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의 인종, 민족성, 출신 문화권, 신체적 장애, 성 정체성, 체형 등 일련의 소수자적 스테레오타입 요소들에 각각 점수를 매겨 다양성을 측정하고 제작 환경에 반영하는 블리자드의 다양성 영역 체계 Diversity Space Method는 오늘날 PC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다양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과거의 인종학, 골상학적 분류를 떠오르게 하는 이와 같은 체계는 오늘날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미디어 비평 담론의 핵심을 이루며, 이처럼 노골적으로 수치화되어 표현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커니즘이 여타의 미디어 매체 일반에 적용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작품의 완성도는 그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다양성을 체현하고 있는가, 즉, '백인' '남성' '엘리트'의 성공 신화로 대표되는 정상성이라는 지배적인 척도로 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적으로 측정된다. 그러한 비평적 척도가 너무나도 지배적이게 된 나머지, 작품의 사실성, 개연성, 세계관 내부의 논리를 훼손하면서까지 소수자적 정체성을 지닌 배역을 인위적으로 작품 내에 할당하는 기획, 연출의 기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소수자적 정체성이 오히려 작중 다수로서의 전형을 이루거나 그러한 정체성 자체가 맹목적으로 과시되는 작품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이처럼 분류된 차이들에 대한 일괄적인, 평면화를 지향하는 분배로서 구현되는 다양성과 그러한 기획의 체계적 작용은 작품의 개별 요소들을 차이를 이루는 성분들의 종합으로 해체하고 재조직함으로서 그 개성을 무화한다. 특히 그러한 구성 하에서, 작품속 인물은 인종, 성격, 체형, 특정한 문화적 배경 등의 조합으로 파악되며, 해당 성분들이 표상하는, 또는 그것들과 의도적으로 연관지어진 전형성만을 표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부여된 전형들의 양상 자체는 정상성에 대한 규정과 그에 따른 가치 판단을 배격하는 윤리적 전제에 의해 개체의 구분을 이루는 객관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됨으로서 어떠한 실질적인 이상성abnormality, 중첩되는 차이에 의한 창발overdetermination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회 문화적 함의와 주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상실한 일련의 차이 요소들은 객관적 사실로서의 차이, 사물의 무의미한 성질 자체에 불과하게 된다. 이와 같은 체계 하에서, 인물의 성별은 중화되어 본연의 생물학적 실재의 의미에 고착되고, 피부색과 인종 등의 요소 또한 모종의 미학적 지향과 상징적 암시의 기능을 발라낸 객관적인 구성물에 그친다. 인물의 소수적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역시도, 그 각각이 보편적 척도 하에서 다른 것들과 구분되지 않는, 보편적 정상성과의 긴장을 탈각한 일반적 취향으로서 모티브적 차이를 생성하지 않는 명목상의 구분에 불과하다. 그러한 맹목적인 차이들로만 구성된 인물은 결국 의도된 다양성, 정체성을 매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흉측한 외모, 비만 체형, 독특한 출신 배경, 소수적 성 정체성, 신체적, 정신적 장애 등의 예외적irregular 요소들을 다수 채택하여 인물을 구성하는, 근래 두드러지는 기획의 경향은 마찬가지로, 기실 분배되는 차이의 의미론적 결여에 의해 다양성의 표현이 그와 같은 피상적 이질성 자체의 과밀, 과시로서만 유도될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렇게 만들어진 인물은 오로지 그 특유의 이형을 통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품 내부에서 내생된 가능성의 지평 아래에서 자생하지 못하고, 윤리적 당위와 그 체계적 규준에 따라 조직되는 다양성은 일련의 요청되는 전형에 순응함으로서 그 자체도 또 하나의 고착된 정상성에 불과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다양성은 결국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에 단순히 대응하는 반-테제에 지나지 않거나, 그 양상 자체가 새로운 클리셰로서 반복되는 전형에 불과하게 된다. 예컨대, 남성 중심 서사, 캐스팅에 대한 반감을 표방하며 제작되는 일군의 '여성 영화'들은 대부분 그 원형이 되는 남성 영화의 형식을 도식적으로 반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고, 백인 남성 엘리트 캐릭터(내지는 금발 글래머 여성)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소수자적 전형의 인물들은 대개 그에 대비되는 결함적, 반-미형적 인물로 묘사되는 데에 그친다. 때문에 그렇게 구현된 다양성은 그 형식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근거하는 원형의 인상을 보존하고 있음으로서 역설적인 기시감을 자아낸다. 의도된 차이와 다양성은 증발하고 윤리적 규율에 의해 조직된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한) 또 하나의 획일성만이 발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