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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Jun 07. 2022

#11. 웰컴 투 레알 시월드

비슷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결혼한 지 1년, 출산한 지 반년이 넘었지만

특별히 나의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시부모님은 나에게 새엄마 노릇에만 충실하길 바라셨고 남편은 너만 참으면 자기 부모의 돈이  우리 것이 되니 그저 참고  참길 바라며

툭하면 시답지 않은 거짓말로 사람의 혈압을 높이곤 고, 가끔은 짠하고 때로는 버거운 딸아이의 교우관계는 도대체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였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은 아빠도 없이 오로지 엄마와 함께 지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밝게  자라던 터였다.


가끔씩 시부모의 간섭에 진절머리가 나고, 남편의  같지 않은 거짓말에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면, 남편과 된통 한바탕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그러면 여지없이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어디서 들었는지(어디서겠는가. 시부모에게 전달할 입은 오로지 하나뿐인걸)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시부모님은 귀신같이  소식을 듣고 우리 집으로 찾아와  그렇듯 인성교육  받은 , 주제도 모르는 ,

 모랬더라. 엄마 자격도 없는 몸뚱이 함부로 굴린 ,

 맞다!

나를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 취급을 하며 한바탕 폭언을 쏟아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매일이 그렇다 보니 나름대로 폭언을 들을 때 요령도 생겼다.

적당히 듣고 있다가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마법의 문장을 외치면 두 시간 내로 꾸중이 끝난다.

그렇지 않다간 하루를 꼬박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당시 내 나이 서른다섯,

35년을 살면서 나는 그렇게 꾸중을 듣고 싫은 소릴 들어본 일이 없다.

앞서 말했듯.

나는 남이 싫다는 것, 남이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질 않는다.

때문에 살면서 싫은 소리 들을 일은 거의 없었는데

결혼하고 나선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시부모님에게 온갖 욕을 다 먹는다.


욕을 많이 먹어 그런지, 밥을 많이 먹어 그런지

처녀 적 날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몸이 투실투실 퉁퉁이가 되었다.

결혼 전엔 짧은 치마에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곧잘 입었는데 결혼하고 아이들만 돌보며 주부로 지내는 탓에 관리를 소홀히 하기도 했고 따로 생활비를 받지 않고 지내다 보니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아 나를 꾸미는데 돈을 쓰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돈도 돈이지만 나에게 시간을 투자할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출산하면 퇴근하고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동안 헬스장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약속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약속을 지키라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으면 남편은 곧잘 기억상실증 작전을 펼치곤 했다. 이건 완전 사기 결혼이다.


헬스장을  보내줄 거면 살쪘다고 구박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남편은 툭하면

-네가 이렇게 살이 찔 줄 알았으면, 너랑 결혼하지도 않았어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멘트를 날렸다.

6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명확하게 이 말을 기억한다.

내 퉁퉁한 몸에 대한 질책은 남편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남편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네가 니 남편보다 더 늙어 보인다. 파마라도 해라.

어머니... 파마할 돈을 주시면서 말씀을 하세요.


시아버지는 좀 다를까?

웬걸,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 여자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 조금 먹고 많이 움직여봐라 왜 살이 찌겠니.

그리고 내 아들이 너에게 서운하게 한다고 하던데, 누가 잡은 고기에 밥을 준다더냐?


들었던 걸 적는데도 참 거짓말 같은 멘트들이다.

기막혀.


아! 우리 딸아이!!!

딸아이도 이 집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나 보다.

- 엄마! 하얀색 바지 입고 오지 , 허벅지 두꺼워보여. 그리고 학교   화장도  하고 !


이건 그나마 상처가 덜된다.

아이가 한 말이니까 특별히 가슴에 담아두려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약과지 뭐 : )


지금도 그 집에서는 내 아들에게 나를

뚱뚱한 엄마라고 지칭하고 있다고 한다.

대단하다 정말.


결혼생활 동안 별별일이 다 일어났다.

아들을 출산했을 때처럼 행복했던 순간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는 참고 견디고, 싫은  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스트레스가 엄청났다는 건 신체적인 변화로도 증명이 됐다.

어느 날 머리를 빗는데 뭔가 이상하다.

어. 뒷머리가 이상해.

뭔가 맨들한 느낌에 뒷머리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보니

원형탈모가 일어났다.

너무 놀라 시어머니께 말씀드렸는데, 시어머니 왈,

- 가발 쓰고 다니면 된다.


허허.

실제로 나의 원형탈모는 2년도 채 안 되는 결혼생활 동안 빈번히 발현되었다.


나는 남편과 결혼했지만, 실제로는 시어머니와 결혼한 느낌이었다.

아이 있는 남자와의 결혼은 그런 것이다.

결혼하자마자 나는 엄마가 된다는 것.


남편은 주말에 하루는 일을 하고 평일에 하루  수가 있었다. 쉬는 날은 나에게 공유하지 않고 보통 전날 통보를 한다. 언제 쉬든 관심은 없다.

남편이 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으므로.


남편의 거짓말은 소개팅 첫날부터 시작해서 이혼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주 커다란 거짓말부터, 소소한 거짓말까지.

끈질기게 거짓말을 해대는 당신의 한결같음에 축배를!!!


이를테면 분명 남편은 출근을 한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리고 퇴근하고는 보통 자기 어머니 집에 무조건 들렀다 오니 집에 오면 10시가 넘는다.

또 자기 집에 갔다 왔나 보다 하고 남편 옷을 정리하고 밥을 차린다.

이건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다.


어느 날 카드 명세서가 집으로 왔다.

나는 처녀시절  카드를 사용하고, 남편이 카드대금을 입금해주는 방식으로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에, 집으로 도착한 카드 명세서는  것이 아니다.

남편만 사용하는 카드다.

판도라의 상자를 조심히 열어본다.


oo해장국 10,000원

xx주유소 24,000원

놀이동산 21,000원


허허.

이건 또 뭐람.

이 인간 분명 회사 간다고 나간 그날들인데,

또 어딜 혼자 다녀온 건가.

아니 혼자 가긴 간 건가?

주유소에서 기름은 왜 24,000원을 넣었지? 경차도 아닌데.


남편이 퇴근하면,  출처를 물을지 어떨지 고민했다. 어차피 물어도 사실대로 말하지도 않을 텐데 이걸 굳이 물어야 하나?


때마침 전화가 울린다.

딸아이의 친구 엄마다.


- 오늘 땡땡이(딸) 아빠랑 어디 좋은 데 갔다면서요? 학원 안 왔던데.

- 아 네. 오늘은 하루 쉬려고요.


나는 딸아이가 학원이 아닌 다른 곳에 간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어머니 땡땡이(딸) 오늘 학원 안 갔다고 전화 왔는데 어디 아파요?

-(더듬거리며) 아니다, 지 방에서 잔다.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뚜뚜뚜뚜

신호는 가지만 받지 않는다.


옳거니.

나 몰래 니 딸이랑 둘이서만 놀이동산 갔구나.

나를 속일 땐 나를 뺀 나머지 가족들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된다.

나 이 집에서 왕따였구나. 헐.


그럼 주유소는 뭐란 말이야?

바이크 탔구나 너.

바이크에 24,000원 기름을 넣었다면 이건 설명이 되지.

남편이 들어오고 저녁을 먹은 뒤 카드 명세서를 식탁에 올려두고 물었다.


- 쉬는 날이었는데 출근한다고 넥타이 매고 나가서 어딜 간 거니?

- 아니야 회사 갔어

-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해. 이 주유소 24,000원은 뭐야?

- 내 차에 기름 넣었어

- 오빠 차 suv잖아, 3만 원도 아니고 24,000원 기름 넣을 일이 있어?

- 24,000원만 넣었어 돈이 없어서.

- 그래? 카드로 계산했는데 돈이 없었다고? 그럼 이 놀이동산에서 찍힌 건 뭐야?

- 엄마가 땡땡이 데리고 놀이동산 간 거야.

- 아. 그래? 근데 왜 어머니가 오빠 카드를 가지고 놀이동산을 가셨을까?

- 가족카드야 회사 가족카드.

- 가족카드? 나는 오빠 가족이 아니야? 가족카드라면 회사에서  두장만 나오는 거라면 상식적으로 어머니가 가지고 계실게 아니라 아내인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아니야?

- 어머니한테만 드릴 수 있는 가족카드야.


이쯤 되면 벽하고 얘기하거나, 아직   하는  살배기  아들하고 얘기하는 편이 훨씬  답답할  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런 걸 두고 화병이라고 하는가.

하아.

늘 이런 식이다.

차라리 땡땡이가 외로울 거 같아서 하루 같이 놀러 갔어. 미안해 이해 좀 해줘.

라든가

나 바이크가 취미잖아. 엄마랑 니 사이에서 너무 답답해서 연차 내고 라이딩 좀 했어 미안해.

다음엔 같이 가자!

라든가


어떻게든 아내를 설득하고 이해시킬 생각은 없는 듯하다.

처음부터 신뢰 없이 시작한 우리 사이에  톨도 남아있지 않은 신뢰라는 단어는 이로써 완전히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이제 남편이란 사람이 팥으로 팥빙수를 만든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 같다.


얼마  티브이에서 김승현 배우님의 부모님이 부부갈등을 상담하고자 출연하신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에서 김승현 배우님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 중에,

- 거짓말하는  제일 싫어요. 제일 화나.

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박수를 치며 공감했다.


맞아.

어머니랑 내 사이에서 답답하고 힘들기도 하겠지.

그럼 혼자 쉬는 날 바람 쐬고 싶을 수도 있어.

딸아이랑 둘이 놀이공원?

갈 수 있지. 아이도 아빠가 그리울 수 있고

너도 딸아이가 짠할 수 있으니까.


하루 종일 두 아이랑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나한테 미안해서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면,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

의논하고 노력하면 될 텐데.

카드 명세서를 보고도 끝까지 우겨대는 그 거짓말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내가 얼마나 우습고 만만했으면,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으면 눈앞에서 그렇게 빤히 보이는 새빨간 거짓말을 해대는 거야?

내 아이큐가 한자리로 보이니?


남편의 부모님께 말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내가 분노조절장애라면,

당신들의 아들은 허언증이에요. 아니면 리플리 증후군이던가.

제 인성교육을 운운하기 전에 본인의 아들 인성교육부터 제대로 시키셨어야죠.


하지만 나는 등신이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이 말을 삼킨다.


결혼을 하고 사계절이 돌아 김장철이 되었다.

우리 시댁의 김장은 시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외곽의 전원주택에서 이뤄진다.

삼시세끼 집밥을 해 먹고, 외식을 거의 안 하는 집이라 김장의 양이 보통 집의 두세 배는 된다.

시아버지께서 소소하게 경작하시는 조그만 텃밭의 배추를 뽑아 다듬고 절이고 새벽에 뒤집고

다음 날 속을 만들어 버무려 김장을 마친다.


김장시즌쯤 우리 아들은 7개월 아기였다.

하필 남편은 김장하기 전날 야간근무로 배치되어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차피 김장을 내일 하기로 했다면, 내일 아침 일찍 시부모님 집을 방문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상식은 이런데, 시어머니의 상식은 나와 다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7개월 아기와 함께 대기하다가 남편이 퇴근한 자정이 되면 남편과 함께 오밤중에, 한밤중에 시댁으로 내려오라는 명이었다.

나 환장하겠네.

한겨울에 추운데 애기를 데리고 김장 전날 12시 넘어서 무조건 내려오라고?

이쯤 되면 남편이 한마디 할 법도 하다.

- 엄마. 애기 어리니까 우리 내일 아침 일찍 갈게. 밤에 움직여서 애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

 어차피 김장 내일 한다며.


하지만 남편이란 인간은 입에 꿀을 발랐는지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는  없이 아이를 씻기고 재울 준비를 모두 마친  남편이 오고서야 열두 시가 넘어 시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다.

새벽 한 시 반이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모두가 잠든 시아버지의 집에 도착했다.

역시나 오늘도 좁디좁은 서재방에서 아기와 함께 오들 거리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들 상태가 심상치 않다.

콧물이 입까지 타고 내려오고 기침이 멈추질 않는다.


애들 풀장만 한 거대한 김치통에 속을 버무려 놓고 기계처럼 배추에 속을 넣는다.

허리가 끊어지기 직전, 김장을 마치고 아기가 걱정되어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가까운 소아과로 향했다.

소아과에서는 간단히 진료를 보더니 소견서를 써준다.


- 대학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것 같아요. 폐렴 증세가 보입니다.


이곳에 쌍욕을 쓰고 싶다.

내가  결혼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던 가장  이유는 나에 대한 배려 따위는 고사하더라도 갓난아기인  아들에 대한 배려조차 없었던 것이 나를 미치게 만드는 그것이었다.


7개월 아기다.

링거 바늘을 꽂을 데도 없는 조그마한 아기가  썅놈의 김장 때문에 폐렴에 걸렸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에게 링거 바늘을 꽂게 하고 아기가 움직여서 바늘이 빠지면  거지 같은 상황을  연출해야 하니 양말로 아기의 손을 씌워놓고 홀로 아기를 지킨다.


짠한 내 새끼.

부모 잘못 만나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애리다.


시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서 찾아왔다.

- 병원 보호자 밥은 비싸니 이거 먹어라.

차갑게 식은 흰밥과 먹다 남은 떡이 불어 터진 김치찌개였다.


나 부잣집에 시집온 거 맞지?


- 아기 입원한 건 시아버지께는 말하지 말자. 괜히 걱정하신다.


시아버지를 걱정하듯.

당신의 손녀딸을 걱정하듯.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아들을 걱정하고 배려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일주일이 지나 퇴원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폐렴에 걸렸던 아들은 툭하면 감기에 걸렸고 감기에 걸리면 남들보다 오래, 그리고 심하게 아팠다.


이 때문에 아기를 데리고 딸아이를 픽업 다니는 일이 나는 무서웠다.

아들이 또 아플까, 또 병원에 입원할까 노심초사하던 끝에

(실제로 딸아이를 픽업 가야 하고 시어머니는 연락이 되지 않는데, 아들이 열이 펄펄 끓어 아들을 업고 딸아이를 픽업해서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에 달려간 적도 있다)

나는 아들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픽업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이 추운 겨울 동안 만이라도.


다행히 윗집에 사는 친한 엄마에게 아들을 맡기고 딸아이 픽업을 다녔다.

- 미안해, 겨울 동안만 부탁할게

다행히 참 선하고 사려 깊은 성격의 아기 엄마라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그 집도 애가 둘이나 되는데.

미안한 마음에 반찬을 만들어서 나눠주기도 하고

국을   끓여 나눠먹기도 하고, 딸아이 픽업을 마치고 간식거리를  보따리 사서 선물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니.


참으로 추운 겨울이었다.

이전 10화 #10. 나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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