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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Jan 20. 2023

'누칼협'에 대한 고찰


'누칼협'이라는 말이 한동안 인터넷 상에서 화두였다. 이는 "누가 칼들고 협박함?"의 준말로, 누가 칼들고 협박해가면서 강권하지 않았으니, 자기가 선택해서 한 일이 잘못 되었으면 스스로가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정신 온전한 성인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정설에 기초한 덕분에 온갖 곳에 이 말이 쓰였다. 주식,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서 거액의 빚을 지게 되어도 자기가 선택해서 투자한 것이니 '누칼협'이고, 소위 말하는 X소 기업에 들어가 푸대접을 받거나,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최저 시급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아도 누가 칼들고 강요해서 들어간 것은 아니니, '누칼협'이었다. 게임사의 방만한 운영으로 (많은 경우에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거액의 현금과 많은 시간을 투자한) 유저들이 모멸감을 느끼거나 피해를 봐도 누가 그 게임 하라고 등 떠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누칼협'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누칼협'이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코인 같은 근거가 불확실한 자산에 감당할 수 없는 액수의 빚을 끌여들여 투자했다가 망했거나 능력도 안되면서 외제차 몰고 싶다는 허영심에 중고 외제차 할부금으로 버는 돈의 반 이상을 가져다 바치면서 근근 연명하는 카푸어들 같은 경우에는 그 위험을 모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가 자초한 일이니, '누칼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경우에 있어서, '누칼협'은 정당한 불만의 표출을 봉쇄하고 체제와 현상을 그 자체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에 따르면, 누가 칼들고 협박하지 않았으니까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내 책임이려니 자책하면서 닥치고만 있어야 한다.


'누칼협'의 기본 전제는 각자의 선택이 온전한 자기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며, 따라서 그 위험, 예견되는 손실 및 디메리트를 미리 예측하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가 자신 밖에는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개인의 선택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기실 누구나 각자가 처한 상황, 환경, 외부 정세의 변화, 한정된 정보, 자신의 인지적 편향 같은 통제 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선택의 가능성을 제약 받는다. 예를 들어, 형편없는 중소 기업에 입사하거나 3D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다수는 자기가 원해서 그 직장을 선택했다기 보다 현실적으로 남은 선택지가 그것밖에 남지 않아서, 심지어는 여건상 애당초 다른 선택지가 주어져 있지 않아서 상황의 압력에 의해 떠밀려간 경우이다. 열악한 근무 조건 하에서 적은 봉급을 받으며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그 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뿐이다. 그것은 미리 자신의 미래를 충분히 설계하고 준비하지 않은 개인의 태만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구조적 불평등이 관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물질적으로도 훌륭히 대우받는 직업의 대다수는 높은 학력이나 오랜 기간동안의 숙련, 학습을 조건으로 요구하는 반면, 그러한 기회에 대한 접근은 실질적으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지 않다. 누군가는 비싼 학비를 감당해 줄 만큼, 아무 소득도 기약도 없는 수험 생활을 인내해줄 만큼 여유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기의 능력과 가능성을 개발할 기회를 부득이하게 제한 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거부 할 수 없는 선택의 예시는 무수히 많다. 이제 막 대학교에 진학하는 수험생들의 다수가 전기, 화학, 기계, 컴퓨터 공학 같은 전공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기의 주관적 흥미나 적성을 고려해서가 아닌, 졸업 후의 취업을 조금이나마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기 위해서다. 모든 가용한 자산과 신용을 총동원하여 부동산을 매입하는 이른바 '영끌' 매매가 누군가에게는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자산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등하면서 '지금 아니면 앞으로는 살 수 없다'는 암묵적인 기대가 형성된 상황 속에서는 개인이 그처럼 무모한 투자의 유혹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한낱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게임 아이템, 캐릭터를 왜 수백, 수천만원씩 진짜 돈을 부어가면서 얻으려고 할까. 일단 그 게임을 하면서 그 내부의 경쟁의 장에 참여하는 이상, 그러지 않으면 게임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에 '누가 칼들고 협박'해가면서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개인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 선택의 당위를 거스를 수가 없다. 이처럼 통제 할 수 없는 상황의 압력은 '누가 칼들고 하는 협박'만큼이나 개인에게 큰 위압으로 다가올 수 있다.


설령 개인의 선택이 완전히 자발적이고 통제 가능한 형태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더라도, 개인이 그 결과와 관련한 위험을 모두 예측 할 수는 없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한 예측도 머지 않아 한계를 드러낸다. 그게 가능했다면 '누칼협'이라는 말이 나올 수도 없었다. 명백한 위험이 자신에게 닥칠 것을 알고도 자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어떤 어리석은 선택에도 그 나름의 이유는 있다. 인간은 생각보다 매우 비합리적인 생물이라서 자주 자기에게 닥칠 위험을 예측하지 못하거나 과소 평가한다. 그리고 착시를 유발하는 그림의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착시가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은 인지적 편향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쉽게 거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마장, 카지노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도박 중독자들이 도박은 하우스가 이기는 게임house always wins이라는 걸 모르고 가겠는가. 알면서도 자기만은 따고 나올 수 있다는 낙관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2008년 세계 경제의 대침체를 유발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수입도 자산도 없는 신용 불량자들의 모기지 채권을 모아 만든 파생 상품을 매개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자산 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발발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무신용자들의 채권을 모아 만든 파생 상품을 고-수익, 저-리스크의 안전 상품으로 간주했던 당대 은행가들의 생각이 너무나도 명백히 무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게 금융계의 상식이었다. 자산, 소득 증명이 되지 않은 무신용자 대출일지언정, 자기가 사는 집이 저당잡힌 이상, 못갚겠다고 배를 째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또 사실상 아무런 제한이 없는 모기지 대출로 자산 시장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공급되면서 주택 가격이 계속 올랐으니, 설령 모기지 대출을 못갚는 사람이 나와도 저당 잡은 집을 청산해서 얼마든지 손실을 메울 수 있었다. 이런 선순환이 깨지려면, 대다수의 모기지 채권에서 부도가 나야 하는데, 이는 미국 주택 시장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누구도 그걸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한동안 부동산, 코인 '영끌' 투자로 수십억을 번 사람들을 부러워 하거나 질투하는 시선이 있었지만, 지금 그 사람들 대부분은 지난 몇달새 폭등한 고금리에 폭락해서 팔지도 못하는 자산 껴안고 신음하고 있다.


지나고 보면 모든 실패의 원인은 명확해 보인다. 그래서 다들 그럴 줄 알았다고 '누칼협'을 외친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뻔히 망조가 든 일에 뛰어 들었으니 망한 건 네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실패의 원인이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것이라면 개나 소나 다 대침체때 <빅쇼트>의 주인공 마이클 버리처럼 다른 모두가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을 때 숏 포지션에 올인해서 억만장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야수의 심장'은 많지 않다. 지금에 와서 '누칼협' 떠드는 사람치고 미리 모든 징조를 파악하고 올인해서 인생 역전을 이뤄낸 그런 야수의 심장은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누칼협' 떠들면서 영끌족 욕하는 사람들 치고, 정작 영끌족들 잘 나가던 시절에 그 신묘한 통찰력으로 미리 종말의 예언을 고하던 사람은 하나도 없다. 헤겔이 말했던 것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편다. 한번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고 나면, 그건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사실, 이미 공표된 시대 정신이 된다. '누칼협'이 표상하는 냉소는 그런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사후의 판별만을 무기로 삼는다는 지점에서 공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면의 확신없고 위축된 자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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