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져 있듯, 랑종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변고의 '당사자'의 제한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체험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일정부분,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영화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영화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 시도되는 작법인데, 정작 랑종은 '사실성'을 가장함에 있어서는 그다지 탁월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장면,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보통의 영화들에서와 다름없이, 자신 외부의 현실에 간섭받지 않는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며, 그것이 화면 안에 담고 있는 바는 어떤 측면에서 지극히 '영화적'이다. 즉, 실제의 현상, 사건과의 우연적인 조우임을 가장해야 할 영화의 카메라 워크와 미쟝센은 도리어, 철저히 계산적인 기획의 산물임이 어렵지 않게 간파된다. (이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영화의 중간 중간 검은 화면 위에 덩그러니 출력되는 자막은 형식상으로는 지극히 다큐적이지만, 기실 서사의 전개를 정돈하고 관객에게 환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실제 체험'으로서의 착각을 저해한다. 그것을 볼때, 관객은 영화가 가상속의 '기획된 현실'에 불과함을 불가피하게 의식하게 된다.
내용면에서 랑종은 전형적인 오컬트 호러의 도식을 따른다. 불길한 상징과 전조, 현상이 나열되고 심화되면서 고조되는 긴장이, 이내 '폭압'으로 변해 관객을 겁박하고 억누른다. 작중의 인물들이 겪는 사건, 현상은 불가해不可解하고 불가피不可避하며, 또한 불가항不可航하다.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것으로 부터 도망칠 수도 없으며, 저항할 수도 없다. 더구나 인간은 자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자신이 처한 사태의 피상에 대해서 조차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석상의 목이 잘리고, 불운한 소녀는 하혈下血을 겪고, 각종의 기행을 선보이지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무엇의 정체, 그것들이 어떠한 큰 전체의 일부인지를 알지는 못한다. 이 점에서 작중에 등장하는 두 무당(님과 싼티)과 관객의 처지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님과 싼티는 작중에서 거듭, 그것에 대해 모른다고, 알 수 있는 게 없다고 고백한다.
무당은 틀림없이 보통의 사람과는 구분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사람에 불과하다. 이른바 무당의 신통력神通力이란 형언할 수 없고 실체를 확신할 수 없는 특유한 감각과 출처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 부터 전래되어 온 의식ritual에 의존하여 발현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정말로 참된 것인지, 실효를 가지는 것인지, 무당들 자신조차 확언하지 못한다. 단지 '이것'을 하면, '저것'이 잇따르므로, '이것'이 '저것'을 이끌어내고 유발해내는 힘이 있다고, 경험적으로, 그리고 관습적으로 강하게 추측될 뿐이다. 작중에서 무당들이 치르는 의식과 기현상은 마치, 후자가 전자에 잇따르거나 동시적으로 유발되는 것처럼 교차로 편집되어 보여지지만, 기실 양자간의 인과, 연관은 분명하지 않다. 양자는 단지 서로 밀접하게 인접하여 있을 뿐으로, 전자로서 후자를 유발하게 하는 어떠한 힘 자체가 관찰되지는 않는다. 양자의 그러한 시간적 연접은 단지 우연의 소산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또한 작중에서 거의 확실시되어 묘사되는 '빙의'라는 현상 자체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착란', 단순한 광증과 뚜렷이 구분되지 못한다. 병원의 의사가 원인을 모르겠다고 진찰을 내리기는 하지만, 그러한 무지의 시인이, 사악한 영적 에너지와 그 영향의 실재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불분명하고 직접적인 영향력이 실증되지 않는 인과에 대한 믿음이, 주술의 본질을 이룬다.
(이 점에서 랑종은 나홍진 프로듀서의 전작 <곡성>을 떠오르게 한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의식을 거행하자, 외지인이 고통에 겨워 쓰러지는 모습을 교대로 보여주는 <곡성>의 한 시퀀스는 마치, 정말로 그러한 의식이 살을 날릴 대상인 외지인에게 실효를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 양자간의 인과적 연관은 작중에서 증명되지 않는다. 단지 그 각각의 장면이 시간적으로 연접하고 교대로, 계속적으로 보여짐으로서, 서로 연접하는 사건들을 인과 관계로 생각하게 하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촉진하고 있을 뿐이다.)
랑종의 공포는 단지, (가령, <애나벨>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괴기와 말초성의 점프 스케어로 점철된 포르노적 전시의 양상에 그치지 않는다. 호러 무비로서 랑종이 가진 탁월함은 바로 이러한 총체의 모호함, 불분명함의 표현에 있다. 저주의 실체는 불분명하고 그에 맞서기 위한 의식의 효력은 의심스럽다.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바얀의 존재 여부도 그렇다. 바얀은 눈에 보이지 않고, 기도에 즉각 응답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무당, 영매가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느낌으로 부터, 그가 존재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신없이 나아가며,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 '알 수 없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알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선택을 취해야만 하는 인간은 무력감에 사로 잡힌다. "아는 게 힘"이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제언은 이때 '모르면 무력하다'는 말로 뒤집힌다.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인간은 아는 만큼 그것에 대비할 수 있으므로 자신만만할 수 있다. 적어도, 상황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알 수 없고 따라서 대비할 수도 없다면, 인간은 상황에 지배 당하게 된다. 무지의 희생자에게 그럴 듯한 대책의 정립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때 그때의 몸부림만이 가능할 뿐이다. 더구나 감각은 현혹되기 쉽고, 인간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취약하며, 불완전하다. 파운드 푸티지 형식 특유의, 제약되고 편견에 사로잡힌, 고정된 관찰자의 시선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극대화한다. 무력한 인간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조차 믿을 수 없다. 인간의 인지와 그로부터 감춰진 본질 간의 간극은 자체로 해소될 수 없는 긴장을 산출한다. 알지 못하는 인간은 앎의 공백을 과장된 상상으로 채우며, 언제 불운이 자신을 덮칠 것인지, 그것이 실로 어떠한 성질, 수위의 것일지에 대해 만성적인 불안에 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