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자의 지옥 - 1
통합과 커뮤니케이션으로 야기된 분열의 역설, 사용자 편향적 알고리즘
오늘날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공통의 인식, 지배적인 메가 트렌드의 영향은 점차 소실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겉으로 관찰되는 다양성의 증가만큼, 타자에 대한 관용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시민 사회의 파편화를 의미한다. 오늘날 담론은 '각자의 진실'에 기반하여 전개되며, 소득계층, 성별, 세대, 그 밖의 어떤 특정한, 복합적인 인자들로 구분되는 코호트마다 별도의 유행이 향유된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견해의 차이 이전에, 논쟁의 기초가 될 사실에 대한 합의의 차이가 발생하고, 유명인은 실로 모두에게 유명하지는 않다. 정권의 반대자에게는 명약관화하게 여겨지는 정권의 실패, 즉, 부동산 시장 과열, 내수, 노동 시장의 낙후화, 정권 주요 인사들의 비리와 같은 사법적 판단이나 통계 자료를 통해 밝혀지는 사항들이, 정권의 지지자들에게는 반대자들에 의한 부당한 음해, 정치 공작의 일환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사실의 여부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 유명 아이돌 가수, 수백만 구독자를 거느리는 유튜버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스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공통의 생각과 관점, 관념을 잃어가고 있으며, 보편의 언어의 기반이 와해되고 있음에 따라, 서로에 대한 이해와 타협의 여지 또한 축소되는 중에 있다. 타자란 질병같은 것, 또는 짐승이나 벌레와 같이 근본적으로 불가해하고 미친한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유별난 게 아니다. 상대를 몰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몰살당해야만 하는, 상호 확증 파괴에의 목표, 그것이 오늘날의 시대 정신이다.
과거의 단절과 분열은 주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를 가로막는 산과 바다, 빙하, 사막과 같은, 극복하기 어려운 지리적 장해에 의해, 즉, 상호간의 교류를 저해하는 장애물들에 의해 초래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다자간의 무제한적 교류와 통합을 잠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가상 세계의 장sphere이 그러한 장애물로서의 역설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폭넓은 관용과 수용, 한도없는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탄생한 인터넷은 오늘날 도리어 동일자들의 지옥이 되었다. 실로 인터넷 공간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여러 조밀한 군집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인터넷이라는 공간 자체는 방대하고 양적으로 풍족하며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의 어디에서나 자신과 닮은 일부를 발견해낼 수 있으며, 손쉬운 자기 강화self-reinforcement를 이룩할 수 있다. 온갖 종류의 정보와 지식이 범람하는 인터넷이라는 이름의 대양은 오랫동안 검증된 끝에 거의 확고함이 확인된 사실, 또는 현재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라 잠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설에 기반하는 정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현혹적인 독단과 억견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와 논증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그 최초의 창안자로 하여금 간단히, 유통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어떠한 정보도 있을 수 있으며, 일체 저자의 자격을 요구하지 않고 정보의 형성과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 공간의 무제한적 특성은 언제나 개인에게 '필요한' 정보만이 아닌, 그 자신이 '원하는' 정보, 즉, 스스로의 성향과 기정된 결론에 합치하는 정보를 탐색하고 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가능성, 어디에서나, 반드시, 자신의 '옳음'과 옳음을 확인 시켜줄 증인들을 찾을 수 있고, 정당한 비판에 직면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달가워하지 않고 동질성의 체감에서 위안을 얻는 인간 본성을 이유로 해서, 그러한 류의 탐색에 개인의 선호를 쉽게 고착시킨다. 각 개인의 자폐를 유도하고 그것을 높은 빈도로 초래한다.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어디에나 편재omnipresence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개인은 자신이 이미 확신하고 있는 바, 그리하여 이미 자신의 일부를 이루는 것에 대해서 몰두하게 된다. 결국, 탐색과 교류는 그 본래적 의미로서의 외부에 대한 요청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과 같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때 그가 구하고 교류를 청하는 외부의 대상들이란, 기실 그의 외부에 근거하고 그 자신과 차별화되는 타자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것은 단지 그의 바깥에 있는 자신의 일부, 확장된 자아에 불과하다. 확장된, 억지로 잡아늘려 신장伸長된 자아에 대한 교감, 교류의 시도는 자기자신에 대한 애무와도 같은, 나르시시즘적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자기 자신과 구분되지 않는 거짓 상호에 대한 의사pseudo적 교류,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어루만짐이 충분히 거듭되고, 가상의 타자에 대한 감촉이 누적되면, 그것은 '하나로서의 전체', '일자뿐인 세계'라 이름붙일 수 있는 거대한 착오로 발전하게 된다. 불쾌한 이물감을 오래도록 느끼지 못한 개인은 더이상 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되고, 그 자신도 본질적으로 동질화되고 몰개성화하게 된다. 다른 것과 부딫치고 상호 작용하기를 가능하게 하는 그 자신의 물질적 연장extension과 고유한 물성을 잃게 된다. 예컨대 오늘날 특정한 어젠다의 대표자, 이념의 신봉자들의 집단으로서 일련의 '개인화'를 이룩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양상을 보라, 각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서로를, 자신을 그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이름으로 일컬으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분란, 논쟁들은, 의견을 나누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곳의 고유하고 단일한 특성을 유지키 위한 일종의 면역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은 그렇게 하여, 자기의 일부가 아닌 외부의 것을 인정하지 않고 몰아낼 뿐이다.
사용자 편향적인 알고리즘의 작용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 사용자 편향적인 알고리즘은 오늘날 인터넷 공간의 거의 모든 상호 작용에서 적용되며, 그것은 이전에 누적된 여러 선택들에 기반한 결과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알고리즘은 이전에 우리가 선택했던 것,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는 원해왔던 것을 다시 선택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원해왔던 것을 계속 원하게 만든다. 사용자의 관심사에 근거하여 그의 주의를 집중시킬만한 광고를 보여주고, 검색 결과를 추려내면서, 사용자의 웹 경험을 개인 친화적으로, 그에 대해 동질의 것들로,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그에 따라, 각 사용자에게, 외부에 대한 요청, 접촉으로서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탐색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것이 된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알고리즘으로 최적화된 탐색과 경험은 이미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선택임과 동시에, 사전에 누적된 데이터에 의해 운명론적으로 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웹 경험의 중대한 한 측면은 이미 우리의 선택지를 벗어나 있다. 알고리즘 작동의 기반이 될 데이터의 누적은 개개인의 환경, 기기에 분산적으로 축적되지 않고, 웹, 소설 네크워크 서비스의 제공자들에 의한 중앙 집권적 집계를 거쳐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계속 '원해야만' 한다.
사용자 편향적인 알고리즘의 최적화에 의해, 개인은 그것이 작동하는 어디에서든 자신에 관한 것만을 보게 되며, 타자에 대한 이해와 체감의 기회를 '근본적으로' 박탈 당한다. 개인은 어디에서나 자신의 일부를 내포하는 것을 보게 되고, 이전의 누적된 선택들에 의해 감각을 가로 막힌다. 웹 세계의 개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것에 의해 고립된다. 사용자에 최적화된, 그에게 최적, 최선의 것을 보여줄 것을 약속하는 반투명의 얇은 가림막을 둘러만든 방 안에서 유폐되었다는 지각없이 유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