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사실 그렇게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동성애자들의 생태와 언어, 그들만의 폐쇄적인 공동체 문화까지 상세히 조사해가면서 동성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주지되다시피, 인간의 통상적인 혐오 반응은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써가 아니라, 외면으로 나타난다. 벌레를 싫어하는데 굳이 곤충 사진을 찾아보는 사람은 없다. 일본 아니메, 오타쿠 문화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봇치 더 락, 체인소맨이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을 리는 없다. 그러나 호모포비아들은 정반대로, 동성애자들의 문화와 관습에 보통 이상의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들과 자신을 면밀히 대조하면서 스스로의 '정상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정말 호모포비아들이 주장하는대로, '호모'들과 자신이 서로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근원적인 차이를 가진 존재라면, 이러한 대조는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고, 설령 가능하다해도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호모포비아들은 동성애가 남녀 사이의 결합만을 허용하는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일종의 돌연변이에 가까운 존재임을 역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성애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이 제도적,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순간, 사회 전체를 오염시킬지도 모른다는 이중적인 위기 의식을 표출하기도 한다. 즉, 호모포비아들은 이성애가 우주적 표준의 사랑 형태라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그 표준이 순전히 임시적, 조건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실로 이성애가 우주적 섭리에 의해 정당화된, 유일하게 가능한 사랑의 형태이고, 동성애는 단지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에 불과할 뿐이라면, (적어도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들이 걱정하는 동성애의 '창궐'은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반-동성애 운동가의 다수가 이른바 전환 치료를 통해 자신의 성적 지향을 교정했다고 하는 전직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러한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동성애에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스스로 열렬하게 반-동성애자임을 자처하는 것은 그 주제를 다른 누구보다 자신과 깊이 결부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안의 동성애적 성향을 느끼고, 그것이 사회의 어떤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자기의 일면을 혐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사회 정의'를 설파하며, 타인의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다수는 사회와 타인의 본성에 관한 특유의 왜곡된 관점을 내세우는 것으로 악명높다. 그 내용인 즉, 사회의 보편 다수가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받아들이는 관습, 문화들이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착취하는 체계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심지어는 그것이 체제의 본질적인 기능이며, 이에 관여하는 개개인들 모두가 그 직간접적인 공범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그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굉장히 높은 기준을 고수하는 도덕적 결벽주의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실상 그들이 타인을 착취와 차별의 공범, 방관자, '잠재적 가해자'로 보게 되는 것은 그가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 타인을 바라보고 타인이 자신과 유사한 충동과 성향을 가졌으리라고 -무의식적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도덕적 금제는 그러한 억압의 필요가 요청될만큼 거부하기 어려운 충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금제는 불필요하다. 누구도 자진해서 하지 않을 일을 규제하는 건 무의미하다. 종교적, 생명 윤리적 이유로 시행되는 금육의 계율은 고기가 맛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성에 대한 엄숙주의 역시, 그 쾌락이 중독적이기 때문에 존재한다.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는 그러한 담론을 공론화하기를 거부하는 사회적 터부에도 불구하고 적은 인지 자원의 투입만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완결적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 부응하기에 계속해서 살아남고 있다. 즉, 이러한 도덕적 금제 조치 자체가 그 대상들마다 나름의 추구할만한 편익이 있고, 지극히 유혹적이며, 그것들을 억누르는 일이 간단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올바름'의 투사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 완고해 보이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리 완고한 인간이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 사실은 그들 또한 남들과 같이 '금지'를 넘어서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리고 있음을 자인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세워지는 '금지'는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이 타인, 사회의 불의를 비난하고 자기의 옳음을 강변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안의 불의를 의식하고 그것을 외부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가 부덕하기 때문에 남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금기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확신에 찬듯이 스스로의 옳음을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저 그렇게 단언함으로써 모든 의심과 번민이 끝나기를, 자신이 옳게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