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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Jun 02. 2022

#10. 나는 엄마다.

태교를 제대로 못한 에미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들은 다행히 아주 건강했다.

머리통도 뺀드롬한 것이 손으로 빚어놓은 듯했고

아이 아빠와 나의 장점만 모아놓아 참 잘생기고 반듯한 신생아였다.

팔불출 엄마라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이 고백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 )


나는 산부인과에 도착한지 3시간 만에

자연분만 굴욕 3종 세트라고 불리는

그 흔한 무통주사도 맞지 못하고,

관장도 제모도 하지 못한 채로 출산을 했다.

출산을 하다 큰일을 봤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힘을 잘못 줬는지 얼굴에 실핏줄이 모두 터져 그야말로 만신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예쁜 아들을 출산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출산을 하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고 말하는

뭇사람들의 진부한 표현을 나도 써볼 수밖에 없다.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 )

더불어 나의 출산을 통해, 불안했던 내 신혼생활도

좀 더 편해지고 행복해지길.

무엇보다 평범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내가 출산을 하자마자 남편은 우리 집과 시댁에

나의 출산 사실을 알렸다.

우리 아버지는 당시 한 중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근무 중이셔서 바로 나에게 오실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학교에서 산부인과까지는

약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시부모님은 지하철로 한 정거장의 거리에 사셨고

퇴직하신 상태라 친정 부모님보다는 시간이 자유로우셨다.

하지만 바로 손주를 보러 오시지는 않으셨다.

남편은 내가 출산을 하자 곧장 출근을 했다.

자연분만을 하니 숨고를 새도 없이 바로 입원실로 미역국을 올려준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지만 식욕은 없다.


오후 3시쯤 되어서야 시부모님이 입원실로 찾아왔다. 5분쯤 지나자 우리 부모님도 도착하셨다.

이 어색한 공기의 무게란.

출산때보다 더 견디기 힘든 어색함이었다.

어색한 기운을 뚫고 친정 부모님이 계신 상황에서

이제 막 출산한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말한다.


아기 봤다. 너 안 닮아서 안 넓적하더라.

너때문에 니 아들한테도 정이 안간다.


기막혀.

그래, 나는 그렇다 치고.

늘 그런 식으로 날 헐뜯고 무시했으니

나는 그렇다 쳐도 말이야.

우리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는 어머님은 참도 인성교육이 잘 되신 분이시군요.

네. 제 아들은 저와 다르게 얼굴이 조막만 합니다.

신생아 얼굴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가끔 지인들에게 이때 얘기를 하면

친구들은 내가 과장되게, 부풀려서 말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단언컨대 내 글은 시간의 뒤죽박죽은 조금 있을지언정, 단 한마디도 부풀려지거나 과장되게 적은 것이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다.


아버지를 보자 나는 참았던 눈물과 서러움이 밀려왔다. 왜 부모님 말을 안 들었을까.

도대체 잘난 것도 쥐뿔 없는 나는 뭘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며 고집을 꺾지 않고 내 말이 맞다고 우겨댔을까.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내 뜻대로 우겨 한 결혼의 현실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현. 실. 지. 옥.


자연분만을 한 나는 3일 만에 퇴원을 하고 산부인과와 붙어있는 조리원으로 짐을 옮겼다.

보통은 병원에서 조리원으로 옮길 때 남편이든 시댁 식구든 친정식구든 한 명쯤은 산모를 도와 짐을 옮기는 것을 돕는다.

나는 올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연차를 낼 수 없다고 했고

아버지도 출근하셔야 했으며

시어머니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어찌 됐든 병원에 오지는 않았다.


혼자 신생아를 안은 채 2주치의 짐을 옮겨야 하는 것이 못내 걱정돼 전전긍긍하는데, 친한 동생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 오는 중이라며 나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얼마나 고맙던지.

나는 아무래도 주변에 인덕은 있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조리원 생활을 하는 사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간다.

하아... 또 연락 안 하면 집구석이 뒤집어지겠지.

남편에게 말했다.

어린이날에 꼭 딸아이와 놀아주고

어버이날에 시부모님 모시고 나가 밥이라도 먹으라고.

우리 부모님의 어버이날은 챙길 여력도 챙길 마음도 없는 듯 보였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모유 수유 호출로 비몽사몽이면서도

나는 이틀에 한 번은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고

어린이날, 어버이날 역시 잊지 않고 챙기며

최소한의 며느리 도리를 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우리 아들에게 황달기가 보인다며 모유 수유를 해서는 안 되고 아이에게 약을 먹여야 한다는 조리원의 연락을 받았다.

그 조막만 한 아기의 침대에 '수유 중지'라는 푯말이 붙어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일도, 막 출산을 마친 새내기 엄마에겐 가슴 저미는 고통이다.


남편이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남편도 내 곁에서 내 아들을 함께 지켜보면 좋겠는데, 하필이면 며느리가 조리원에 들어가 있는 이때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가꾸는 조그만 텃밭의 고추를 따야 한다며 아들에게 손녀딸을 맡기고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분명 저녁시간 전까지는 오시겠다고 약속했지만

시어머니는 9시가 다 되는 시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 역시 막 태어난 신생아에게 황달이 보인다고 하니 아기가 걱정돼 안절부절못하다가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딸아이를 재우고 뒤늦게 산후조리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막 남편이 도착하고 아기를 보고 있는데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온다.


(엄청나게 소리 지르며)

네 남편 거깄나. 당장 네 남편 돌려보내 그레이.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사건의 전말은 시어머니가 곧 오실 거라 생각한 남편이 초등학교 1학년짜리 딸을 집에 재우고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의 산후조리원으로 왔는데, 잠에서 깬 딸아이가 집안에 아무도 없으니 아파트 복도로 나가 대성통곡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 우는 소릴 들은 옆집 할머니가 시어머니에게 사실을 알리며 시어머니는 분노에 차서 내게 호통을 치게 되었다.

시어머니의 불호령에 남편은 다시 시어머니의 집으로 잽싸게 돌아갔다.


조리원 생활이 시작된 지 열흘 차,

친정 부모님이 사위가 고생한다며 밥을 사주시겠다고 조리원으로 오고 계셨다.

지난번 고추 따는 날 벌어진 일로 한바탕 남편과 부부 싸움을 하고 남편은 장인 장모와의 약속은 나 몰라라,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

애꿎은 나의 부모님은 사위에게 바람맞은 채,

조리원 앞 꽈배기 집에서 꽈배기 몇 개로 점심을 때우신다.

이런 식으로 내 부모님은 사위에게 종종 바람을 맞곤 했다.


조리원 퇴소 후에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뜨거운 여름날 폭염과 함께 허공중으로 사라진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시어머니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미역국조차 끓여준 일이 없다.

주변 친구들이 SNS로 출산 후 시부모님에게 꽃바구니를 받았다. 소꼬리를 받았다. 편지를 받았다 자랑을 해대는데 나는 꽃바구니는커녕 미역국 한 사발도 얻어먹지 못했다.


남편은 여전히 시어머니와 딸아이가 살고 있는 곳으로 퇴근을 했다. 남편이 집에 와서 아기를 봐줘야 나도 먹고 씻고 싸고   있는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생활패턴에는 변함이 없다.


출산 후 50일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시어머니는 내가 다시 딸아이의 학교 뒷바라지를 시작하길 바라셨다.

학교, 학원, 성당 픽업, 녹색 어머니는 물론.

아이 학교 엄마들의 브런치 모임이나 저녁 모임에도

딸아이를 데리고 참석하길 바랐다.


참고로 나는 모유 수유를 1년 넘게 했으며,

내 아들은 내 모유를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잠이 든다.

내가 부재 중일 때는 미리 짜놓은 모유로 밥을 먹이거나 혹은 가끔 분유를 먹여서 아이 식사를 챙긴다 쳐도 시간 맞춰 모유를 짜내지 않으면  젖은 하루 종일 퉁퉁 불어 건드리기만 해도 가슴에 이는 통증이 출산하는 고통만큼 심했고   젖을 먹이지 않으면 젖이 줄줄 새서 옷을 흠뻑 적시는 상황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는 계속해서 나에게 새엄마 노릇을 하라고 다그쳤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

딸아이 학교 엄마들 중 친한 몇몇이 1박2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갯벌체험을 간다고 했다.

모두가 참석하는 학교 행사가 아니라, 친한 지인들끼리 모여가는 사적 모임이었다.

어디서 시어머니가  정보를 입수하고는 무조건 딸아이를 데리고  모임에 참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정말, 정말이지 가고 싶지 않았다.

친한 여편네라고는 단 한 명도 없고, 젖은 줄기차게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우리 젖먹이 아들은 고작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몇 시간짜리 식사 모임도 아니고 1박 2일.

하아...

진짜 어머니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머니 눈에는 어머니 손녀딸만 보이고

엄마 젖만 빨아대며 엄마만 의지하는 손자는 안 보이시나요?


출산 전 나의 소심한 반항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익히 알고 있던 나였기에, 더 이상 반항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여행에는 열명 남짓의 엄마와 아이들이 참석했다. 그 엄마들 중 내 나이가 가장 어리다.

딸아이는 교우관계가 좋지 못해서 아이들에게 소리를 치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싸우는 일이 잦았다.

여행을 가서 나는 다른 아이들의 엄마들에게 허리를 굽혀 사과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는 일을 1박 2일 동안 쉬지 않고 해야만 했다.

저녁시간이 되어 삼겹살 파티가 열리고 엄마들과 아이들은 각자 즐겁게 저녁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몇 엄마들은 약간의 술도 나눠 마셨다.

그러고는 각자 방에서 잠이 든다.

아무도 삼겹살 먹은 기름 그릇을 닦지 않는다.

하아...

이것도 내 차지로군.

나이가 제일 어린 막내 엄마는 자정이 다 되는 시간까지 설거지를 하다  방 한쪽 귀퉁이에서 아이 가방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아무리 짜내도 계속 생기는 젖때문에 어떻게 누워도 가슴이 아프다.


끔찍했던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시아버지 생신 상을 준비 못 했으니 나가서 외식을 하자신다.

외식하는 동안 나는 맘편히 수저를 들 새도 없이,

옆으로 돌아 앉아 내 아들을 안고 굶주린 아들에게 젖을 먹인다.

배가 고팠는지 아기가 힘차게 젖을 빨아낸다.

아기가 젖을 쭉쭉 빨아주니 지난밤 젖을 짜내도 짜내도 젖이 넘쳐 통증으로 가득했던 가슴이 조금 편안해졌다.


내가 살았던 그 동네는 학군이 매우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초, 중, 고등학교까지.

한 동네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미 딸아이의 학교 엄마들은 유치원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아이들끼리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친분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딸아이는 한동안 할머니와 등하교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딸아이의 엄마라고 나타나서 아이와 함께 다니니,

눈치 빠른 엄마들은 내가 친엄마가 아니란 걸 알고도 남을 상황이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명령이 있었다.

새엄마라는 것을 절대 밝히지 말 것.


어느 날 한 엄마가 나에게 작심한 듯 묻는다.

아니 어쩜 이렇게 oo(딸)는 엄마를 안 닮았어요?

oo(딸)는 아빠 닮았어요.

아닌데~ oo(딸)이 아빠 내가 줄넘기 학원에서 봤는데 하나도 안 닮았던데요?

...

oo(딸)이는 동생하고도(아들) 하나도 안닮았네.

...

못된 여편네, 다 알면서 저렇게 질문을 하다니

참 뻔뻔도 하다.

차라리 새엄마죠?라고 묻지 왜.


참고 참고 참다가, 시어머니께 일러바치면

시어머니는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서 주둔하다 함부로 입 놀린 여편네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침을 가한다.

이럴 땐 시어머니가 참으로 든든했다.

못된 여편네들 같으니라고.


딸아이를 픽업할 때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씩 시간이 뜰 때가 있다.

그럼 아이를 데리고 떡볶이를 먹으러 가거나,

근처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곤 했다.


사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도 잘한 것은 없다.

나는 새엄마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 나는 아직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고, 그냥 부담스러운 존재라 느꼈다.

나는 나름대로 아이에게 잘 해주고 있다 생각하는데도 시어머니가 자꾸 아이를 위해 나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요구하면 애틋해지려는 마음도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그냥 좀 냅두면, 내가 알아서 딸을 챙길텐데.

그리고 참 미안했지만 딸아이가 엄마를 많이 닮아

볼 때마다 전처가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다.

가끔 픽업길에 딸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묻는다.


엄마, 할머니가 그러는데 아빠가 엄마 만날 때 나 없다고 속이고 만났어?

라든가

엄마, 할머니가 할머니 할아버지 죽으면 그 돈 다 나 준대. 그럼 내가 엄마도 쪼끔 줄게, 나 참 착한 딸이지?

라든가

할머니가 그러는데 친엄마는 내가 싫어서 버리고 도망갔다가 어디선가 죽어버렸대. 계단에서 굴러서 다리가 부러져 죽어버렸대.


이런 말을 표정에 변화 없이 내뱉는 딸을 보면

나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아프고 아이가 짠했다.

이 아이의 잘못은 무엇이란 말인가.

손녀딸을 그렇게 사랑한다던 할머니는

왜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까.

딸아이가 그 조그만 가슴에 간직했을 상처를 생각하니 또 코 끝이 찡해진다.


그냥 내가 데려와서 같이 살까.

남편한테 얘기하면,

어차피 친엄마가 데려가게 돼있으니 넌 우리 아들이나 잘 키워.

남편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한다.


어쩌면 나는 정말 시어머니의 말처럼 엄마 자격이 없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날 낳아준 어머니한테 받지 못한 사랑을

내 아이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꼭 아이를 낳고 싶었다.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

삶이 너무나 벅차고 부담스럽다.

산후우울증일까.

오직 혼자 아들을 케어하고, 시어머니를 도와 딸아이를 돌본다. 아들을 돌보고 딸아이를 케어하는데도 남편은 관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부담스럽고 버겁다.

아들이 잠들고 나면 거실로 나와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한강을 바라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을까.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흘러가는 저 까만 강물이 괜스레 서글프다.


오늘 밤도 여전히 나와 내 아들.

단둘만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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