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onthewall Sep 25. 2022

미카엘 하네케, 히든Caché

영화는 한 가정에 익명으로 배송된 비디오 테이프에 담긴 영상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해당 영상은 몇 시간 내내 어떠한 편집, 연출, 구도의 전환없이 영화의 주인공 조르주의 집을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누가, 왜 이러한 영상을 제작해서 조르주 측에 보냈는지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 전체의 맥락을 참조해 보면, 이것이 작중의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작품 내적인 음모의 소산이라기 보다, 조르주와 안느, 두 주연의 은폐된 죄의식을 은유하는 장치임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다.


조르주와 안느는 배송된 영상에 전제된 의도와 감시적인 뉘앙스에 대해 만성적인 불안을 표출하지만, 기실, 배송되는 영상들은 두 주연에게 어떠한 요구 사항도 전달하고 있지 않으며, 감시의 의도가 있다 보기에도, 지나치게 고정된 시선을 고수하고 있다. 영상의 포커스는 인물과 그 행동을 따라 특정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그보다는 넓은 시야에서, 단지 그, 그녀가 있는 공간을 대략적으로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후반부, 마지드가 조르주의 앞에서 목을 그어 자결하는 장면에서도, 영상의 초점은 그러한 이벤트 자체에 보다는 전반적인 공간에 맞추어져 있다. 카메라의 시선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에 조르주는 그저 화면 밖으로 걸어나가는 것으로, 매번 간단히 화각을 이탈할 수 있었다. 즉, 영상은 각개의 인물을 특별히 다루지 않는다.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도외시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인물들에게 모종의 불안을 야기하게 되는 건, 그들 자신만은 고정된 화각 안에서 자신의 적확한 실상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무심하게 보이는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의 특정한 행위에 대한 관심이 아닌, 전반적인 관조로 드러남으로서, 숨을 곳이 없는 전적인 감시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언행의 특정한 요소에 국한되지 않은 전적인 관심은 개인의 차원에서 대비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활의 모든 측면에 있어서 철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르주와 안느의 불안은 그리하여, 카메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감추어야만 할지, 그것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하고, 심화된다. 그리고 전적인 감시 아래 놓인 인간은 그것을 초래하였을, 가능한 원인을 추론하는 과정에서, 죄로 얼룩진 자신의 실상, 본질에 대해 불가피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신과 함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지드가 그러한 영상을 만들고, 유포했을 것이라는 조르주의 확신이 담긴 추론이 가능해진다. 조르주는 어린 시절,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던 아랍인 소년 마지드를 거짓 모함으로 고아원에 보낸 적이 있는데, 이와 같은 무언의 겁박에 어떤 이유가 있다면,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자신보다는 그의 주변을 조망하는 영상을 보면서 조르주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르주와 마지드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르주가 그의 아내 안느에게 ‘마지못해‘ 털어놓는 바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조르주는 본래 그가 마지드에게 찾아갔다는 사실을 안느에게 숨겼었는데, 둘의 대화를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배송되면서 그러한 사실은 탄로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마지드는 알제리 전쟁으로 촉발된 파리 시내에서의 소동으로 양친을 잃었다. 조르주의 어머니는 그런 마지드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를 입양하였는데, 조르주는 그런 마지드를 모함하여 집에서 쫓아낸 것이다. 물론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내면서, 제대로 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마지드는 성인이 되어서 사회적 하층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안의 관계에서 구태여 언급되는 역사적 맥락(알제리 전쟁), 그리고 마지드와 그의 양친이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계 아랍인이라는 점, ’지배국민‘ 조르주의 선택으로 ’식민지민‘ 마지드의 삶의 경로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좌우되고 말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영화가 제국주의적 차별과 폭력에 대한 문제 의식을 암시하고 있음은 분명해진다. 고정된 화각을 가진 영상의, 표면적인 ’무심함‘과 그러한 영상들을 계기로 하여, 조르주의 과거가 ’탄로‘나는 과정의 묘사는 각각 프랑스 사회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불문에 붙이는, 과거사를 대하는 방식과 그럼에도 그것을 아예 없던 일처럼 묻어둘 수는 없다는 자명성, 잠재된caché 터부의 이물감을 은유한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마지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화각의 응시는 작중 계속 이어진다. 다만 더 이상 그러한 '영상'이 작중의 인물들에게 배송되지는 않는다. 이제 고정된 화각의 응시는 관객에게 향한다. 다시 처음과 같이, 조르주와 안느의 집이 화면에 등장하고, 이어서 침실에서 잠에 드는 조르주의 모습이 보여진다. 잠에 들기전 암막을 치는 조르주의 모습은 밝은 대낮에 잠을 자기 위한 루틴의 일환이라기 보다, 불가피하게 의식되는 외부의 '시선'을 차폐하기 위한 시도인 것처럼 읽혀진다. 연이어 (결코 실제로 촬영 되었을 리가 없는) 어린 마지드가 고아원에 끌려가는 과거의 장면이 전개된다. 여기서도 카메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한 잔향reverb으로만 감지될 만큼 먼 거리에서 일련의 사건을 조망하기만 한다. 그러한 일말의 극적 각색dramatization이 개입하지 않은 장면은 그렇기에 (cctv나 바디캠 영상 따위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증거 자료로서 객관성을 인정받는 것과 같이) 이견의 여지없는 사실의 증명일 수 있다. 극적인 연출과 편집의 개입은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기획의 소산인 만큼 모종의 의도를 가진 주관의 이입으로 간주되어 사실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지만, 이 경우에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한 것이 된다. 따라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함의를 획득한다. '불편한 진실'은 그처럼 명백한 것이면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불쾌한 것임을 영화는 흔들림없는 시선을 통해 현시해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사자성이라는 이름의 미신, 폭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