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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Dec 17. 2022

범용되는 도덕적, 철학적 전제에 관한 문제

촉법 소년 제도에 대한 논란에 부쳐



최근 몇몇 논쟁적인 소년 범죄 사례가 가십으로 부각되면서 촉법 소년 제도의 폐지 내지는 연령 기준의 하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기존 14세에서 13세로 촉법 소년의 기준 연령이 1년 하향되기도 했다. 촉법 소년 제도에 대한 문제 의식의 요지는 간단하다. 본래 촉법 소년 제도는 향후 성장 과정중에 계도 가능성이 있는 어린 소년범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데, 실질적으로 갱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이들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도리어 악질적인 소년범들에게 처벌의 위험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사실 정말로 최근 소년 범죄가 그러한 제도적 조치를 필요로 할 만큼 심각한 수위로 증가하고 흉포화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통계를 보면 지난 15년간 소년범들에게 선고된 보호 처분의 건 수는 3000~5000건 안팎으로 일정하게 유지되는 추세이고, 촉법 소년범들의 범죄 수위에 대해서는 아예 관련한 통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근래의 추세가 어떤지와는 무관하게 지은 죄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차원에서 (특히 자신의 촉법 소년 지위를 악용하여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들에게 예외없는 엄정한 사법적 대응을 주문할 수는 있다. 범죄자의 나이가 어리다는 사실이, 그들이 지은 죄와 그 영향을 가볍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적지 않은 경우에 있어서, 법에 따른 처벌만이 범죄에 따른 모종의 손해를 보상하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형법이 오로지 교화의 기능에만 종사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침해된 법익에 대한 응보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때, 이런 주장에도 나름의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의미하게 되는 바를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촉법 소년 제도의 의의는 어린 소년범들에 대한 형벌을 면제함으로서 일련의 사법 절차로 인한 (오랜 수형 생활로 인한 사회 적응 문제, '전과자'라는 사회적 낙인을 비롯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성장기의 가능성을 제약하지 않음으로서 향후 그들의 교화를 유도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교육, 계도를 통해 후천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한다. 인간의 타고난, 또는 이른 시기에 형성된 성품, 성향이 추후 어떤 경위를 통해서도 교정되지 못한다면, 그런 전제 하에서는 이런 자비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교정될 수 없는 범죄적 인자를 삶의 이른 단계에서 부터 드러낸 개인을 철저히 사회로 부터 격리해야 할 필요가 성립하게 된다. 말하자면 촉법 소년 제도는 삶의 전체 과정에 있어서 충분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촉법 소년 제도의 폐지 및 완화는 자연히 이러한 믿음을 뒤흔드는 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치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없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매우 희박한 여지만을 가진다는 가정을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정이 제도에 반영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보편화된 도덕적 전제로서 사회적 공인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른 유관한 사안들에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는 공통된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또는 몇 가지의 특정한 사안에 대한 가정에 불과했던 것은 이제 일련의 원칙을 파생하는 사실 인식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이 정립된 인식 틀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들이 그에 맞추어 변화하게 된다. 예컨대 사형 제도, 낙태에 대한 제도적 접근의 변화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특정한 규범적 의미를 가지는 행위들에 대한 재-규정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관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령, 우리는 낙태, 사형과 같은 행위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거나 방임함으로서, 적어도 그와 같은 특정한 형태의 생명, 인격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완성된 인격체로서의 다른 인간들과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죽임을 당해도 상관 없다는 관점을 함양하게 되는 것이다.


촉법 소년 제도의 약화 및 폐지 역시, 잠재적으로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소지가 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제도적 접근의 변화는 어린 소년범들에 대한 형벌 수위, 태도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악한 본성, 내지는 문제적 행동이 사후적으로 교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는 앞서 서술했듯이, 촉법 소년 제도의 기본 전제이다.)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으로 발전할 수 있다. 즉, 어린 소년범들이 근본적으로 교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형법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대우해야 할 필요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런 관점을 비단 소년범들에게만 국한해서 적용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성장 과정 중에 있는 어린 범죄자가 교화될 수 없다면, 이미 다 자라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정립한 성인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관점을 다른 모든 범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시켜, 경우를 가리지 않고 가차없는 엄벌을 집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처럼 인간이 후천적으로 개선될 수 없다고 믿는다면, 형기가 만료된 범죄자들을 사회에 다시 내보내는 일은 다른 선량한 시민들을 공인된 반사회적 분자들에게 노출시켜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강력) 범죄자들은 사형, 가석방 없는 종신형 등의 형태로 예외없이 사회로 부터 영원히 격리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는 일견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범죄자의 사후적인 교화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엄연히 그러한 전제 하에서 정당하게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 가능한 귀결은 아직 논의되고 있지 않다.


범죄자가 법적 계도를 통해 교화되어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불신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전반적인 인간 능력의 개발 및 향상 가능성에 대한 불신이라는 더욱 보편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저 싱가포르의 혹독한 교육 시스템에서 처럼, 일찍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범재들을 양질의 교육, 계층 이동 사다리로 부터 철저히 분리하여 체계적으로 낙오시키는 체제가 정당화 될 수도 있다. 또는 재활의 여지가 없는 빈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어떤 자선 행동, 제도적 도움도 불필요하고 따라서 폐기되어야만 한다고 역설 할 수 있다. 소년 범죄에 대해 예외없는 엄벌을 촉구하고 있는 여론은 과연 이와 같은 본질주의적 사고의 귀결을 예견하고 있는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연쇄적인 추론의 한 극단extreme에 불과하다. 그리고 추론의 연쇄는 그것이 어느 지점에 까지 이어져야 할지 체계 내부적으로 결정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그 자체로 비약의 위험을 내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파격적인 주장도 결국 하나의 단순한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때, 이는 명백한 가능성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능성은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아직 정당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논의되는 개별 사안들과 그 전제들이 서로 쉽게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하게 생각되어서 상이한 전제들에서 도출된 상이한 결론을 서투르게 접목하는, 어설픈 중용의 도가 논의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로는 하나의 관점을 채택하면, 그로부터 유도되는 방법만이 유효하고 사실적인 것이 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공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단은 그것이 기초하는 이론의 내부에서 상정된 특정한 요소들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별도의 이론, 전제들에서 파생된 수단들 간의 접목은 각각의 수단들이 상정하지 않은, 또는 상이한 해석의 내용을 가지는 대상들에 의해서 해소될 수 없는 불화를 초래하게 된다.


요컨대, 실천과 원리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각개의 구체적인 실천은 결국 일군의 원리로 부터 파생되고 정당화되는 것이며, 기실 실천의 구체적인 양상 자체가 원리가 전제하는 지시적 요소들에 의해서 예정되는 것이다. 반대로, 실천을 파생하는 원리 역시도, 그 정신이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실현되지 못한다면 공허한 공론에 그치는 것이다. 즉, 실재가 형식이 지시하는 형상에 따라서 구현되듯이, 형식도 그것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실재에 의해서 구체화 되고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너무나도 자주 혼동되고 심지어는 무시되기 까지 하고 있다. 가령, 공산주의 본연의 이상이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하여, 공산주의의 실패를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지만, 실제로는 공산주의의 실패 자체가 그 본연의 정신으로 부터 유래한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의 일당 독재화는 일체의 생산 수단을 국유화 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행정 권력의 비대화로 부터 예정되는 것이고, 냉전기 내내 문제가 되었던 계획 경제 체제의 만성적인 비효율 또한, 생산 과정의 산물, 인센티브를 생산자로 부터 유리시키는 공산주의적인 인간 소외의 원칙으로 부터 직접 비롯하게 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소련 체제의 타락을 목도하며 혁명이 배반 당했다고 준엄하게 선언하였지만, 실제로 혁명은 배반되지 않았다. '배반당한 혁명'의 양상은 바로 그 트로츠키가 추구하였던 혁명의 본성이었다. 구현되지 못한 이상적인, 아직 공상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온전한 정신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정신은 오로지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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