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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Jun 21. 2022

# 13.  첫 번째 결혼기념일은 시부모님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결혼기념일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내 마음 따위는 아랑곳 없이.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고통을 받든 관계없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 그렇게 첫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았다.

결혼하고 1년간, 나는 남편과 단둘만의 여행은커녕 외출조차 한 적이 없다.

늘 시부모님, 혹은 딸과 함께였다.

부부에게 부부만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것은 사치였으니.

이혼하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가정에서 부부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가정의 중심은 부부에게 있어야 함을.

그 단조로운 삶의 지혜와 이치를 나는 이제서야 몸과 마음으로 터득한다.


누군가에게 감히 내가 조언한다면, 아이가 있는 사람과 재혼을 할 때, 혹은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하게 될 때는 평범한 신혼부부의 삶을 생각하지 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연애할 때처럼 알콩달콩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고

주말이 되면 함께 데이트를 하고 여행을 가는 일 따위는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영역이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제주도에 2박 3일 리조트 숙박권을 선물해왔다.

결혼하고 첫 여행을 떠나게 되다니. 감개무량해라.

그것도 무려 제주도다!

남편 회사에서 선물한 숙박권은 80평에 이르는 복층구조의 리조트로 노천온천이 딸려있는 초호화

리조트였다.

남편은 결혼기념일이 조금 지나 우리 부부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오자고 했다. 네가 고생 많았다며.

그동안의 힘듦과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서러움이  

눈 녹듯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그래. 난 이런 결혼생활을 원한 거야.

매일매일이 어떻게 깨가 쏟아지고 행복하기만 하겠니. 힘든 일도 많이 있고 투닥거리는 일도 잔잔하게 많이 있겠지.

(그래도 나처럼 힘들면 안 되겠지. 그 어느 누구의 결혼생활도)

가끔씩 이렇게 주어지는 평온한 보상이 결혼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힘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갈 생각에 부풀어  하루하루 고된 시집살이를 이겨내던 어느 겨울.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시아버지가 계신 시골집에서

몇 안 되는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밥을 먹던 남편의 입에서 참 희한한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아빠, 엄마~

( 이것도 너무 싫었어. 무슨 40 남자가 부모한테 아빠~엄마아~~~ 차암나.

엄마까진 그래 그렇다 쳐도 아빠? 아빠라고?)

이번에 회사에서 제주도 리조트 숙박권이 나오는데 우리 식구들 다 같이 가자!


띠로리.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니.

결혼기념일로 나온 숙박권을 온 가족 여행으로 퉁치자고? 나한텐 우리끼리 가자고 말했던 그때 그 주둥이가 맞아?

제발 그 주둥이론 밥이나 먹어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늘어놓지 말고.

적어도 온 가족여행을 갈 거였으면 나한테 상의라는 걸 한 번이라도 했어야지.

하아...

그렇지만 나는 이 집에서 서열이 꼴찌다. 내 아들과 함께. 내 의견이나 주장 따위는 먹히지 않는 더럽게 답답한 집구석이다.

나는 그 상황에서 소심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온 가족이 함게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지옥의 시작이었다.


아들이 8개월쯤 되었을 때라 아기 띠로 아이를 업고 비행기에 타야 하는데 딸아이는 무조건 내 손을 잡겠다고 우긴다.

10킬로가 넘는 아들을 안고, 오른손으로는 캐리어를 하나 끌고 왼손으론 딸아이를 잡아끌며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얼마나 기다렸던 제주 여행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여행은 여행이 아닌 출장이었다.

집에서 하던 노릇을, 제주도에서 똑같이 했을 뿐.

여행에서 오는 여유로움이나 휴식, 힐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2박 3일 동안 하루 세끼, 총 아홉끼 중 제주도에서 돈 주고 사 먹은 밥은 제주도에 도착하자 마자 먹은 오분자기 뚝배기 단 한 그릇뿐이었다.

시아버지는 어린 손주를 데리고 밥을 먹는 것이 불편하고  밖에 밥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리조트에서 식사를 준비하길 바라셨다.


두어 군데 관광을 하고 리조트로 들어와 매운탕을 끓여 내라며 생선 조각을 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진 시아버지.

한 번도 매운탕을 끓여본 적이 없어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있는데 본인이 끓이겠다며 구세주처럼 시어머니가 나타났다!

이 순간만큼은 시어머니가 어찌가 고맙던지.

시어머니는 베테랑 주부의 포스로 냄비의 물을 가스불에 얹고 신나게 끓이기 시작했다.

올레!!! 이참에 배워놔야지. 언제 또 매운탕 끓여내라고 할지 모르니!

물이 끓길 기다리며 생선을 다듬고 채소를 씻고 있는데 어라, 시어머니가 보이질 않는다.

주방 옆에서 놀고 있는 딸아이에게 할머니의 행방을 물었다.


-할머니 어디 가셨니?

-할머니 밖에서 온천 중인데?


매운탕을 대신 끓여주겠다던 시어머니는 노천온천에 들어가 나올 생각이 없고 냄비에 물은 내 애간장이 끓어오르듯 거침없이 끓어오르고 있다.

결국 이 매운탕도 내 몫이로구나.

해본 적 없지만 해본다.

내가 누구냐, 미션임파서블 안!제!나!

매운탕을 끓이고 재료도 별로 없는 데 찬을 만들어 낸다. 몇 개 있던 고추로 된장무침을 만들고, 매운탕 끓이고 남은 무로 무생채를 만들어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우리 아들은 이 와중에 내 등에 업혀있고,

시아버지와 딸은 텔레비전 삼매경,

남편이란 작자와 시어머니는 노천온천 중이다.

이쯤 되면 난 정녕 이 집의 무급 식모인 것이 확실하다. 급료 없이 숙식제공만 되는 식모 겸 보모.

밥이라도 배불리 먹여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난생처음 매운탕을 끓여 밥상을 차리니, 어디 숨어있었는지 알 수 없는 몇 안 되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슴슴하게 잘 끓였다. 근데 채소가 너무 푹 익었다.


그냥 좀 드시죠, 아버님.

지금 이건 누굴 위한 여행이란 말입니까.


매운탕에 소주가 빠질 수 없었다.

한두 잔 술이 들어가니 평소 소심했던 남편과

고지식함의 끝을 보여주는 시아버지의 말다툼이 시작됐다.


- 너는 그래서 그거밖에 안되는 거다

- 네 죄송합니다! 이거 밖에 안되는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둘의 싸움에 필받은 시어머니가 나에게 한소리 하신다.


- 너는 죄인이다. 그러니 평생 남편과 애들에게 희생하며 살아라.


응? 이건 또 무슨소리?

내가 왜 죄인이라는거죠?

내 죄가 무엇인지 당장 내 앞에 낱낱이 고하시오!!!

사는동안 하도 별소릴 다들어 이제 이 정도 말은 그닥 놀랍지도 않다.

밥맛도 없고 무한반복되는 말다툼을 더이상 듣고 싶지도 않아 아들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와 잠시 쉬어보려는데 아들의 몸이 심상치 않다.

너무 뜨거워.

챙겨온 체온계로 아들의 체온을 재보니 38도를 웃돈다.

하...벌써 이게 몇번째란 말이야.

다행히 해열제를 챙겨왔다. 준비해온 해열제를 아기에게 먹이고 수건에 물을 뭍여 아들 몸을 닦으며 열이 떨어지길 기다려 본다.

그러니까 이런 한 겨울에 왜 제주도를 쳐와서 어린 아기를 들쳐매고 이 말도 안 되는 여행을 해야 하는 건지.

지난번 김장에 이어 부아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다.

내 아들이 아프든 말든 2층 주방에서는 아직도 두 사람의 술주정 섞인 말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진짜 염병할 노릇이네.

이 지옥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와중에 남편은 자기 혼자 자겠다며

작은방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가 버렸고,

침대 하나에 아들과 내가 누웠는데 딸아이가 굳이 함께 자겠다고 떼를 쓴다.

하는 수 없이 침대 하나에 셋이 함께 누워 고단한 밤을 지새우는데 딸아이의 몸부림에 어린 아들이 침대에서 떨어져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다.

우리 아들은 열이 끓고 침대에서 떨어져 울고불고 야단이 났는데 이 망할 집구석과 남편 새끼는 방구석에서 나 몰라라 퍼져 자고 있다.

오로지 내몫이란 말이다.

이성의 회로는 끊겼고 분노가 용솟음쳤다.

남편이 자고 있는 방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 문 열어!


한참만에 문을 연 남편은 혼자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 꼴이었다.

기막혀라.

정말 기막혀 뒈지겠네.

아니 뭐 이런게 다있지?

갖은 쌍욕을 퍼부으며 한바탕 소리를 질러대니

그 커다란 주먹이 내 머리통으로 날아온다.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지만 나는 참아지지가 않았다. 계속 악다구니를 퍼붓자 무차별 주먹이 날아들며,

마지막 휘날레 발차기와 함께 나는 그 방에서 쫓겨났다.

우는 아들을 엎고 조용히 2층으로 올라와 아이를 달래본다.


내 평생 최악의 여행이 되겠군.

해야 빨리 떠라. 어서 빨리 나를 이 지옥 속에서 건져내주렴.

그래, 어머니 말씀대로 제가 죄인입니다.

죄가 많아 이런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결혼기념일 여행이자 남편과 함께 한 마지막 여행이 될 거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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