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너의 인생

by 조화득

재미없는 너의 인생





“님은 인생을 재미있게 사시는 것 같아요!”


이상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그대로인데, 요즘 들어 이 말을 자주 듣고 있다. 올해 들어 이 말을 세 번째 들었다. 재미있게 산다는 건 또 뭘까. 어쩌면 남편 말대로 나잇값 못 하고 철없이 산다는, 그런 말의 또 다른 표현일까.


일단 내 인생은 우울의 연속이었다. 사춘기 시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된 순간부터 시작된 우울과 가정 내 불화, 원만치 못한 교우관계. 게다가 집안을 벗어나고자 선택한 결혼. 2년마다 한 출산과 육아. 제정신으로 버틸 여성이 존재할까? 덕분에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을 평생 안고 가게 되었다.


견딜 수 없는 우울은 취미로 현실도피 하게끔 했다. 배우를 덕질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며, 만년필로 편지를 쓰고 다이어리를 꾸미고 글을 쓴다. 그래도 견딜 수 없으면 유머로 내 인생을 비꼰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나이 40살에 취미를 즐기는 여자.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내 취미가 대중적이지 않아서 (차라리 케이팝을 좋아했더라면, 비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했다면!) ‘취향’이 비슷한 “동갑내기”는 유니콘처럼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둘 중 하나는 버려야 사람을 만날 테니, 내가 버린 건 나이다. 일단 취향이 비슷하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나는 사람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시댁이니 뭐니 그런 것도 흥미가 없었다. 유부녀 전매특허 시댁 욕은 어디서나 통한다고? 하지만 나의 시댁은 ‘보편적이고 무난한, 약간의 욕과 그럭저럭 견딜만함’이라 딱히 할 말이 없다. 게다가 내 친구들은 다들 육아하느라 바쁜 나이 아니던가. 내 아이는 이미 다 컸는데 말이다!


그러니 취미생활로 만나는 사람들이란 죄다 미혼 20~30대 여성이기 마련이다. 나이는 달라도 취미가 같으니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로 하루 종일 대화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 여성들이 보는 나는 ‘나이 들어도 재미있게 사는 여자’였다. 게임 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위해 밤새 필리버스터가 가능한,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어떻게 재미있게 사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우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뿐인데.



2.



또 다른 누군가는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울증 약 부작용이 조증이야. 네가 그 부작용에 해당하는 것 같다.”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시달렸던 불안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린데, 남편은 든든하지 못했다. 그러면 시간이 남는 틈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무언가를 하게 된다. 이게 좋게 풀리면 공부하고 일만 하는 거고, 아니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취미’ 관련 일을 벌이는 거다. 계속 몰입해야 하고 새로운 즐거움이 있어야 하며, 기분이 방방 들떠있어야 한다. 이런 게 조증이었나보다. 머릿속을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고 미친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움직인다. 이런 내가 한심하면서 멈추지 못한다.


우울증 약 부작용 같은 조증.

에너지가 넘치는 여자

가족과 집안일에 관심 없는 여자


여기에 인생을 재밌게 산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더더욱 나는 아리송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 잠시 멈칫하다가도 여전히 제멋대로다. 그동안 이렇게 살아왔는데, 다른 모습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한마디에 지나치게 몰입하며 곱씹어보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생각한다.



3



이 모든 말과 평가를 생각했을 때,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어쩌라고. 그냥 살아야겠어 “


내가 엄마인지, 딸인지, 아내인지 며느리인지 혼란스러웠고, 그 와중에 나는 나인지 너가 나인인지도 모르겠고. 너는 웃긴 사람이고 사차원이라고 하다가, 한없이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이기도 하는-


나의 겉모습이 이렇게 다양한데, 어찌 한 면만 보고 나를 판단하려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고 마는가. 나를 오래 봐왔다고, 나와 아주 내밀한 소통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사이 나는 여전히 변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을 수 없으며, 어제의 나는 우울했지만, 미래의 나는 사차원의 어머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라는 인간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인생이 덜 괴로웠을까. 나에게 있는 다양한 모습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없다. (하다못해 직장에서 나의 오타쿠기질을 알면 곤란하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에 너무 깊게 몰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 나의 이런 모습을 봤군요! 이런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답니다. 하고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나에게 정신과적 문제가 있다면 의사가 알아챌 것이고,

나의 체력과 운동은 나의 담당 트레이너가

내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하면 내 글이 먼저 알아챌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당신들 말대로 인생을 재미있게 살고 있기도 하고, 아니면 불안한 삶을 간신히 붙잡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건 결국 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포춘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