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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Paloma Sep 25. 2023

Are you a coffee person?


커피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고3 생활과 관련이 있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의 쉬는 시간이면 내 짝과 나는 매일같이 복도의 자판기 앞으로 달려갔다. 밀크커피, 블랙커피, 율무차가 각각 150원, 고급커피가 2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진한 고급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마시기 시작하면 이내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고3’이라는 신분 때문에 숨이 막히던 시간, 가끔 찬바람이 불고 마음이 이유 없이 선득한 날에는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커피 한 잔을 더 뽑았다. 그리고 운동장의 구석진 등나무 벤치 아래로 숨어드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두번째 커피를 마시며 자율학습 2교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쉬는 시간이 되면 다시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그때 우리는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카일리 미노그’, ‘릭 에슬리’, ‘프린스’ 등을 들으며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읽었던 소설책, 가고 싶은 외국도시 등 오만가지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쫄깃하고 즐거웠다. 그러니,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들어가자.”는 말은 자율학습을 건너뛰고 싶은 우리 둘의 암묵적인 핑계 같은 것이었다. 


요즘도 습관처럼 매일 커피를 마시지만, 엄밀히 말하면 커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번화가에서도 주택가에서도 편의점 개수보다 많은 카페덕에 손쉽게 사 마실 수 있는 음료는 당연히 커피다. 하지만, 나에게 커피는 진하거나 연한 것, 그리고 우유를 넣었느냐 아니냐? 딱 거기 까지다. 묵직한 바디감, 과일 향, 산미 등등의 형용사가 메뉴판에 적혀 있지만 잘 모르겠고, 유명하다는 ‘카페 게이샤’ 원두도 추천을 받아 마셔봤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냥 커피네?’ 했다. 솔직히, 커피 메뉴도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카페룽고(Caffè lungo)?’ ‘룽고’는 이탈리아어로 ‘길다’라는 뜻인데, 그럼 ‘롱블랙(long black)’을 말하는 것인가? 단순하게 ‘블랙커피’라고 부르면 안되나? ‘코르타도(Cortado)’, ‘카푸치노(Cappuccino), ‘카페오레(Café au lait)’, ‘플랫화이트(Flat white)’, ‘카페라테(Caffe latte)’… 모두 다른 이름이지만, 나한테는 똑같은 ‘우유 넣은 커피’다. ‘아인슈페너(Einspänner)’는 쉽게 말해 ‘비엔나 커피’, 크림대신 아이스크림을 넣으면 ‘아포가토(Affogato al caffè)’로 인식이 된다. 커피를 공부하는 사람이 들으면 무식하다 할 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구분하는 것이다. 그 마저도 약속이 없는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아무 음료나 마신다. 그러니까 나는 카페에 가기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거나 용건이 있을 때만 가는 일종의 ‘social coffee drinker’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카페에 인색한 것은 맞지만, 여행중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다. 지방으로 여행을 갈 때면 프랜차이즈가 아닌 로컬 카페를 자주 이용하려고 한다. 가능한 한 현지의 것을 소비하는 것이 여행자의 옳은 자세라고 생각하는데, 조악한 ‘중국산’ 기념품 따위는 집에 가져와도 쓸데가 없고 가장 만만한 것이 식음료다. 가끔 지역 특산물을 이용한 메뉴를 발견하면 반갑기도 하다. 예를 들어, 봉평의 메밀 커피, 초당의 옥수수 라테… 같은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유행하는 카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한동안은 방앗간, 철공소, 방직공장, 양곡창고 같은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 건물을 카페로 개조한 곳이 눈에 띄었다. 20세기 근대산업시설의 경우, 젊은이에게는 낯설고, 중장년층에는 추억을 되살리는 공간이 되기도 하니 의미가 있다. 또한 버려진 건물을 허물지 않고 고치고 활용했으니 친환경적이기도 하다. 그렇게 낡고 빛 바랜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심지어는 고물상과 빈티지 앤티크 그 중간 어디쯤 있는 것 같은 카페도 가끔 보았다. 팬데믹을 거치면서는 대도시 외곽에 넓은 정원을 갖추고 베이커리와 카페를 겸하는 대형시설도 늘었다. 해외여행에 손발이 묶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대체로 그런 곳들은 골프장 그늘집 커피에 비할 만큼 값이 비싸다. 요즘은, ‘에스프레소 바’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연 따라가기에 숨차는 유행 사이클이다. 


카페의 춘추전국시대에 내가 언제나 아쉬워하는 한가지가 있다. 물론, 모든 곳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카페 중에도 음악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곳은 정말 드물다. 높은 천정에 반짝거리는 스틸 조리대와 디자이너 의자로 멋들어지게 꾸며 놓고 걸그룹 노래를 틀어 놓은 곳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깊은 고민없이 음원 플랫폼의 최신 유행 리스트를 아무거나 재생시켰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 화려한 메뉴와 세련된 실내장식에 어울리지 않는 ‘아무’ 음악은 아마도, 인스타그램에서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는 것만 최고인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기본이 무엇인지 놓치며 사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꼰대’인증인 것인가? 


10년도 훨씬 전에 구입한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이 집에 한 대 있다. 오래되어 가끔 물이 새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집의 아침을 깨우는 단순한 기능은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다. 원두를 붓고 물을 채운 후 버튼을 누르면 콩이 갈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잠시 후 내 컵에는 커피가 가득 채워진다. 값비싼 고압기계도 아니고, 고급 원두도 아니지만 나는 이 한 잔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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