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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Jun 07. 2022

당사자성이라는 이름의 미신, 폭력

정체성 정치, 당사자성 개념 비판

개인이 자신이 관계하는 사안에 대해 사안의 '당사자'로서 전제적으로 재단할 권한을 지닌다는 믿음은 오늘날 사회적 정설에 해당한다. 이러한 믿음은 개인이 어떤 사안의 당사자인 이상, 자기 자신과 자신이 관계하는 사안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밀접한 이해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해 충분히 깊이있는 이해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지난날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 가나 출신 연예인이 고등학생들의 악의없는 코스프레를 인종 차별이라 규정하고 비난한 일이나 수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중에 있는 전장연 측의 대중교통, 도로 점거 시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으며, 일체의 공적 비판에 대해 면책권을 부여받았던 것은 모두 마찬가지로, 그들이 유색 인종, 장애인 차별의 당사자로서 자신의 문제에 관한 한 절대적인 판단 권한과 담보된 정당성을 지닌다는 사회적 신앙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즉, 개인이 어떤 사안의 당사자라는 사실이, 그가 자신의 입장에 의해 제약된 일개 개인으로서의 주관을 초월하여 언제나 정당한 판단을 내리리라는 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누구도 절대무오하지 않으며, 최선의 경우에도 일정부분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에 의거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오히려 사안의 당사자는 바로 그 당사자라는 점에 의해, 자신의 입장에 매몰되어 당사자로서의 편향된 관점을 행사할 가능성을 지닌다. 기실 개인이 어떤 사안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그가 해당 사안의 당사자로서의 특별히 국한된 입장을 지니게 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가 자신의 이익을 변호하고 자신에게 가해질 수 있는 해악을 피해기 위해 '가능한 최선'을 다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한 최선'의 목록에는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타인을 기만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따위의 정당성, 보편적인 공리를 훼손하는 조치마저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중범죄를 저지른(그랬다고 믿어지는) 사람이 법정에서 자신의 심신미약, 범행의 정당방위성을 주장한다고 하여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중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에 직면한 개인이 그와 같은 면책 사유를 실제로는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유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으리라 가정함이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떤 사태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이처럼 그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른 개별적인 당위와 그에 기반한 (이기적인) 행위의 원칙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적 담론의 장에서는 이와 같은 당사자성의 주관적인 측면이 비판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담론에서 당사자는 자신의 입장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판단을 내리리라 여겨지는데, 이는 사태의 향방에 따라 영향을 받을 당사자의 감정을 가치 판단의 주요한 척도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태의 옳고 그름은 바로 그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 호오의 표시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혐오 표현'은 나날이 그 범주를 급격히 넓혀가고 있는데, 발화자의 의도와 발화의 전후, 문화적 맥락이 무시된채, 당사자가 가지는 '피해 의식'의 여부에 그 규정이 전적으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와 맥락을 탈피한 표현 자체는 부유하는 기표에 불과할 뿐인 것으로, 설령 그것이 형식적, 비형식적으로 혐오 표현의 제스처를 취한다 해도, 단지 어떤 함의의 가능성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적 판단의 권위를 부여받은 개인의 신성화된 감정은 그 자의적 정동affect에 의거한 순환논법(그것은 악의를 느끼게 하므로, 악의적인 것이다.)을 따라, 가능한 해석의 지평을 제약하고 있을 따름이다. 즉, 규제의 대상으로서의 '혐오'는 모종의 제스처 안에서 내생되는 것이 아닌, 그러한 '느낌'으로 부터의 규정에 의해 역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실로 이처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개인의 감상에는 어떠한 종적인 근거가 없다. 그 자체는 외부의 객관적인 현실에 대한 반응으로서가 아닌, 각 개인의 지극히 개별적인 내적 체계, 의미망의 작용을 따라 불현듯 역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모두가 똑같은 감상을 느끼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여러 개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제로 개인의 감상은 언제나 그 내적 논리에 따라 개별적으로 발현된다. 따라서 그것은 공적 판단의 척도로서는 더없이 부적절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척도의 채택은 결국 특정 개인의 자의적 감상에 의거한 전제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론장에서는 그러한 개인의 감정에 과도한 판단의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그 전횡을 조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당사자성에 대한 신앙은 각개의 당사자성 일체의 도덕적 권위를 긍정하기만 할뿐, 그 각각의 상대적인 우열과 충돌을 조율하지는 못한다는 지점에서도 문제를 드러낸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개인의 집합체이며 그들 각자는 자신이 처한 개별적인 조건에 비추어 나름의 당사자성을 형성한다. 자연히, 사회의 각 개인은 각자의 편향된 입장을 지닌 당사자로서 서로 상충되는 이해 관계와 가치 체계를 지니게 되어있고, 이것이 공론장에서 발현될 때는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충돌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편적인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상이한 가치들간의 충돌은 바로 그 상이함, 공동의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에 의해, (상호의 차이를 긍정하고, 그에 대해 타협한 끝에 가능해지는) 자체적인 합의의 여지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갈등의 양상은 언제나, 개별자의 입장을 초월하며,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보다 상위 차원의 합의에 의해서만 조율될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과 그 주관적 견해 일반의 맹목적인 우위만을 인정하는 오늘날의 사회적 정설은 개별적이고 통합될 수 없는 차이들 각각의 주관적인 정당성의 차원만을 긍정함으로서 수습할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요컨대, 공론장에서 각개의 주장, 주의에 대한 보편적 객관의 조망이 실조됨에 따라, 호환될 수 없는, 타협의 여지없는 차이들간의 맹목적인 대조, 분열만이 야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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