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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Dec 11. 2022

악성 리플과 도덕적 정상성에 관한 고찰



연예인, 유명인의 자살은 흔히 상호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 악플, 적대적인 루머의 생산이 횡행하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성토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대중 앞에 상품화하여 그 이미지를 팔아먹으면서 불가피하게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연예인이라는 직군의 성격상, 그러한 문제 의식에 관련한 실례를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세상에 욕 안먹는 유명인은 없다. 그리고 연예인도 사람인 이상, 그런 평가를 아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쩌면 다수 대중의 호의로 먹고 사는 '직업적 관심 종자'로서, 자신에 대한 대중적 평가의 향방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수 민간인들이 평생을 벌어도 축적할 수 없을 엄청난 부와 명예를 일찍이 상당한 성취로서 거머쥐고 있는 연예인들이 삶에 대한 애착을 놓을 만큼의 자기 혐오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일견 역설적이지만, 근본적으로 대중의 호감을 이끌어냄으로서 생계를 잇는 연예인 직군의 속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불특정 다수의 호의를 스스로를 매개로 일련의 부가 가치로 전환하면서 자신의 효용을 체감하기 마련인 이들은 반대로, 대중들에게서 공격받고 비난받을 때 사랑 받아야만 할 존재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일종의 무능감에 젖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다수의 지지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어 가치를 발하고 자신에 대한 척도를 형성하는 만큼 다수의 폭력, 배반에 취약하다.


연예인, 유명인에 대한 집단적 비방이 단순한 정서적 폭력을 넘어, 잠재적, 간접적인 살인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담론, 공감대는 오늘날 민간에서 이론의 여지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악플러들을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럼에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바뀌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특정인에 대한 근거없거나 (그 엄밀한 기준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는 둘째치고) 지나친 비방이 사회에 해악적이며 권면할 만한 행위가 아니라는 명제는 도덕적으로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살인, 폭력과 같은 명백한 위해 행위가 지양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마찬가지로 자명한 (듯 보이는) 도덕적 명제가 어느 누구도 각별히 감화시키지 못하는 공허한 선언에 그치게 되는 것처럼, 그러한 문제 의식은 자명한 사실, 현상에 대한 '무력한' 재확인에 그치게 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명령의 명백함, 반복성은 (법이 위법, 위해의 실재하는 가능성에 대항하여 제정되는 것과 같이) 일련의 인위적 규율의 설정이 요청될 만큼 그것이 지양하고자 하는 죄악이 만연하며 기실 지양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무분별한 증오의 표현에 대한 이론의 여지없는 (그렇게 여겨지는) 문제 의식은 그것이 전혀 지양될 수 없음으로 하여 설정되고 거듭 대두되어, 이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자명하고 명백한 도덕적 당위는 까닭없이 타인에게 위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지당한 도덕적 전제에 기초하여 누구나 기꺼이 동의를 표할 만한 것이어서, 그것이 함양하는 문제 의식은 이내 표적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상호의 입장을 아우르고 차이를 묵인하면서 이루어지는 큰 틀에서의 합의가 (실제로 상호간의 차이를 조율하려 하지는 않기 때문에) 자체로는 아무런 실질적인 비전, 동인drive을 산출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한 지당한 도덕적 명제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는 하나의 공리axiom로서 자명한 추상적 원칙의 차원에 한정된 단순한 현상 인식에 그친다. 구체적이고 엄밀한 사실, 대상의 비판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어떤 개선을 이룩하지도 못하며, 문제 의식 자체에 대한 대략적인 공표에 그친다. 문제가 되는 것을 문제적이라 지적하기는 쉽다.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고 그로부터 형식적인 거리를 두기도 쉽다. 따라서 비극은 단지 각자의 도덕성을 선전하는 계기로 전락한다. 보편의 합의가 진전된 상식인의 공동체 안에서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 없이, 그 바깥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실체가 불분명한 무뢰한을 비난하기에 열을 올리게 될 뿐이다. 비판이 난무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에 따른 책임은 수반되지 않는다. 기실 그러한 담론에는 명확한 방향성 자체가 없다. 단지 그때 그때의 감상적인 반향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약점을 보이는 이에게 몰려가 멍석말이를 시전하는 (일부?) 대중의 저속함, 루저들의 르상티망ressentment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누군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서 영속할 터이다. 그에 대해 반복되는, 그러나 차이를 낳지 못하는 당위의 표명은 실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어떤 도덕적 합의의 미완 내지는 방임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나 추상적인 원칙의 차원에서는 상식적이며 '올바른' 인식을 지닌다. 그럼에도 그러한 공통의 인식은 구체적인 행위의 차원에서, 맥락을 발라낸 행위 일반만을 지시하는 자체의 모호함으로 말미암아 일관적으로 반영되지 못할 뿐이다.


요컨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는 그것을 수행하기로 결심하게 한 모종의 정당성,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원칙의 차원에서는 확고한 선악의 구분이, 구체적인 행위의 단계에서는 충분히 단단한 구획을 산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폭력, 살인같은 이론의 여지없는 위법, 위해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자신의 행위를 일종의 단죄, 정당 방위와 같은 것으로 평가하며 죄의식을 지니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그러한 주관적 해명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승리에 그치지 않고 민중들 사이에서 일정한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흉악 범죄자에게 위해를 가한 '의인'에 대해 도덕적, 법적 금제 사항을 완고하게 거론하며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는 다른 사회적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에 의해 냉혈한, '쿨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이처럼 언뜻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듯 보이는 도덕적 원칙, 합의 사항들은 기실, 경우에 따른 (민중의 감상적 견해에 따른) 융통성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비-정상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배제하려는 사회적 시도는 성공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자명한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인지의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개인의 행위와 그에 대한 행위 주체의 내성적introspective 판단은 결국 사회적, 객관적 판단과 처벌에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플이라고 경우가 다르지 않다. 악플을 게시하는 행위가 사회에서 합의된 도덕적 정상성에 합치된다고 믿는 악플러는 (거의) 없다. 단지 그럼에도,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인은 자신에 대한 대중들의 비난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대중들의 비난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견해에 앞서 엄연히 실재하는 현상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이 적습, 죽음의 위협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같이, 또 서비스 노동자들이 진상 고객에게도 (컴플레인 접수를 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접객의 예를 다해야 하는 것처럼, 불특정 다수의 평가와 잠재적인 악의에 직업적으로 노출된 공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적당히 무감각해질 필요가 있다. 다만 예능적 기예의 수준과 심신의 민감도는 일정부분 비례하는 관계가 있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다소간 불가피하게, 비극이 초래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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