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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Feb 08. 2023

재능의 영역

세상 만사에 선천적인 재능이 개입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공부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하다 못해 게임을 하더라도 재능이 있으면 궁극적으로 더 높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고 적은 노력을 투입하면서도 남들보다 좋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다만 재능의 보유 여부가 얼마나, 어떻게 결정적으로 작용하느냐가 관건일텐데, 재능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게 필수불가결 하지는 않은 분야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성패를 결정짓는 데에 재능의 비중이 절대적이어서 재능이 없이는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한계가 명확한 분야가 있을 것이다. 흔히 게으른 천재보다는 성실한 범재가 낫다고들 말하지만, 어쩌면 무언가에 몰입하고 의욕을 발휘하는 것 자체가 재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후천적으로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조차 사실은 타고난 재능의 작용인 것이다.


그러면 이를 어떻게 분간해야 하는가. 무엇이 재능의 소산이며 그렇지 않은지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나. 나는 어떤 기능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과정이 '의식적으로' 통제 할 수 있는 행위의 연속인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파악한다. 어떤 행위의 과정을 개인이 명시적인 형태로 이해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통제 할 수 있다면 그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적어도 부단한 노력과 피드백을 통해 타고난 재능으로 인한 격차를 극복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일련의 기능 과정이 개인의 자각과는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건 재능의 영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능의 구체적인 과정을 의식적으로 통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로 그것의 부정확한, 비효율적인 수행을 의식적으로 교정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기능의 수행을 자동적으로 처리 할 수밖에 없고, 행위함에 있어서 의식적 지각의 내용을 온전히 반영할 수도 없다면 재능이 없이는 그것을 교정하고 개선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기능의 수행은 많은 경우에 있어, 명시적 지식의 형태로 추상화 될 수도, 학습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이론적인 학습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제 수행에 있어서는 개인이 제어 할 수 없는 창발적 방식, 반사적 대응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컨대, 의무 교육 과정 수준의 학습, 단순 반복 노동, 업무의 각 부분마다의 적절한 조치의 방식이 미리 체계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일부 기술직과 같은 일들에는 재능의 영향이 절대적이지도 않고 그것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재능의 보유가 필수적이지도 않다. 즉, 적절한 피드백을 받고 충분히 많은 반복을 통해 숙달하기만 하면 누구나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각 사안에 대한 최적의 조치의 양식이 정해져 있고, 그 가짓수가 방대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 방법론, 그것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기가 용이하고, 문제를 푸는 데에 필요한 공식, 풀이법을 대입하고 공구를 정해진 사용법에 따라 조작하는 등 (관련한 기능에 특별한 이상이 있지 않다면 누구나) 의식적으로 통제 가능한 행위의 연속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들이 말처럼 간단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개인이 전에 없던 방식을 고안해내는 창의성을 발휘하거나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예술적 감각을 발휘할 필요는 많지 않다. 100미터를 십수초 안에 주파하고 수백kg의 덤벨을 어렵지 않게 드는 운동 선수의 그것과 같은 고도의 육체적 능력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다만 일련의 정해진 방식, 절차에 대한 숙련이 요구될 따름이다. 그리고 이는 관련한 재능이 없는 사람도, 충분한 반복, 암기를 통해 얼마든지 익힐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범재들에게 공부 아니면 기술을 배울 것을 사회적으로 권면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용이함에 있다. 시키는 대로 주어진 일을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소위 말하는 '예체능'이 재능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그러한 기예들이 대체로 이론화 될 수 없는 암묵지에 기초해 있을 뿐만 아니라, 명확한 답안이 존재하지 않고, 무엇보다 의식적으로 통제 될 수 없는 과정의 연속을 통해 수행되기 때문이다. 물론 예체능에도 어느정도 기술적인 측면이 있어서, 많은 연습과 공부를 통해 범재도 일정 수준까지는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 가령, 누구나 (학원을 다니든, 인터넷 강좌를 시청하든) 인체 비례, 색채론, 명암론, 화구의 물성 등에 관련한 회화적 지식을 습득하고 꾸준한 습작을 거쳐 그럴 듯한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 화성론과 각종의 음악적 사조를 공부하고 미디를 매만진 끝에 꽤 들어줄 만한 곡을 쓸 수 있다. 작문은 아예 진입 장벽이랄 것이 따로 없다. 펜과 종이, 컴퓨터, 하다 못해 휴대폰 메모장만 있어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많이 쓰고 다듬다보면 봐줄만한 글이 나온다.


하지만 직업 예술인과 아마추어의 경계를 긋는 결정적인 측면은 그러한 반복적, 절차적 숙달로는 형성되지 않는다. 연습, 이론적 지식의 습득은 관련한 기술적 사항과 파악 가능한 구조, 절차를 체화하는 의식적인 수행인 반면, 소설가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고 시인이 독특한 시상, 그리고 그 시상에 정확히 부합하는 표현을 고안해내는 따위의 상상적 원형을 구축하는 표상 작업은 과거 문인들이 '뮤즈의 속삭임'이라 일컬었던, 예술가들 자신조차 통제 할 수 없는 내면적 창발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듣기 좋은 멜로디를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화가가 표상하고 그려내는 이미지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재현 가능한 예술적 기교나 객관적 실체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시인은 그의 시상과 표현을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시인에게 대체 될 수 없는 정당한 것으로 다가올 뿐이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선택 이전의 거부 할 수 없는 충동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은 예술가의 내면에서 불현듯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사후적으로 분석하거나 실현된 표현을 모방하는 것은 가능해도, 표현이 유래한 작가의 내면 세계, 정신 과정 자체를 타인이 내면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설명 될 수 있는 명시적인 방법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의 고유한 작품 세계, 창발의 기반을 만드는 것 또한 의식적인 노력의 귀결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술적 창발의 기반이 되는 개인의 정신적 구조, 사고 흐름의 양상은 어떤 지향점을 향해 의도된 조작으로서가 아닌, 개인의 총체적 삶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은 우리에게 전적인 형태로 주어져 있지 않다.


운동 선수, 프로게이머의 퍼포먼스도 같은 이유에서, 타고난 재능의 기여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밀리초 단위로 화면 안의 여러 요소들을 순식간에 읽어내어 판단을 내리고 즉각 필요한 조작을 입력하는 프로게이머의 '기본 소양'은 단순히 많이 연습한다고 길러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cvMAX 김대호 감독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피지컬(메커닉)의 영역이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봐야 들짐승, 곤충의 기민함을 따라잡을 수 없듯이, 타고난 종자 자체가 범인들과는 다른 것이다. 당연히 이는 의식적으로 노력한 끝에 얻어진 산물이 아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게임을 잘했기 때문에, 랭크 시스템의 밑바닥을 기는 대다수 평범한 유저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운동 선수의 초인적인 스트렝스와 기민함, 자신이 플레이하는 종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이해와 같은 요소들도 마찬가지로, 선수들 개개인이 타고난 재능에 결정적으로 기초한다. 인테리어 라인맨 자리에서 자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라인맨들의 더블팀 블락을 찢고 돌파해내는 애런 도날드의 힘과 순발력은 말 그대로 애런 도날드만의 전유물이다. 평범한 재능을 가진 선수가 그의 훈련 프로그램을 똑같이 소화한다고 한다면(그게 가능할지는 둘째치고) 과연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의 능력이 그렇게 간단히 모방 가능한 것이었다면, 애런 도날드라는 선수가 지금처럼 특별한 선수로 취급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릿 콜, 제이콥 디그롬 같은 투수들이 던지는 강속구는 본디 그와 같은 강한 어깨, 단단하고 거대한 체구를 타고난 이들만이 던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생득적 강인함은 물론 저절로 이룩되는 것이지, 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심지어, 야구에서 투수에 맞서는 타자의 스윙은 투수의 피칭에 대해 단순히 대응하여 완전히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자는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는 공에 대해 의식적인 분석을 하면서 배트를 휘두르지는 않는다. 그때 타자의 신체를 지배하는 건 타구를 가능한 한 빠르고 멀리 내보내기 위해 매 투구마다의 구질에 있어서, 적합한 방식을 즉각 도출해내고 근본적으로 불수의한 신체의 각부를 조율하는 본능적인 감각이다. 또한 니콜라 요키치의 플레이를 백날 연구해도 (종목을 불문하고 그와 같은 특급 선수들의 플레이는 다른 모든 구단, 선수들의 연구 주제다.) 아무나 그의 농구 도사적 면모를 모방하거나 파훼할 수는 없다. 요키치와 같은 영리한 선수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봐야 또 다른 준비되지 않은 예외 상황에 대한 문제가 불거질 뿐이다. 즉, 플레이에 대한 사후적 분석이 이미 벌어진 일들에 국한된 것인데 반해, 요키치는 그때마다 가능한 플레이를 즉흥적으로 실현할 뿐이다.


어떤 과업에 대해 몰입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능력(이걸 능력이라 할 수 있다면)은 과연 재능의 영역일까. 개인의 노력 부족, 의지 박약도 타고난 재능, 유전의 문제라는 주장이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는 꽤 주류적인 의견으로 각광받고 있는데, 나는 그게 상당부분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기의 흥미, 관심 분야를 주체적으로 설정하고 의지를 발휘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좋아하기로 마음먹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노력하기로 마음 먹는다고 노력이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흥미와 의지의 방향성을 원하는 대로 편성하지 못한다. 어떤 주제, 분야에 강렬한 흥미를 느끼고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열성은 의도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개인이 통제 할 수 없는 우연적 충동의 하나이다. 그래서 아무런 경제적, 실질적인 보상이 걸려있지 않는데도 무언가에 몰두하고 계속 결과물을 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걸려 있는데도 아무런 노력도 안하고 한량처럼 살기를 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즉, 개인의 의욕은 자아가 주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외부로 부터 쉽게 주입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간접적으로 조장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개개인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우연적 산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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