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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Nov 03. 2022

몰입없는 시대의 매체

스낵 컬쳐


수많은 현대인들이 "할 게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어떤 목적 의식이나 열의없이,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소비와 탐닉을 한다. 그다지 즐거움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감각을 잊기 위해 영화나 드라마, 만화를 보고, 유튜브 영상을 보고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는 사람들이 정말로 '해야만 할 것'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개인들을 각종의 전통과 관습에 구속해 두었던 신성한 질서, 존재의 거대한 고리the great chain of being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를 부여하는 체계의 실조로 인해 탈-주술화disenchantment한 사물은 이제 질서 내부에서의 지위와 의미를 잃고 실용적 쓸모에 의해서만 재단된다. 가정을 부양할 만한 충분한 보수를 지급하는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뒤, 대를 잇는 재생산을 하는 따위의, 과거에는 공동체적 의무의 일환으로 당연시되었던 삶의 경로도 이제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것들을 다량의 시간과 자원을 들여 추구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각 개인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의무 사항과 보편적으로 존중되는 가치의 목록은 줄어들고 있는 반면, 각 개인이 가진 가용 시간과 에너지의 분량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균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고 있고 전 산업 분야에 걸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기계화, 자동화는 반복적이고 구체적인 조작 과정으로 표현되는 기계적 작업 전반을 대체하면서 전체 일의 과정에서 인력의 개입을 줄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노동의 양상 자체를 각각의 업무 사항에 대해 적응적이며 비-절차적인, 기계적 작업과 대비되는 의미로 바꾸어놓고 있다. 다시 말해, 충분히 고도화된 인간 노동의 개별 과정은 특정한 소요 시간의 형식으로 기술되지 않으며, 자체의 주관적이고 비-특정적으로 설정된 수행의 여부로만 표현된다. 이러한 현대적 인간 노동의 특성은 가용 시간에 대한 보다 세밀한 분절을 가능하게 하며, 체감되는 상대 시간의 분량을 늘리고, 단위 시간에 대한 과도하게 구체적인 감각을 가지게 한다.


자연히 인간의 유희를 목적으로 성립하는 전체 문화 산업, 특히 미디어 컨텐츠의 지향은 남아도는 시간과 에너지의 폭주를 통제하고 소화하고자 하는 수요에 부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은 주로 시간을 형식적으로 세분하여 과잉된 시간의 방대한 분량 자체와 그 경과에 대한 감각을 희박하게 하는 빠른 주의의 전환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틱톡, 유튜브 쇼츠를 위시한 숏 폼 컨텐츠short form contents 플랫폼은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예시이다. 숏 폼 컨텐츠의 의도적으로 제한된 분량과 빠른 리듬을 체현하는 다량의, 과밀하고 불균질한 공급은 사용자의 체감 시간을 그와 같이 (잠재적으로) 무한히 많은 이질적이고 세분화된 경험의 단위로 분절한다. 수십초 이내의 한정된 컨텐츠 분량은 사용자에게 즉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감각적 자극 요소의 단위만을 그 안에서 유일하게 유효한 것으로 남긴다. 즉, 숏 폼 컨텐츠의 개별 요소 단위는 매 순간의 지각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들 하나 하나가 컨텐츠의 체계적 맥락과 단절된 개별적 완결성을 가지게 된다. 반면 충분한 분량을 할애함으로서 구체화 될 수 있고, 전체 맥락의 참조로 부터 개별 요소들이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는 일련의 기호적 대상들은 개별 지각 단위들에 대한 단축적, 분절적 형식의 최적화에 의해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그러한 컨텐츠의 형식은 분절된 순간들 사이의 지연을 압축하고, 컨텐츠의 즉각적이고 저항없는 수용을 가능하게 한다. 화면에 떠오르는 일시적 사태에 대한 경험적 직관의 작용만이, 숏 폼 컨텐츠의 소비에 개입한다. 그 결과 시간은 무의미하게 나열되고 상호 단절된 개별 자극의 연속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한 컨텐츠는 향유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을 이루는 단위들이 자동적, 개별적으로 지각되고 소비될 뿐이다.


한편, 오늘날 미디어 컨텐츠 산업 전반에서 일반화된 사용자 편향적 알고리즘의 기능은 사용자의 선택과 그에 전제되는 숙고, 탐색의 과정 전체를 대행하면서 일방적인 컨텐츠 공급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틱톡, 유튜브 쇼츠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크롤과 매번 새로운 추천 항목을 표시하는 넷플릭스, 유튜브 메인 화면은 사용자의, 그 자신도 온전히 자각하지 못하는 취향에 적응하여 시시각각 그의 주의를 붙들고 인지 자원을 점유한다. 사용자의 누적된 선택에 기반한 그와 같은 점유는 개인과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공유하는 체험만을 제공함으로서 사용자가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의 종류, 경험의 지평 자체를 결정적으로 제약한다.


오늘날 출시되고 있는 게임들, 특히, 모바일 게임들은 대체로 조작 과정을 단순화하다 못해, 자동화하여 사용자가 플레이에 개입할 여지를 전면적으로 제한하는 경향을 가진다. 플레이어 간 기량의 고도화된 수준을 경합하거나 적절한 판단에 잇따른 조작 입력, 대응을 통해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는 따위의 전형적인 게임의 묘미가 배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게임들은 시장에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의 게임들은 플레이의 성패를 오로지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수치적이고 일률적인 위계를 가지는 스펙에 직결시킴으로서, 게임 내적인 기량의 의미와 실체를 그것을 보강하는 데에 지불된 자원의 양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킨다.


누적된 스펙들 간의 반복되는 대조로 구성되는, 자동화된 플레이의 양상은 일련의 경쟁 과정에 대한 적응의 수준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비교 우위의 맹목적 과시 자체만을 유일한 게임적 요소로 수립한다. 과정 내적인 적응 정도를 평가하고 숙련을 요구하며 그 우열을 가리는 체계 자체가 소실됨에 따라 자연히 게이머의 빠르고 정확한 조작의 반영, 정밀한 판단으로 구체화되는 고도의 기능과 그것으로 부터 파생하는 미학은 자리할 곳을 잃는다. 뿐만 아니라, 위계적 지위의 누적을 향한 '개정없는' 반복이 게임의 전체 과정을 이루게 되면서 일체의 게임 경험은 체험하는 주관과 절연된 단순한 절차적 수행 과정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예외없는 절차적 반복, 일방향의 양적 피드백은 일정한 수행 과정을 그 자체의 단일한 도식에 한정시켜 놓음으로서 자기의 안정된 산출 구조를 형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그러한 구조는 잠재적으로 고도화 될 수 있는 구체적 개별 과정에 의거한 게임적 기능들을 배제하고, 각각의 게임적 기능에 대한 적응의 정도, 그 특정한 방식의 정밀하고도 최적화된 수행과 기능들 간의 긴밀한 협응을 일련의 성취와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게임의 개별 요소들에 대응하는 상호 작용으로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하는 요소들의 양상 자체, 또는 그로부터 예증되는 귀결의 하나로 제시되었던 성취 자체도 그리하여, 투입된 요소들의 양, 또는 반복 자체의 누적에 기초해서 표현될 뿐이다. 이처럼 성취, 수행의 양상을 극도로 단순화하고 용이하게 만드는 특징은 (특히, 생계와 직접적으로 무관한) 무언가에 대한 일체의 진정성 있는 몰입과 추구가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태를 반영한다. 현대인들은 더이상 자신의 유희를 위해서도 정념을 바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웹 연재의 형식으로 폭넓게 소비되고 있는 장르 문학(특히, 가장 활발히 생산되고 있는 이세계물)에서는 인물 개인의 입장을 초월한 동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물 개인의 심리적 지향이나 필요로 부터 독립된 자체의 체계적 당위에 기반하는 모종의 이념, 가치의 전제없이 오로지 이해타산과 충동적 욕망에 바탕을 둔 즉물적 추구만이 작품의 유일한 동인으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자체의 상정된 결핍 외에 어떠한 외부적 조건이나 제한 사항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저항이나 우회없이 이행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된다. 즉물화된 욕망은 마찬가지로 즉물화된 충족의 양상을 산출한다. 그것은 자기 외부에 대한 일체의 연관을 단절함으로서, 욕망의 예정된 진행이라는 사태에 대한 도식적인 인식, '유일한' 국면을 구성한다. '사이다'와 '고구마'라는 엄격히 양분된 기준 하에 집행되는 고도로 압축된 기승전결의 형식, 매 국면마다의 폐쇄적인 완결성은 다름 아닌, 과정과 결과 사이의 선형적인 경로를 제시하는 그러한 모티브의 성질에서 예정되는 것이다.


반면, 주체가 자기의 극한을 시험하며 스스로를 소모하고 심지어는 자기 희생을 각오하면서 까지 실현되는 타자, 보편자에 대한 추구를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 맥락에서의 모티브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왜냐하면 자기 소모와 희생이라는 과정이 설정된 목표 자체의 본질로 부터 필연적으로 예증되는 것이 아니고, 의도된 결과를 직접 파생하는 요소들의 상호 작용과 그 경로, 인과 관계에 합치하지도 않으며, 또한 이미 그 자체가 자기의 이익을 훼손하는 파탄적 결과에 해당하는 이상,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추구의 과정은 오로지 그것이 관련한 개개인을 잠재적 수혜자로 대우하고 설정된 목표에 최적화된 수행에만 국소적으로 관련함으로서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게임에서의 재귀적, 반복적 수행이 그러하듯이 전적인 차원에서 합목적적이고 순수하게 이행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당화된 과정의 귀결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 1의 전제로서 제반 윤리를 연역적으로 규정하는, 그래서 모든 종류의 희생을 과정에 수반하는 불가피한 비용으로 정당화하는 궁극적인 목적 의식은 오늘날 하나의 가상적인 가능성으로 조차 모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매체가 소비되는 (탈-주술화한) 현실의 안에서 삶의 근본적인 조건을 규정하는 그러한 질서들은 이미 허구적인 것으로 판정되어 마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웹소설의 극도로 단순화된 묘사의 양상, 단문 위주의 구성은 서사를 구성하는 단계들의 일반적으로 추상화된 국면만을 제시함으로서 그것이 진전되는 서사 과정의 전달이라는 매체로서의 기능에 전적으로 할애될 수 있도록 한다. 개별 텍스트의 단위와 그에 내포된 정보량을 최소화하는 웹소설의 이와 같은 특징은 그것들 각각에 대한 인식 과정의 분량을 축소하고 기호들 사이의 가능한 관계 구성과 의미 범주를 제약함으로서 의미망의 직관적 구상을 용이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자기의 협소한 기표와 그 단면으로 부터 파생하는 미약한 연관 이외에 아무것도 표시할 수 없는, 한정된 의미 범주를 가진 텍스트는 자기 외부에 대한 근본적인 불능성에 의해 기호를 배열하는 체계가 예증하는 선형적 지향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최소화한 서술 양상에 의해 일체의 서사 과정은 사태의 구체적인 양상을 결여한 명시적 나열에 불과한 것이 되고, 사물은 자기의 독립된 인상을 가지지 못하는 채로, 작중 구현된 현실 안에서 공인된 객체로서의 관계 의존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데에 그친다. 픽션 내부의 '역사적' 사실 관계에 한정된 서술은 서사의 구체적인 구성 요소들 자체도 서사의 진행에 관여하는 역학적 요소들 간의 추상적 관계망의 의미로 한정한다. 즉, 서술되는 서사 과정 전체가 아무런 표기 심도를 지니지 않는 그 자체의 역사적, 단계적 진행에 불과한 것이 된다. 따라서 픽션 내부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그것들이 텍스트의 내부에서 지시되는 순간에 있어서만 사태에 관여하는 대상으로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먹방'은 그저 무언가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컨텐츠이다. 단순히 먹는 행위의 전시가 관련한 수요를 창출하고 컨텐츠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육체적 필요가 충족되는 과정의 시각적인, 파생하는 '연출' 자체가 실제 만족의 과정과 사태의 지위 면에서 엄밀히 구분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먹방은 먹는 행위에 수반하는 여러 부담들, 가령, 과도한 포만감이나 식대, 체중 증가를 비롯한 과영양의 징후, 번거로운 과정의 조리, 저작 운동이나 식기의 활용과 같은 실제적인 조작없이도 먹는 행위에서 기대되는 만족의 상상적 충족을 가능하게 한다. 즉, 먹방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도, 그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으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만족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심지어는 이미 음식을 먹고 있으면서도 유사한 형태의 부가적인 만족을 취할 수 있게 한다. 물론 그러한 만족은 어디까지나 실제의 체험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 만큼, 상상적, 상징적인 것에 그치게 되어있다. 그것은 충족의 느낌만을 전달할뿐, 실제의 필요를 충족 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상상적 만족은 감관의 체감되는 한계 효용, 위장의 용량 등에 근거하여 규정되는 실제적 만족의 한도에 구애받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대한 항구적인 충족의 과정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실제의 체험에 대해 나름의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된다. 가령, 규격 외의 대식가가 어지간한 일반인은 소화할 수 없는 수십인분 분량의 음식을 혼자서 먹어치우는 폭식 중계가 먹방의 대세로 자리잡혀 있다는 사실은 과도한 포만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그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고 먹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는 일반의 욕망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그런 대식가의 식사를 보면서, 실제로 그와 같은 대량의 음식물을 섭취하는 일 없이, 그가 느꼈을 것으로 생각되는 쾌락의 전이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먹방은 추구의 대상과 그 수단간의 본질적 연관을 단절함으로서 그것을 충족되는 욕구의 현시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현시되는 충족의 과정, 그 이미지는 오로지 그로부터의 느낌만을 요청하는 수요에 의해 소비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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