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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May 20. 2022

# 5. 내게 가장 슬픈 단어, 만약에

<이 일이 일어난 지 무려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7년의 시간 동안 나는 결혼도 하고 출산도 했으며

이혼도 했다.

너무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서인지

아니면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나의 기억은 조금 퇴색한 듯하다.

굳이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들은

구태여 억지로 생각해 내지 않으려고 한다.

또렷이 기억하는 장면들만으로도,

흰 종이에 수만 자의 글자를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끝나는 마당에 한두 시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어려울 것은 없었다.

무슨 마음으로 나를 속였는지.

도대체 언제까지 속일 예정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었는지.

그 뚫린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가 나지막이 말한다.


사랑하지 않는 결혼을 했었어요.

아버지가 맺어준 사람과 정략결혼 비슷한 걸 했는데, 그 사람이 임신을 하는 바람에, 정리하지 못하고 결혼을 했지만 사랑이 없어서 끝내 함께 하지 못했어요. 그 사람은 사치가 심했고, 내 부모와 다툼이 심한 데다 아이를 전혀 돌보지 않았어요.

이런 문제로 여러 번 크게 부딪혔고 결국 그 사람의 온 가족들이 찾아와 신혼집에서 가구를 전부 빼버린 뒤, 아이 돌 반지와 돌 팔찌까지 모두 챙겨 집을 나갔고, 그게 전부입니다.

서류상에는 3년 정도 같이 산 걸로 되어 있지만

실상 1년도 채 못 살았어요.

제나를 만난 뒤 나는 다시 태어난듯했어요.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제나가 날 떠날 것 같아 말을 못 했어요.

아이 걱정은 말아요.

아이는 부모님이 맡아 길러주시기로 했어요.

너는 너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나가라고 하셨으니

우리 둘이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면 돼요.


늘 자신감 있고 당당한 모습의 그가

고개를 떨구고 죄인처럼 나지막이 고해성사를 한다.

왜 지금에서야 말하니?

너와 지난 몇 개월을 만나며 이미 정이 흠뻑 들을 때로 들어버려 매몰차게 내치지도 못하겠는데, 왜 이제서야 너의 비밀을 털어놓는 거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왜 그랬는지 이해도 하겠어요.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나는 새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자랐어요. 어머니는 정말 잘해주셨지만, 그래도 나를 낳아준 엄마가 아니라는 거.

우리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분이라

본질적으로 친어머니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

자라오면서 뼈저리게 느꼈고, 때문에 나는 늘 외롭고 아팠고 날 낳아준 어머니의 사랑을 끊임없이 목말라하며 그렇게 자랐어요.

때문에, 나만큼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낳은 아이와 그렇게 평범한 가정 만들어서, 좋은 엄마 현명한 아내, 가끔은 돈돈 거리며 남편과 다투더라도, 그렇게 소박하고 따뜻하게 살고 싶었어요.

나는 알아요.

내가 아무리 당신의 딸을 사랑하려고 애써도

그게 안된다는 거.

당신의 딸이 나를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낳아준 엄마가 살아있는 한, 그건 강요할 수 없는 감정이란 거.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미안해요.

우린 인연이 아닌 것 같아요.


분노가 잦아들고 이성이 돌아오며, 내가 그의 짝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내 입장에서 조곤조곤 설명했다.

참 놓기 아까운 사람이었다.

이혼을 했고, 아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의 반려자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 믿었다.

아니 오히려 과분했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 사람의 핸디캡이 나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그렇게 헤어짐을 고하고 며칠 동안,

몸도 마음도 참 아팠다.

원망할 대상이 없는데 내 삶이 이렇게 굴곡이 생긴 것이 누구의 잘못인 건지 원망도 해보고,

이혼과 전처의 아이,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혹은 그런 단점을 끌어안으면서까지 그 사람이 가진 나머지 장점들이 더 큰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계산기도 두드려본다.

무엇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이 너무도 크고 뜨거웠다.

그 사람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주님.

나의 아버지도, 내 어머니도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던 호칭인

공주님.

내가 33년의 시간을 살며, 누군가에게 이런 공주대접을 받아본 일이 있었던가.

이별이 이렇게 아프고 힘들었었나.

새삼 또 한 번의 이별에 가슴이 저민다.

그는 포기를 모르고 계속해서 연락을 해온다.

받지도 않는 전화를 끊임없이 해대고

보지도 않는 카톡을 쉴 새 없이 보내온다.

퇴근 후 우리 집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본다.

그 사람이 가진 단점 하나를, 나머지 장점이 덮을 수 있을까.

내가 과연 누군가의 새엄마로,

그 아이를 진심으로 품을 수 있을까.

그 사람 말처럼 내가 직접 키우지 않는다 해도

남편의 아이를 모르는 척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그 사람의 과거를 끌어안을 자신이 있는가.


만약에 이 사람이 이혼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했을까.

만약에 내가 결혼 적령기였던 서른셋에

3년을 만난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나는 커오면서 나의 어머니가 남편의 자식들인 나와 오빠를 기르면서 그래도 우리는 비교적 비뚤지 않고 고분고분한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며 사셨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내와 전처의 자식들 사이에서 가끔은 눈치 보며 마음 편치 않았을 우리 아버지의 얼굴도 떠오른다.


만약에 내가 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구김살 없이 자랐다면,

그래서 재혼가정의 어려움을 몰랐다면,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게 훨씬 쉬웠을까?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이다.

만.약.에.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을 해봐도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의 힘없는 눈동자와, 축 처진 뒷모습만 떠오른다.

몇 주 동안 답없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상하다. 생리를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가.

나의 월경주기는 꽤나 규칙적이고 정확한 편인데,

이번 달 생리가 없다.

헐.

설마...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슬리퍼를 제대로 신지도 못하겠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카디건을 걸친 뒤 가까운 약국으로 간다.


저, 임신 테스트기 하나만 주세요.


아닐 거야. 고작 몇 번뿐이었고, 나름 피임을 잘 했잖아. 내가 너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래서 생리가 미뤄지는 걸 거야.


두려운 마음으로 잔뜩 겁먹은 채,

긴장감으로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진 손으로 테스트기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본다.

째깍째깍.

1초가 1년 같다는 말, 그 말은 뻥이 아니었다.

숨도 쉬어지질 않아.

그리고, 임신 테스트기에 선명히 보라색 선이 올라온다.


젠장.

두 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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