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유산을 했을 때가 어쩌면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 아버지의 가시 박힌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간다.
가슴만 할퀴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비수들은 뱃속의 아이까지 앗아가버렸다.
유산됐다는 소식은 그의 부모에게만 알렸다.
우리 집은 내가 혼전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안 그래도 재취 자리로 시집 가는 것을 못내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께 배까지 불러 식장으로 들어가게 생겼어요.라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생겨서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처음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기필코 그와 헤어질 것이라 다짐했지만
하필이면 그 시기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아이를 유산했으니
그렇다면 이제는 그와 헤어질 차례이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헤어짐을 고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이 흠뻑 들어버렸는데, 어떻게 이 사람을 놓을 수 있나. 그 사람을 참 많이 사랑했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이 3할, 나머지 7할은 내 욕심 때문이었다.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심.
남에게 보이는, 남이 부러워할 만한 남편의 욕심나는 배경.
분수에 맞지 않는 부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끝내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유산되던 날.
그에게 하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고 알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어머니가 여행을 가야 해서 딸아이를 돌보느라 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참.
피가 그렇게 나는데 보호자도 없이 혼자 산부인과로 기어가듯 걸어갔던 내 모습이 얼마나 처량 맞고 쓸쓸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렇게 나는 홀로 첫 번째 아이를 떠나보냈다.
한번 유산을 하고 나면 자궁이 매우 깨끗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유산한 다음 달은 임신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음 달 또 임신을 하게 되었다.
발정난 강아지마냥.
부끄럽고 한심하고, 나 자신이 흉물스럽다.
혐오스러워.
구토가 나오려 한다.
그때 갖게 된 아이가 지금의 내 심장, 내가 사는 이유
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들이다.
너를 만나 엄마는 얼마나 행복한지.
두 번째 임신에서는 그래도 초반엔 그의 어머니가 조금 조심해 줬던 것 같다.
본인 때문에 또 유산할까 봐 걱정이 됐는지, 보통 아닌 성격을 조금 누그러뜨려준 듯하다.
물론 얼마 못 가긴 했지만.
그렇게 재혼하는 남자와 초혼의 여자가 결혼식을 치렀다. 그의 어머니 주장대로, 내 주제에 맞게 호텔이 아닌 그의 집 근처 대형마트 안에 있는 예식장에서 식이 진행됐다.
(전처와는 강남의 모 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렀다고 그의 부모에게 전해 들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호텔에서 결혼할 주제가 안되는데 말이야. 부럽네 참)
나는 당시 백수였고, 그는 대기업 과장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친구들 사진을 찍어야 하는 상황에서
내 친구들이 그의 직장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적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신랑, 신부 친구분들 사진 찍게 앞으로 나오세요~
사진 기사님의 말에 하객석에서 지인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 심장 떨려, 조마조마
너무 친구 수가 차이 나면 어쩌지.
소심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걱정하고 있는데
헐. 내가 본 게 맞는 거니?
그의 뒤에는 오직 한 명의 친구만이 서있다.
표정관리가 안 되기 시작한다.
아무리 재혼이라지만, 어떻게 친구가 한 명만 올 수 있지?
정말 친구가 한 명인 거니, 아니면 재혼하는 게 부끄러워 한 명만 부른 거니.
어찌 됐든 상관없다.
하아... 이 부끄러움을 감내하는 것은 내 몫이란 말인가.
쪽팔려...
결국 내 친구들의 반이 그의 쪽으로 넘어가 우여곡절 끝에 사진촬영을 하는데 앞에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친구는 딱 한 명이면 된 거다.
내가 지금 뭘 들은거니.
네 어머니, 좋으시겠어요.
아들 친구가 딱 한 명이라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정리를 하고 집에 오니 시부모님과 딸아이가 신혼집에 와있다.
딸아이는 내가 혼수로 해간 침대의 새 이불 위에서 양말을 신은 채로 펄쩍거리며 뛰고 있다.
내가 내려오라고 말할 수 없잖아.
누군가가 저 행동 좀 제지시켜줘.
아직 나도 누워보지 못한 신혼부부의 새 침대라고!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자고 가자고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렇게 신혼 첫날은 시부모와 딸아이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늦은 시간까지 다과를 즐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의 나의 신혼생활은 이렇게 늘
시부모와 딸아이와 함께여야 한다는 것을.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아서
둘이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이란 제도를 택하는 것인데 나는 그 당연한 것이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은 사치였다.
임신 20주에 결혼식을 치렀던 나의 배는
신혼생활이 시작되며 점차 더 불러왔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오전 시간은 혼자 보냈지만,
오후가 되면 딸아이의 학교 픽업과 학원 픽업을 해야 한다. 중간에 아이 간식도 먹인다. 떡볶이를 참 좋아했다.
남편은 나에게 생활비를 따로 주지 않았다.
내가 처녀시절 쓰던 카드를 사용하면 카드대금을 대신 내주는 식으로 경제권을 움켜쥐었다.
당연히 현금은 없었기에 아이의 떡볶이는 우리 부모님이 남편 몰래 가끔 주셨던 쌈짓돈으로 해결했다.
다행히 아이 픽업은 매일 하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나머지 요일은 시어머니가 해주시기로 했다.
픽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오후 6시 정도.
부른 배로 열심히 저녁을 짓는다.
하루 종일 목이 빠지게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하지만 퇴근시간이 지나도 남편은 오지 않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언제쯤 도착할 건지.
저녁은 먹고 오는 건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문자에 답도 하지 않는다.
열시가 지나서야 번호 키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퇴근시간은 분명 6시인데.
일이 좀 있었어. 저녁 안 먹었으니 밥 줘.
처음엔 정말 일이 좀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를 빼달라는 경비 아저씨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차 때문에 뒤차들이 하나도 못 나가고 있다고.
급하게 차 키를 찾아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조급해지고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우리 차를 시어머니도 가끔 사용하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어머니께 전화를 하니
본인이 키를 들고 뛰어오시겠단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딸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내 전화를 받지 않고 어머니 댁에 간 거였구나.
여태까지 쭉, 그래왔던 거였어.
그래놓고 밥은 먹지 않고 온다.
그래야 어머니 집에 갔던 티가 나지 않으니까.
10시가 넘자 번호 키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이 반복된다.
나는 하루 종일 이 빈집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한강뷰가 끝내주는 이 텅 빈 집에서 뱃속의 아이와 둘이서만, 그렇게 그 집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