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시댁에 안부전화하는 횟수는
일주일에 몇 번이 적당할까?
아무리 딸 같은 며느리라 해도 진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엄마와 딸 같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기본적으로 엄마와 딸은 애증의 관계가 아니던가.
나는 지금도 엄마에게 일주일에 많아야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안부전화를 드린다.
원래 일주일에 한번 드릴까 말까였는데
최근 들어 엄마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지면서
더 연로해지시기 전에 자주 전화드려야겠다 마음먹고 안부전화 횟수를 늘렸다.
시어머니란 존재는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며느리에게 참 어렵고 불편한 존재이다.
안부전화를 드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당최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생활 동안 시어머니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드려야 했다.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는 전화를 드려야 집안이 평화롭다.
또한 딸아이를 시어머니께서 돌봐주고 있으니,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시어머니와 딸이 살고 있는 집에 방문해야 한다.
주말은 거의 시어머니 집에서 하루 종일 있는다고 보면 된다.
시어머니께 전화를 드릴 때 무슨 얘길 해야 하는가.
시작부터 나를 탐탁지 않아 하던 시어머니에게 안부전화하기란 직장 생활에서 꾸중 들을걸 알고 상사에게 결재서류를 내미는 것과 똑같다.
이쯤 되면 차라리 무슨 이슈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싶다. 그래야 전화해서 그 이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라도 하지.
남편이 나 몰래 시어머니 집에 매일같이 들르면서
회사일때문에 늦은척하는 일 말고는 잔잔한 파도같이 아무 일도 없다.
하아...
어제도 전화를 못 했으니 불호령 떨어지기 전에
오늘은 전화를 해야지.
어머니, 별일 없으시죠?
별일 없다.
식사하셨어요?
먹었다.
아, 네... 어머니 그럼 들어가세요.
알았다.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화라는 게 이어지려면
별일 없으세요? 물었을 때, 별일 없다.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라든가.
식사하셨어요? 물으면 먹었다. 너는 만삭인 아이가 밥은 챙겨 먹었니? 라든가
서로가 말을 주고받아야 대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나 혼자만의 일방통행은 1분도 채 이어질 수가 없다.
아니... 할 말도 없는데 왜 자꾸 전화는 하라고 하는 건가.
심지어 내 남편은 우리 부모님께 한 달에 한 번도 전화를 드리지 않는다.
공평한 처사라고 할 수 없다.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 상황이 참 불공평하다 느꼈지만 집구석이 조용하려면 시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나는 시키는 대로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세 번 움직여 아이의 학교 픽업과 학원 픽업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한다.
여전히 남편은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온다.
밥을 먹지 않은 척하는 건지 먹고 또 먹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시간에 집에 와서 밥을 먹는다.
주말이 되면 시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어디 가야 하는지 지정해 준다.
예를 들면, 이번 주는 어린이 성당.
다음 주는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다음 주는 어린이 박물관.
나는 시어머니의 아바타처럼 조종하는대로 시키는대로 움직인다.
그래야 별탈이 없다.
법정 스님이었는지 혜민스님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꽤 유명한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자기 주관대로 살 수 없을 때, 가장 불행을 느낀다.
이 말은 정녕 나를 위한 문장이다.
미쳐버릴 것 같다 숨이 막혀온다.
그리고 결혼 후 첫 명절이 다가왔다.
남편은 업무 특성상 명절 연휴가 수, 목, 금이라고 하면 딱 수, 목, 금요일에 쉴 수가 없다.
설날이 목요일이면 화, 수, 목을 쉬거나 혹은 목, 금, 토를 쉬는 식이다.
명절 연휴가 시작됐지만 남편은 출근을 했다.
시어머니와 딸아이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시아버지는 도시가 답답하다며 외곽의 전원주택에서 혼자 지내신다.
명절이 되면 우리 모두 시아버지 댁으로 출동해야 하는데, 문제는 여기부터다.
나는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저녁,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와 딸아이와 함께 시아버지 댁으로 간다.
배가 너무 불러 맨바닥에서 자면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
시아버지 댁에 가면 서재의 귀퉁이 맨바닥에서 자야 한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 왜 남편도 없이 만삭 며느리가 먼저 시댁에 내려가야 하지.
불만을 표할 수 없다.
내가 불만을 표하면 집구석은 난리가 난다.
인성교육도 못 받은 게 시집왔다며, 두 어른이 함께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숨통이 막혀도 일단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내려가, 명절 준비를 돕는다. 식구도 없는데 음식을 바리바리 한다.
딸아이가 잡채를 좋아한다고 잡채를 해오라 셔서
난생처음 인터넷을 찾아가며 잡채를 하고 동태전을 부쳤다.
명절 연휴 전날, 하루종일 명절음식을 하고 시아버지의 조그만 서재 귀퉁이에서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붙잡고 겨우 눈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남편 없는 시댁에서 아이와 놀아주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준비를 도우며 여느 집 며느리처럼 부엌에서 나오질 못한다. 안그래도 부아가 치미는 게 딸아이가 한마디 거든다.
왜 우리 집은 왜 에미들만 일해?
그러게나 말이야.
정말 할머니 말씀처럼 똑똑하구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남편이 왔다.
그리고 그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남편과 둘이 누워 이틀간의 힘듦 좀 토로해 보려 하면, 딸아이가 들어와 가운데 파고든다.
허리가 아파죽겠는데, 좁아서 내 몸 하나 누이기도 힘든데. 이 상황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그게 제일 문제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
다음 날 명절을 쇠기 위해 다시 큰아버님 댁으로 향한다. 차가 막힐 것 같다며 새벽 6시부터 집을 나선다.
큰 아버님 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성당에 가서 미사도 드리고 아침도 먹고 설거지도 했다.
큰아버님 댁의 따님들은 벌써 시댁을 갔다가 오전 11시가 되자 친정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나는 우리 집에 언제 갈 수 있는 건데?
큰아버님 댁의 딸들이 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시어머니는 내게 친정행을 허락했다.
갔다가 저녁에 다시 내려오너라.
뭐라고요?
어딜 내려오라는 거죠?
시댁에 가서 이틀을 잤고 큰댁에 와서 제사도 지냈고 연휴는 내일까진데, 오늘 친정에 갔다가 우리 신혼집에 가서 고생한 팔다리도 주무르며 남편하고 둘만 시간을 보내는 건 지구가 두 쪽이나도 안될 일인가요?
와 나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런데 더 돌아버리겠는 건 남편의 태도였다.
그래.
시어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치자.
니가 말려야지.
엄마, 친정 갔다가 우린 집에 가서 쉴게.
얘 만삭인데 이틀 잤으면 됐지 뭘 또 내려가.
우린 집에 갈게. 어차피 주말에 또 보잖아.
이 정도 말을 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남편이라는 작자는 입을 꼭 다물고
엄청 순하고 착한 사람인 양 메서드 연기를 펼치고 있다. 안 그래도 천불이 나 죽을 지경인데, 남편의
사촌 여동생이 말한다.
언니는 참 좋겠어요~오빠처럼 완벽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서.
오~그래? 그럼 니가 한번 살아보세요 : )
님께선 완벽이란 단어의 뜻을 잘 모르는듯하니.
열불이 난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얌전한 새아기 코스프레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졌다.
네~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임신 중에 딸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딸기 좀 사달라니까 비싸다고 안 사주더라고요 호호호.
돈을 허투루 쓰질 않아요. 호호호
그러니 딸아이도 아빠를 비난하는 새엄마가 얄미웠나 보다.
딸 : 내가 아빠 집에서 봤는데 냉장고에 귤이랑 사과랑 한가득 있던데?
사촌동생 : 귤이랑 사과는 있지만 딸기가 없잖아 딸기가.
이 대화가 화근이 되어 시어머니가 나를 뒷방으로 부른다.
다른 사람 앞에 선 남편 험담하지 말아라.
죄송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댁으로 내려갔을 때 시아버지는
딸기쨈용 자잘한 딸기 두 박스를 내 앞에 내어놓으며 실컷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커다랗고 신선한 딸기가 아닌 무르기 직전의 메추리알만한 크기의 쨈용 딸기...
여하튼, 친정으로 가는 길에 나는 이 화를 참지 못하고 운전하는 남편에게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분이 풀릴 때까지 남편 등짝을 후려쳤다.
그렇다.
폭력은 내가 먼저 행사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내가 먼저 선빵을 날렸다.
이 행위는 더할 나위 없이 내가 잘못한 일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때려서는 안됐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왜 다시 가야 하는데? 이틀 잤잖아.
왜 또 시댁에 가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 죽겠다고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오빠가 못 간다고 했어야지.
바보야?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건데?
어머닌 도대체 왜 저러시는거야? 진짜 왜 저러는거야 도대체!!!!!!!!!!!
남편은 갑자기 길모퉁이에 차를 댔다.
그리고 185cm에 85kg이 나가는 건장한 체격의 남편이 자기 얼굴만한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뺨을 몇 대 후려친다.
나는 너무 놀라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쳤다.
뱃속에 8개월 된 남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나를 치는 손바닥과 함께 그의 입에서는 거침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잠시 뒤 분이 풀렸는지 나를 향해 날아들던 손놀림은 멈춰졌고 단호하게 한마디를 던진다.
집에 가서 티 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런데 집에 가서 티를 내지 않기엔 아랫입술이 터졌다. 피가 나고 빨갛게 부어 올랐다.
그래도 티 내면 더 맞을 수도 있으니 티 내지 않기로 결심하고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집 초인종을 누른다.
울지 않을 거야.
울지 않을 거야.
집에 들어서니 오빠 부부가 새언니 친정에 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버선발로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한마디 하신다.
아이고, 우리 배불뚝이 왔어.
그 말에 가까스로 참고 있던 눈물이 장마 속 넘치는 댐물처럼 눈으로 목구멍으로 쏟아져 흐른다.
아버지. 꺼이꺼이
왜 그러냐며 당황하는 가족들에게
집에 오니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며 멈추지 않는 눈물과 콧물을 연신 손으로 훔쳐낸다.
남편은 이 당황스러운 순간에 연기력이 떨어지나 보다. 표정관리가 안 되더니 나를 끌고 작은방에 가서 몰래 말한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똑바로 안해?
무섭다. 두렵다.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내가 선택한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란 말인가.
입술이 왜 터졌냐고 묻는 부모님에게
요즘 만삭이라 허리가 아파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입술이 터졌다는 거짓말만 늘어놓았다.
다행히 부모님은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다시 시댁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나의 말에
평소 직언을 잘하시는 엄마가 남편에게 묻는다.
이틀을 시댁에서 보냈다며, 또 왜가야 하나?
뭐 가서 해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요. 안 가도 돼요. 안 갈 겁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친정에서 저녁만 먹고
우리는 다시 시아버지의 시골집으로 내려간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남편은 차를 세우고
조그만 마트로 가서 평소 내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 몇 개를 사 왔다.
이거 마셔.
오호라. 너희 집에 가서 내가 너한테, 임산부인 내가 너한테. 다른 남자의 아이도 아닌 네 아이를 가진 아내를(물론 내가 먼저 등짝을 후려치긴 했지만) 귓방맹이를 후려갈겨 입술이 터진 걸 들키기라도 할까 봐 미리 약 치는 거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닌 서른네 살 먹은 마누라에게 딸기 우유를 사주고 화를 풀어주려는 너도 정말 유치하다.
여하튼 시댁으로 들어서자 시어머니만이 우리를 맞이했다.
너 울었니?
아 아니에요. 산후조리 문제로 친정에서 조금 서운한 일이 있어서요.
괜히 친정을 판다.
결혼하고 첫 명절.
임신 8개월에 나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맞았다.
그리고 지옥의 문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