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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호 Jun 20. 2022

글자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강현구 PD님)

일에 대한 생각

마포나루 서체가 사용된 마포구 버스정류장 의자


한참을 여기 앉았다가 집에 왔어요. 버스 타고 내렸는데 이 의자 하나가 저에게 눈물 나게 위로가 됐어요. 마포구에서 만들었던 마포나루 서체로 사용된 의자인데, 문득 집 앞에 버스를 타고 내렸다가 발견했거든요.


왜 이 의자가 저에게 위로가 되었냐고요?


이 의자가 ‘서체 디자이너가 되어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저에게 서체 만드는 일은 경험치가 없으니 정말 괴로운데 그동안 사람들에게 ‘서체 디자이너’가 꿈이었다고 말해와서 물러 설 수도 없게 되었거든요.


제가 그간 해왔던 그 스토리는 다 가짜였다고 말하고

서체 일을 안 하고 싶었을 때가 많아요. 머슬 메모리가 없는 일이다 보니 그게 힘에 부치는 일이고 회피하고 싶은 일이에요.


QT, 복싱, 헬스, 서체 그리기.


제가 늘 회피하는 일이에요. 사람 만나기, 캘리그래피 하기, 어디 가서 간증, 강의 하기, 로고 디자인 연구하기, 편집 디자인, 패키지 디자인, 파트너와 비용 협상하기, 주민과 함께 만드는 마을 디자인 로고 워크숍 하기,박사과정 과제하기, 폰트 파인더 연구하기. 이 일들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 생각돼요.


서체 디자인 = 좋아하지만 못하는 일


사람 만나기, 폰트 파인더 기획 연구하기, 과제하기, 로고, 편집, 캘리그래피 디자인은 좋아하지 않지만 잘하는 일이고, 서체는 좋아하지만 못하는 일이에요. 서체는 아키텍처 같아요 신경 쓸 게 그냥 이쁜 거 만들기가 아니고 3,000자 전체의 뼈대라고 불리는 구조를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예를 들어 ‘강’이라는 글자 하나 예쁘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강’ 뒤에 ‘병’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설계”해야 한다는 고통. 그걸 글립스라고 하는 서체 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패스 도구로 타닥타닥 그리고 위로 아래로 수정해보는 정말 시간 낭비의 일이에요.


서체 디자인은 건축 설계를 할 때 예를 들어 화장실을 아파트 공간에 배치한다고 할 때, 아무 곳에 넣을 수 없고 아파트 수도를 알아야 하고, 전기를 알아야 하고, 안정성을 알아야 하고 삶의 패턴을 알아야 하고.. 하듯 맞물린 그 어떤 것과 같아서 혼자 너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근데  양심이 있으니 마치 건축 설계사가 “야야  아파트 24 베껴. 야야 그냥  설계도 살짝 수정해이렇게  되는 것처럼 기존의 서체를 복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새로움의 서체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보니 너무 괴롭고 무거운  같아요.


그런데 그동안 제가 도시 서체 만들고 싶은 게 꿈으로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말해왔고, 10년 차에 덜컥 충남 지역, 서울 지역 서체 의뢰가 온 거예요. 일이 들어온 것도 신기한데 이걸 노력 끝에 경험해내는 결과물이 된다면 저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사실 저는 서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거예요. 정말 어렵다느니, 괴롭다느니 하는 것은 핑계고, 저는 서체 디자인을 잘하고 싶은 엄살이 심한 거예요. 강현구 PD님과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제 속마음이에요.


강현구 PD님은 저를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어요.


강현구 PD님은 ‘강병호는 캘리그래피 작가인가, 서체 디자이너인가, 브랜드 디자이너인가, 사업가인가’ 등 중구난방 우후죽순 펼쳐 놓인 다양한 것이 아니라 정말 보여 주고 싶은 가장 첫 번째, 두 번째.. 우선순위를 정리하고, 영상에 담고자 하는 기획을 정리해주셨어요


서체 디자이너, 캘리그래퍼가 아니라
글자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


1. 첫 번째 사건 : 공책에 쓴 손글씨
- 어릴 적 손글씨 칭찬. 학교 다닐 때 글씨 쓸 때 친구들이 좋아해 줬고 일부러 글씨 쓴 공책을 펼쳐 놓음

2. 두 번째 사건 : 서울 남산체
- 대학교 진로 고민 중에 버스 정류장에 쓰인 서울 남산체를 발견하고, 서체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취업함. 울산 에피소드 생김

3. 세 번째 순간 : 한글날 경축식 손글씨
- ‘대한민국’ 한글날 글씨 쓰며 이젠 주변 친구들에게뿐 아니라 글씨에 대해 ‘확증’된 것. 영업이 아닌 디자인을 해볼 기회가 됨.

4. 네 번째 사건 : 마포구 서체
- 새로운 비즈니스가 열림에도 불구하고, 서체를 하기로 마포구청에 들어감. 어렵지만, 서체 디자인으로 진로를 정함.

5. 다섯 번째 사건 : 충남, 서울 지역 서체
- 꾸준히 손글씨, 서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내오다 충남 지역과 서울 지역의 서체 개발 의뢰가 오게 됨.
강현구 PD님의 강병호 다큐멘터리 스토리보드

강현구 PD님은 제 삶의 이야기를 5가지 사건으로 요약해주셨고, 제 이야기에서 뽑아내고 싶은 스토리를 정리하셨어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어떤 사람이, 당장은 필요한 시간이라 느껴지지 않았던 기간 동안 성실한 태도, 좋은 사람들 만나는 시간을 얻으며, 그게 쌓여서 결국 서체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이젠 그 사람의 주변 친구가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손글씨를 보여 줄 수 있게 됐다는 것. 서체에 대해 진심이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만드는 서체를 보여주게 됐다는 것.


결국 그래서, 작은 일, 충실히 하루를 살다 보면.


정말로 하고자 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온다는 것


이 스토리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병호가 품었던 도시 서체 꿈. 처음엔 절대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았지만, 듬성듬성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만들어지는 걸 많은 사람들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느꼈으면 한다는 말을 해주셨어요.


세 차례 영상 촬영을 하며 강현구 PD님은 매번 질문을 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세요?” “왜요?” “왜 포기하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선택하신 거예요?” 끊임없는 질문에 고민해서 답을 하다 보면 “안 와닿는대요.” “별로예요” “진정성이 안 느껴져요.” “재미없어요” 라며 제 속에 있는 진짜 이야기를 꺼내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강현구 PD님은 제 삶의 이어지지 않은 조각(캘리그래피, 서체, 손글씨, 로고 디자인…), 파편들을 재편집하고 우선순위를 정리하고 시나리오를 한 가지 메시지로 표현하는 과정을 종이 2장에 메모를 하셨는데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우선순위로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되고, 저를 표현할 때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저를 이렇게 말합니다.


“글자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라고요. 서체 디자이너라고 하기엔 결과물이 아직 없지만, 정말 글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진심이니까요. 그리고 꿈을 꾸다 보면 그 기회는 정말 오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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