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ritingonthewall Aug 13. 2022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인생 전반의 퀄리티가 오로지 타고난 유전자와 입에 물고 태어난 수저 색깔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따위의 패배주의적 담론이 유행중이다. 그에 따르면, 연애는 잘생기고 예쁜 외모와 우수한 체형과 같은 이성적 매력을 타고난 '자연적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인간 관계 전반의 수준과 그로부터 얻어지는 주관적 만족감 자체가 타인과의 교류를 용이하게 하는 개인의 생득적인 인간적 자질, 매력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전문직 종사자로 거듭남으로서 얻어지는 사회적 성공의 여부 역시 좋은 환경에서 우수한 두뇌를 물려받고 헌신적인 부모의 지원을 받는 따위의, 개인이 결정할 수 없는 요소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국의 루저들은 자신의 타고난 처지 이상의 것을 갈망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개인은 자신의 주어진 한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차 증대하는 부와 아비투스의 양극화와 그 자체가 세대간에 상속되는 경향은 이러한 설이 전적으로 사실에 합하지는 않더라도 일면의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포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구조가 현상을 정당화하고 자체의 필연적 귀결로서 종속시킨다.
그러한 유전학적 결정론은 일종의 불편한 진실에 대한 직시를 표방한다. 사실은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그것이 사실인 이상, 거스를 수 없는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높은 이상을 추구하여 스스로를 무익하게 소모하지 않도록 경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 '유용한' 체념이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용함'이란 대체 어디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개인이 생물학적, 사회적 구조의 층위에서 결정된 운명에 구속되어 있고 따라서 삶의 진정한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리하여 공인할만한 자질과 재능을 물려받지 못한 다수의 범인 내지는 낙오자들이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시킬 방도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러한 결론으로 부터 단순한 절망 이외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떤 성취도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 봉인된 운명에 짓눌린채, 유일한 선택지로서 주어진 생존만을 이어나가다 죽게 될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과연 이 '불편한' 진실은 어떻게 정서적으로 소화되고 있는 것일까.
사실은 이러한 결정론을 신봉하는 어느 누구도 이 불편한 진실로부터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그 벗어날 수 없다고 가정되는 구조 안에서 더할 나위없는 편안함과 위안마저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그 구조는 관련한 모든 것을 자기의 필연적 귀결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서 구조에 종속되었다고 가정되는 개인에게 일종의 면책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득적인 한계 내에서 무력한 개인은 주어진 운명에 순순히 납득하기만 하면 된다. 주어진 가능성 너머의 쟁취할 수 없는 미덕과 자질을 추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개인의 근본적인 본성에 기반을 둔, 그리하여 교정할 수 없는 결함을 고치려 할 필요도 없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미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 뿐이므로, 그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는 그래서는 안된다고도 할 수 있는데, 거세되지 않은채 끊임없이 좌절되기만 하는 욕망은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인의 삶에는 어떠한 실질적인 변혁도 요청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도 분주해하거나 어떤 열의를 발휘할 필요없이, 다만 소박한 생존 자체에 때마다 주어지는 쾌락에 만족하기만 하면 된다. 구조에 얽매인 개인에게는 그런 태만함이 일종의 불가피한 것으로서 용인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태만함 자체도 개인의 선천적이고 교정할 수 없는 문제로 부터 유래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계에 갇힌 개인에게 그 밖에 다른 선택지가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한편, 개인의 근면함 역시 훈련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없는, 다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자질의 하나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체의 가정되는 운명적인 구속, 극복될 수 없는 불능성에 의해서 개인은 역설적인 구원을 얻는다. 그는 경쟁에서 패배하고 탈락한 게 아니라, 타고난 신체적, 성격적 결함, 불리한 환경, 주위의 적대적인 공동체, 타인 그 모든 요소들을 아우르는 단순한 불운에 의해서 애초부터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설정된 한계에 의해서, 개인은 무력하고 무능력하다 못해 태만한,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서 낙오를 자처한 실패자가 아닌, 그러한 불운의 피해자에 불과하게 된다. 그가 지닌 일체의 결함과 저질러진 모든 실패는 이처럼 개인의 차원에서 극복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종전까지 자신의 실패에 대해 오로지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은 비로소 원망할 수 있는 외부의 대상을 찾아 그것에 전적인 책임을 전가함으로서 자신의 에고ego를 보존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일련의 구조적, 선천적 사유에 기반한 설명이 개인의 무능력을 변호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연애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이성적 매력을 가꾸고 최소한도의 의사소통 능력을 함양하는 데에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부모에게서 못난 외모를 물려받았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스스로도 원치 않고 적성에 맞지도 않는) 3D, 블루칼라, 저숙련 반복 노동 직종을 전전하며 낮은 생활 수준을 누릴 수밖에 없는 건 그의 물질적 성공을 보조할 우수한 두뇌와 재능, 아비투스를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학습에 필요한 지적 자질과 충분한 시간동안 학업에 정진할 (마찬가지로 선천적 재능으로서 주어져야 할) 끈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능적 기예에 대한 재능을 보유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는 어떤 후천적인 훈련에도 불구하고 예술가, 연예인, '유튜버'조차도 될 수 없다.
타고난 자질을 보유하지 못한 범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한 총체의 불능성, 근본적인 부자유를 확인함으로서 개인은 스스로의 삶을 주도하여 앞으로의 행로를 기약없는 정진을 통해 개척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으로 부터 해방되고, 무가치하고 책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로 부터 '해야만 할 것이 없다'는, 또는 그런 게 있더라도 그러한 의무 사항 자체도 어쩔 수 없는 불능적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아나키적 자유 내지는 가치의 공백이 도출된다. 이처럼 와해되는 개인적 가능성의 지평은 개인의 자가적 개발의 정도를 평가하며 그에 관한 압력을 부과하는 사회적 척도의 와해를 함께 의미한다.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비-장애인에게 부과되는 척도가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듯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개인은 이뤄낼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 내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실제로 성취하였는지, 그러지 못했는지의 여부, 정도로 매겨지는 우열의 지표를 적용받지 않는다.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너무나도 늙고 쇠약해져 버린 장기수가 그 마모된 위험성이 참작되어 석방되듯이, 그러한 개인은 구속의 대상인 신변, 물성, 힘에의 의지 자체를 상실하고 종국적인 무력함에 도달함으로서 그로부터 해방된다.
개인적 삶의 성패가 개인의 의지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한 일련의 구조적 억압, 그것들을 규정짓는 운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점은 범인들의 무력함을 불운의 불가피한 결과라는 설명으로 정당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아가 진정한 강자들의 미덕과 자질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치열하게 추구하고 정진한 끝에 쟁취된 것이 아닌, 단순한 행운을 통해 주어진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약자들의 르상티망resentment을 정당화한다. 범인들에게 있어서 이미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성취의 대상은 그 실현될 수 없다는 불능성에 의해 현실 외적인 환상과도 같이 여겨지면서 그 가치를 외면받고, 본래 그 성취를 가능하게 한 개인의 위대한 일면을 반영한다고 생각되었던 개인의 자질은 그의 생득적이고 생후에 길러질 수 없는 유복함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일반의 시기어린 증오를 얻게될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자유와 가능성을 전제로 한 가치 기준을 파괴하고, 현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현실적 차등에 매개되는 우열의 체계, 의미를 해체하고자 하는 자기불구화의 메커니즘이 오늘날 유행하는 패배주의적 담론의 주요한 기반을 이룬다. 과거 개인은 사회로 부터 잠재적인 개발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정련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이와 같이 개인간의 우열을 평가하는 차등적 체계 자체가 전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객관적인 우열의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축소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