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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Jun 14. 2022

#12. 고추장아찌의 명인이 되다

30대 평범한 주부들이여,

고추 장아찌를 담가본 일이 있는가.

장아찌를 너무 좋아해서 장아찌가 없으면 

밥이 넘어가질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돌도 안된 아기가 있는 상황에서 고추 장아찌를 담글 생각은 아마 꿈에도 하지 못하리라.


거듭 얘기했듯, 시아버지는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퇴직  교외의 전원주택 비스름한 집을 짓고 자그마한 텃밭을 일구며 혼자 살고 계셨다.

텃밭의 용도는 자급자족을 위함인데,  자급자족 덕에 아이 둘을 케어하는 새내기 엄마는 처치 곤란의 채소들로 팔자에 없는 신데렐라 노릇을 하게  터였다.

어쩌면 팔자에 있었는지도 모르지.


겨울이 되면 시댁에서는 무와 배추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주신다.

이거 주지 마세요, 다 못 먹어요!

라는 말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힘든게 번 돈으로 다른 것을 사 먹는 낭비하는 며느리가 되어 버리니까.

돈도 못버는 주제에.


덕분에 나는 무와 배추로 만들 수 있는 음식 가짓 수가 꽤나 많아지게 되었다.

무전, 무 조림, 뭇국, 무생채, 무나물 네버엔딩 무 반찬들.

배추전, 배추 된장국, 겉절이, 배추 된장무침, 배추쌈 네버엔딩 배추 반찬들.

여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고추였다.

 포대로   가마니에 해당하는 양의 고추를 시어머니가 내게 주셨다.


- 네 남편이 고추장아찌 좋아하니 장아찌 담가라.

시아버지 꺼까지 넉넉하게 담가봐라.


넉넉하게 담그기엔 고추의 양이 대단했다.

1년 365일 동안 고추장아찌 만 먹을 요량인가?

하아...

괴롭히는 재주가 남다른 분이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장아찌 레시피는 간장, , 설탕, 식초를 팔팔 끓여 장아찌 재료에 붓는다. 며칠 지나  달인 간장물을 다시 쏟아내  팔팔 끓여 다시 붓는다.

두세 차례 반복해 한참을 묵혀두면 장아찌가 완성된다.

근데, 이건 조금 담굴  얘기고  포대자루에 있는 고추를 모두 장아찌로 담그려면 나는  번의 간장물을 끓여야 하냔 말이다.

장아찌 장사를  것도 아닌데, 유리병 수개에  고추를 감당할 간장과 식초와 설탕을 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사 먹는 게 낫지.


갑자기 또 눈물이 쏟아진다.

이제  기기 시작하는 아들은 잠시도 눈을   없게 여기저기 기어 다니며 사고를 친다.

잠깐 눈을 떼고 화장실을 가면 물티슈를 죄다 뽑아 놓고 잠깐 배가 고파 부엌에 서서 국에  밥을 마시다 보면 쌀독으로 들어가 쌀을 죄다 엎어놓기 일쑤인데, 도대체 무슨 수로  아기를 돌보며  푸대의 고추 장아찌를 담근단 말인가.

그래도 해야지.

안 한다고 하거나 고추가 썩어나가면 또 한바탕 욕을 처먹어야 하니

어떻게든 고추 장아찌를 담가내고 말 테다!

시어머니 미션 임파서블!!!!!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유리병과 장아찌 재료를 사러 가까운 대형마트에 갔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약간 의문이 들긴 한다.

왜 그 때의 나는 장아찌 재료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할 생각을 안 했지?

지금의 내가 수천 개의 고추들을 장아찌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면 나는 대형마트몰에서 분명 인터넷으로 재료들을 구매했을거다.

그 당시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학대로 아무래도 머리가 어떻게 됐던 모양이다.


사실 유모차의 용도는 아들을 태우는 목적은 아니었다. 재료를 싣고 와야 하니까, 바퀴 달린 이동 수단이 필요했던 거지.

10킬로가 가까운 아들을 아기 띠로 업고 유모차에 간장, 식초, 유리병 등을 싣고 있는데 뜬금없이 또

눈물이 쏟아진다.

진짜 나 왜 이러고 사는 거니.

아니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니.

산후 우울증인지, 그냥 우울증인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물이 났다.

숨통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사람들이 수군대며 쳐다보는 쪽팔림 따위는

이제 나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간장을 양 손에 들고 울며 서있는데 마트 직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에게 온다.


-아기 엄마 무슨 일이에요? 왜 울어요?

-시어머니가 고추를  포대 주셨어요.

고추 장아찌를 담그라는데 이거 언제 끓여서 붓고  끓이고. 애기는 어리고 날은 덥고 가슴이 답답해서 눈물이 나요.

-아이고, 요즘 세상에 젊은 며느리한테 누가 이런  시켜. 울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요. 내가 간장  끓이고 담그는 방법을 갈쳐줄게.

시골에서는 간장 안 끓이고 이렇게 담가요!


올레!!! 심봤다!!!

가족보다 남이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을 결혼하고 절실히 깨닫는다.

아주머니가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간장을 끓이지 않고 장아찌를 담굴 거다.

아이는 뒤에 엎고 유모차에 간장과 설탕과 식초를 수십  싣고서 끙끙대며 집으로 돌아와 고추를 다듬기 시작한다.

아들을 내려놓으면 고추를 만지고 간장을 쏟고 난리 블루스가  테니 허리가 아프지만 아들은 엎고 고추를 다듬는다.

고추를 씻고 물기를 말리는 데만 두 시간이 넘었다.

이제 바늘로 고추에 구멍을 낼 차례다.

비법양념을 만들고 만들어 장아찌를 담근다.

... 끝이 보여. 고추지옥의 !!!


반나절이 넘어서야 장아찌 만들기는 끝이 났고,

순하지만 역동적인 내 아들은 손가락을 빨며 내 넓은 등판에서 잠이 들었다.

잠든 아기를 보면  짠한 마음이 든다.


-미안해  아들. 엄마 잘못 만나 애꿎은  아들이 고생이네.


다행히 고추 장아찌는 성공적이었다.

아삭한 것이 적당히 새콤달콤해서 파는 장아찌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마트 아주머니.

진짜 복받으실 거예요.


내가 담근 다섯통이 넘는 고추 장아찌는 일부는 시아버지 집으로, 일부는 시어머니 집으로,

 일부는 시어머니와 나의 지인들에게 보내졌다.


난 지금도 고깃집에 가면 밑반찬으로 나오는 고추 장아찌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고추뿐만 아니라 간장으로 담근 장아찌는 입에 대기도 싫다. 나는 그렇게 고추 장아찌의 명인이 되어,

2년도  채운 결혼생활 동안    이상의 장아찌를 담갔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맞는 나의 생일.

나는 여름의 막바지 8월에 태어났다.

 생일을 맞아 친정 부모님과 오빠 내외가 점심을 사주시겠다며 우리 신혼집에 방문하셨다.

그리고  사실을 시어머니께도 말씀드렸다.

부모님과 오빠 내외는 우리 집에서 걸어 5 걸리는 마트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친정식구들이 도착한 건 12시 즈음.

오랜만에 반가운 가족들과 즐겁게 점심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때마침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헌데 남편은 우리 식구들 눈치가 보였는지 자기 어머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빨리 받아! 니가 안 받으면 나한테 전화할 거라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자 나에게 전화한 시어머니는


- 점심 먹었나? 점심 먹었으면 됐다. 이제 네 남편 우리 집으로 보내라.

 친구들이랑 12일로 여행 가기로 했으니  남편더러 손녀딸 돌보라고 해라.

- 오빠 빨리 어머니 집에 가. 어머니 친구분들이랑 여행 가셔야 한다고 와서

땡땡이() 돌보래.


기가 막힌 표정으로 부모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느껴지지만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진짜 쌍욕이 절로 나온다.

 이때?   생일에?

 생일을 맞아 본인 친구들과 12 여행?

차암나. 괴롭히는 방법도 참 신선하네.

시어머니는 분명 학창시절에 일진이었을꺼야.

이렇게 사람 괴롭히는 재주가 남다르니까.

며느리가 처음으로  집에 시집와서 맞는 첫번째 생일에 생일 축하한다 말은 고사하고, 용돈을 넣은  봉투따위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꼭 이날, 이때 모처럼 친정식구들이 방문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먹었으면 됐으니 아들 도로 보내라고?

처음엔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보단 낫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둘이 똑같으니 같이 사는거다.

시아버지는 며느리 생일에 문자한통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내 생일날 남편은 어머니 집으로 가서 딸아이와 영화도 보고 외식도 했다며 메시지를 보낸다.

점심을 먹고 차 한잔 마시며 잠깐의 담소를 즐기고

부모님과 오빠 부부도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내 생일 역시 여느 날처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아름다운 신혼집에서

아들과 둘이 그렇게 조금은 쓸쓸히 잠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앞서 적었듯  아들은 백일이  지났을  그놈의 김장 때문에 새벽에 시댁에 내려갔다가 폐렴에 걸려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었고,

그 이후 감기에 걸리면 남들보다 심하게, 오래 감기를 앓았다.

어느 날 아들이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고 기침을 해댄다.

하아... 또 감기에 걸렸구나

부족한 어미는 아들이 아플 때마다 죄인이 된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는데, 아들이 열이 나는데

헐. 나도 열이 난다.

40도.


, 아들과 엄마가 모두 고열에 시달리며 몸살에 걸렸을  이  사람을 돌봐야 하는 것은 누구일까?

유치원 아이들도 맞출 수 있는 상식이겠지만

이 집에서의 상식은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

시어머니는 나와 당신의 손주가   아픈  알면서도 굳이 아들을 집으로 소환했다.

이유는 시아버지 집의 나무가 시야를 가리니 하루속히 베어내야 한다는 것.

이제는 싸울 기운도 없다.

아니 싸우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집구석과 그 말도 통하지 않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남편과 다투며 소모할

눈곱만큼의 에너지도 나에겐 남아있지 않다.


아들을 돌봐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아프다.

아파도 약을 먹을 수가 없다. 아들에게 모유를 먹여야 하니까.

결혼 후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날이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다.

내 몸은 부숴없어져도 아들은 돌봐야 한다.

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약도 챙겨 먹인다.

나도 밥을   떠야 하는데, 정말이지 팔에 힘이 없다. 겨우겨우 하루를 버텨내고 아들을 재우고서야

거실 소파에 나와 가로등으로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본다.


자정이 넘었지만 남편은 올 생각이 없다.

차라리 오지 마라.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자리에 좀 누우려는데

시어머니 전화가 온다. 공포스러워.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  남편 지금 보냈다.

  저녁  먹였으니 밥해 먹여라.


내가 아프다는데, 열이 나서 온몸이 불덩어리라는데

시어머니라는 작자는 제 새끼 밥 챙겨먹이라는 전화를 내게 한다.

내가 당신 집 종살이를 했어도 이것보단 더 나은 대우를 받았을 겁니다.

진짜 엿같네.

하지만 이것이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인가.

아니면 나는 시부모에게 대적할  없는 돈없는 겁쟁이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남편이 처먹고 싶다고 한 오일 파스타를 만든다.

그리고 가슴속 깊이 기도를 한다.


하느님, 부디 저를 악에서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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