애정이

깨끗이 털어졌다.

정말 한마디로 정이 뚝 떨어지더라.

내가 이딴 새끼를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 하려 했다니.

기막힐 노릇이군.

이제라도 이런 인간인 걸 알아차려 감사하다고

하느님께 기도라도 드려야겠다.


여담으로 이 남자는 그 해 겨울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감히 나랑 양다리를 걸쳐? 어이가 없네)

아이가 생기지 않아 결혼 후 5년 만에 시술로 아이를 낳았다.

아직도 나를 잊지 못했다며, 니가 생각난다며

나에게 끊임없이 연락을 해오다, 최근 나에게 차단을 당했다 : )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와 결혼하지 못해 너무나 후회된다는 그에게


나는 오빠랑 결혼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인 것 같아

오빠는 나랑 살았어도 이렇게 다른 여자한테 연락했을 사람이니까.


아 꼬셔라. 완전 핵사이다!

역시나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여하튼 이렇게 서른셋이 되던 해에 그와 이별을 하게 되며 나의 마음은 한없이 조급해졌다.

당시 시대의 흐름으로 봤을 때

여자 나이 서른셋은 결혼 적령기였다.

서른셋에 결혼을 약속하고 3년 가까이 만나던 남자에게 차였으니

하아.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주변 친구들도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했으니 나의 마음은 불안, 초조 그 자체였다.

나 진짜 어떻게 해.


서른셋이 될 때까지 꽤 많은 연애를 해봤지만

난 단 한 번도 소개팅으로 누굴 만난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라

(요즘 친구들 말로 자만추라고 하던가... ㅎㅎㅎ)

소개팅을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 부자연스러운 행위가 나랑은 조금 맞지 않았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까.


하지만 나한테 맞고 맞지 않고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러다 노처녀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부터 결혼을 위한 대작전, 시작이다!!!


닥치는 대로 소개팅을 했다.

그동안 소개를 해준 적 없으니 이제 소급해서 소개를 해다오-

라고 말도 안 되는 우격다짐으로 주변 사람들을 들들 볶으며 남자를 만나댔다.


어떨 때는 하루에 두 탕을 뛰기도 했다.

점심때 한 명, 저녁때 한 명.

그럼 점심에 만날 사람은 신사동에서 만나고

저녁때 만날 사람은 강남역서 만나야지.

이동거리와 약속시간이 딱이야!

서른셋이 되던 해 1월부터 11월까지

나는 총 스물아홉 명의 남자를 만났다.

다행히 나의 리즈시절은 서른셋 즈음이라

소개팅을 할 때마다 타율이 꽤나 좋아

두 번을 제외하고는 애프터를 받았던 기억이다.


하도 많은 남자를 만나다 보니,

내가 이 남자한테 그 얘길 했던가.

저 남자한테 말했던가.

아 맞다. 이 남자 누구였지.

기억조차 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의 이름을 저장할 때

회사명+이름 혹은 사는 동네+이름처럼

내가 그를 기억할 수 있는 단서를 앞에 붙여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


취미가 뭐죠?

쉬는 날은 뭐 하세요?

혈액형은 뭔가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영화 좋아하세요?


아 지겨워.

Ctrl C, Ctrl V

반복 반복


전과 달리 사랑에 빠져 그 사람이 너무 좋아 연애를 하려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기 위한 사람을 만나려다 보니 조건은 점점 타이트해져갔다.


나보다는 좋은 학교를 나왔으면.

더 이상 데이트 때마다 편의점 도시락과 순댓국은 안 먹고 싶으니 연봉이 나보다는 더 많아야 하는데.

키는 큰 게 좋아.

술, 담배? 안되지.

종교가 같았으면 좋겠는데.

등등


너 담배 피워? 그럼 넌 탈락.

키가? 흐음 안되겠는데.

종교 있니? 종교 다르니 패스.


스물아홉 번의 소개팅이 끝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결혼할 운명이 아닌 것이다.

팔자가 그러하니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것이다.

집어치우자.

그냥 혼자 사는 거야!!!

그렇게 계절이 돌고 돌아 겨울이 오고

서른 번째 소개팅을 앞두고 다짐했다.


이번에도 아니면, 정말 하늘의 계시로 알고

나는 혼자 살 거야.


그렇게 나는 전남편을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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