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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Mar 12. 2023

그러거나 말거나

의미 과급의 문제, 만들어지는 문제들

얼마전 3.1절에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게양한 한 가정이 거의 국민적 공분의 대상으로 등극했다. 다른 날도 아닌 독립 운동 기념일에 과거 식민 통치국의 상징물을 전시한 그 진의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이기에는 충분한 신호였다. 사람들이 항의하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갔고, 언론사의 취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밖에 수많은 부외자들이 국경일에 일본 국기를 내건 매국노를 비난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논란의 당사자들은 '오피니언 리더'로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한 입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문제 행동' 또한 한국 사회에 만연한 어떤 지배적인 병폐의 증상이라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장례식장에서 인터넷 방송을 송출하는 것과 같이, 특정한 문화적 코드로 부터 의도적으로 이탈해 보임으로서 자기를 과시하는, 개인의 낮은 사회 적응도, 반-사회성을 반영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어디에나 어떻게든 있을 수 밖에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탈 내지는 단순한 트롤링trolling에 불과한 행동이 전 국민적 관심사이자 '국까 일뽕'을 토벌하는 내셔널리즘적 어젠다로 등극했고, 고작 남의 집 창문에 걸린 깃발 하나를 내리게 하기 위해 대대적인 대중 분노가 조장되었다.


3.1절에 걸린 일장기는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질적인 신호이자, 사건을 둘러싼 맥락에 비추어 문제삼을 수 있는 상징적 도발이었기 때문에 만인의 관심사로 설정 되었으며, 사람들이 '친일파', '내부의 적들'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부정적 전형성(비겁한 성정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자국에서 실패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자국을 증오하고 타국을 동경한다는 따위의)에 부합했기 때문에 '공공의 적'으로서 그에 반발하는 대중에 '상식인'으로서의 지위, 자기효능감을 간단히 제공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3.1절에 내걸린 일장기는 사회적 맥락에 위배되는 자기의 어떤 전형적 취약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관여할 수 있는 주제이자 각자가 생각하는 자의적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계기로서, 그 실질적인 위중함에 비해 과대한 사회적 함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수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악을 끼칠 위험이 있어서라기 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사실상 동일한 견해를 공유하고 또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 의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 빈발하다가 금방 없던 일처럼 잊혀지곤 하는 여타의 주변적 헤프닝들과 같은 운명을 따를 수도 있었다. 비록 그것이 3.1절, 국경일, 더 나아가 한국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표상하는 문화적 금기를 의도적으로 침범하는 사태라 해도 그렇다. 왜냐하면 아무리 몰상식하고 반-사회적인 류의 것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누군가의 개인적인 충동을 모두 저지할 수는 없을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오로지 상징적인 차원에 있어서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본과의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 문제에 결부시켜 생각하지만, 기실 남의 집 창문에 걸린 일장기를 내리게 하는 일 따위는 일본과 관련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조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내거는 일이 상징적인 도발에 그치는 것인 만큼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위로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매국노를 사적으로 단죄할 수 있음에 위안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에 대해서 아무런 실질적인 강권을 가할 수 없고 그래서 이와 같은 상징적인 제스쳐만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어떤 무력함을 확인하는 의식에 그치게 될 따름이다. 무엇보다 어떤 식으로든 일어나게 되어 있고 일일이 교정할 수도 없는 일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분노에는 뚜렷한 효용이나 목적 의식이 없다. 물론 분노를 비롯한 일체의 감상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도 억누르기 어려운 것이지만, 단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분노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노란 훼손된 정당성에 대한 반응이자 그것을 수복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분노는 아무런 계기없이 자동적으로 표현될 뿐인, 한없이 가벼운 것이 되고만다.


인터넷이 개인 휴대 기기 단위로까지 널리 보급되어 누구나 공적인 발언을 할 수 있게 되고, 수많은 타인들과의 정서적 감응이 전에 없이 용이하게 되면서 이렇듯 과민한 대중적 공분은 점점 더 흔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조금 더 이전에는 야외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부수는 사람을 일종의 사이코패스, 사회 부적응자라 비난하는 쪽과 한낱 눈사람일 뿐이니 부숴도 상관없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쪽 사이의 논쟁이 있기도 했다. 이전까지 수없이 부숴졌고 부숴지는지도 알 수 없었던 눈사람들은 다만 그러한 사태를 일련의 사건으로 파악하는 인지적 결단에 의해 공공의 감상과 밀접하게 결부된 문제적인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눈사람을 해빙기가 올때까지 한시적으로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일종의 공공 기물로 취급하고자 했고, 눈사람을 부수는 일을 만든 사람의 성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공감 능력 결핍의 징후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눈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눈사람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여러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동기(아마도 단순한 재미)에 의해 파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눈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여론이 오히려 남들의 기분을 망침으로서 쾌락을 추구하는 이들의 악의적 충동을 자극했다. 기본적으로 눈사람을 부수는 일은 위법이 아니었고, 설령 위법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그것을 단속할 수단이 없었으며, 따라서 눈사람 파괴를 적법하게 제지할 수단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문제가 고안되었지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문제라 생각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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