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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Feb 20. 2023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를 얻는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삶에 대한 애착은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단 한번밖에 주어져 있지 않다는 자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비록 지금의 삶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삶을 살 수는 없으리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산다. 그러나 삶이 주어진 숙명으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삶은 (양상적으로 취약한)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거나 언제나 더 나은 형태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해 항시 어떤 결핍을 전제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고 상상해 볼 수 있다면, 지금 실현된 삶은 그 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한없이 미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나간, 되돌릴 수 없는 삶의 순간들, 실현되지 못한 무수한 가능성에 대한 의식 속에서 우리의 삶은 사소한 선택과 우연이 누적된 끝에 산출된 것에 불과하게 된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허무주의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주인공, 두 모녀는 모든 가능 세계possible universe를 탐색한 끝에 자신들 삶에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실현해 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삶은 고유하고 불가피한 것으로서의 광채를 잃는다.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는 선택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번의 선택으로서 귀결되는 삶 자체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때와 장소의 제약없이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힘들여 이룩한 성취의 결실도 아니고, 잠재적인 변동 사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중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서 자기와 연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둘은 결국 돌이 되어 세상으로 부터 거리를 두고 관망하기를 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잠식하는 고통스러운 허무를 덜어내지는 못한다. 돌이 되어서도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다른 가능 세계를 넘나든다. 삶을 한없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드는 무수한 가능성을 외면하지 못한다. 요컨대, 돌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돌이 되기를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다는 사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영화는 이에 대해 뻔하지만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의 삶이 수없이 분화된 가능 세계의 한 갈래에 불과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나간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보다 나은 형태의 삶을 이룩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바로 지금의 삶을 다만 불가피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 주어진 것으로 될때, 삶은 비로소 실현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들의 잔해가 아닌, 우리가 우리 자신이 기초하고 구성되는 장소로서 자신을 긴밀히 연관 지을 수 있는 유일하고 객관적인 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 앞에 어떤 길이 놓여있을지 알지 못하는 채로 선택을 한다. 심지어는 우리의 선택 자체가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과는 무관하게, 다만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서 강요된 경우도 적지 않다. 또한 우리가 스스로 어느 누군가의 강권이나 상황에 구애받는 일 없이 자발적인 선택을 내렸다고 믿어지는 경우에도, 사실은 그러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한 개인적 성향이나 전제된 상황의 제약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전제 사항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선택으로 초래된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 삶은 우리 자신의 자발적인 선택 내지는 실현된 가능성들의 연속체라기 보다는 차라리 운명적으로 예시된 산물에 가까운 것이다.


영화가 '가족'이라는 테마를 다루는 방식도 이와 같은 필연성을 암시한다. 영화는 이혼을 준비중인 부부와 모녀 사이의 갈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는데, 각기 다른 양상의 현실을 넘나들고 하나의 현실에 다른 여러 세계의 가능성이 중첩하는, 일체의 가능 세계가 통섭하는 과정 안에서 위기에 처한 관계는 역설적이면서도 필연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어진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어, 다른 모든 것이 변화하면서도, 어느 시점에는 그들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는 하나의 진실만큼은 이미 전제된 현실로서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모녀는 여러 가능 세계들 사이를 자유로이 도약하게끔 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활용해서 얼마든지 그러한 현실로 부터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적어도 어느 하나의 현실 안에서는 부모와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실제의 가족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가 어떤 자식을 가질지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식도 자기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지를 선택할 수는 없다. 어떤 자식과 부모도 자기가 원하는 최선의 가족을 가질 수는 없다. 때문에 가족 관계는 누구에게나 최초의, 긴밀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불화의 위험을 내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리 선택할 수도 (따라서) 철회할 수도 없는 우연적인 필연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이미 성립한 가족은 결코 이전처럼 없던 것이 되지는 못한다.


일체의 가능성은 그것들을 파생하고 그것들에 대한 대자적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최초의' 지각된 현실에 대해서 의존적이다. 다시 말해, 일체의 가능성은 그것들을 대조적 현실로서 가정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에 비해 어떠한 차등적 우위를 획득하지 못한채 매몰된 삶은 가능성들에 선행하는 최초의 즉자적 현실로서의 지위를 복권받는다. 두 모녀가 여러 이질적인 가능성들의 양상을 체현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그들 자신이게끔 하는 특질-곧 자신의 얼굴과 자기 주변의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는 의식-을 유지한다는 점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즉,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변화, 파생되는 가능성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기정된 현실만은 변동되지 않는채 남게 되는 것이다. 허무의 베이글 구멍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려는 딸을 붙잡고, "나는 너의 엄마다.i'm your mother"라고 외치는 어머니의 모습도 그렇다. 이때 그녀는 자기의 딸과 혈연 관계가 아닐 수도 있었던 수많은 대안적 현실의 상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처음 비롯한 단 하나의 즉자적 현실에 입각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결국 자기 삶의 모든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각자의 능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지금의 삶에, 다른 가능 세계 속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함양한 또 다른 자신이 아닌, 본연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머물기로 한다.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한 (거의) 전적인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그러한 권한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마찬가지로) 전적인 자기 경영에 대한 의무감으로 부터도 해방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근본적으로 타성적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불완전함에 대해서 과도한 비탄을 느낄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우리의 잘못은 아닐 테니까. 이러한 결말은 일견 퇴행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의 주관과 의도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 뿐이고, 외부의 미완적 가능성들은 이미 결정된 현실에 대해 반성적인 인식을 거쳐 후행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함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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