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자의 지옥 - 2

구독, 차단에 관하여

by Writingonthewall

인터넷 경험의 사용자 편향적 재조정은 물론 사용자 자신의 손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그러한 자발적 개인화, 재조정은 주로 팔로우, 구독, 블랙리스트 또는 차단block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웹 시스템 기능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

구독subscibe, 팔로우follow는 특정 개인, 컨텐츠 생산자의 발화 및 컨텐츠를 사용자가 선택적으로 수령하고 열람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어떤 정보를 취하기 위해, 매번의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통상의 검색, 탐색과는 구분된다. 인터넷 환경에서의 탐색, 검색이 사용자에게 특정한 주제의 선정, 검색 엔진에의 입력, 이후 출력되는 결과물을 취사取捨하는 일련의 계속적인 선택의 과정을 요구하는 한편, 팔로워, 구독자의 선택은 각 개인, 컨텐츠 생산자에 대해 그것이 최초로 체결되는 순간에만 한정된다. 그 직후에는 무한히 유예되거나 미리 결정되는(그렇게 간주되는) 판단에 따라, 컨텐츠의 자동적인 공급이 이루어질 뿐이다. 다시 말해, 최초의 동의가 표명된 이래로 컨텐츠는 무비판적으로, 사용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보다 정확하게는 주체의 결정이 관여할 여지없이 그저 주어지고 보여지게 된다.


즉, 구독, 팔로우는 단순히 일정한 욕구와 필요에 따른 소비의 요청에 그치지 않는다. 구독, 팔로우를 통해 공급되는 컨텐츠들은 피드, 타임라인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통해 표현되는 각 개인의 인지 역량, 자원에 대해 일정한 독점적 지분을 요구하고 점유하게 된다. 그리하여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피드의 내용물이 (그러한 플랫폼을 활용하는 이상) 사용자에게 불가피하게 보여지고 잇따라 열람되듯이, 그것들은 필요하기 때문에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기 때문에 소비된다.


각각의 구독, 팔로우를 체결했을 당시의 자발적인 선택과 지향, 사용자 편향적인 알고리즘의 작용으로 구성되는 피드, 타임라인의 내용은 사용자의 의사를 묻지도, 그에 거스르지도 않으므로, 일체의 저항을 야기하지 않는다. 컨텐츠의 공급이 지속되는 이상, 그것이 원하는 바인 것인가에 관한 판단은 무한히 암묵적으로 확정된다. 왜냐하면 원하지 않는 공급은 원천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자발적인 의사를 반영하여 활성화된 팔로우, 구독 버튼은 반-의사, 반-욕구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원하던 것'은 '원하지 않는 것'일 수가 없으므로, 항구적인 '원하는 것'이 된다. 저항받지 않는, 질적인 충돌을 빚어내지 않는 공급, 자명self-evident하게 욕구에 합치되는 컨텐츠의 소비는 자가포식적이다. 그러한 소비에는 관계할 수 있는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심스럽고 거부될 수 있는 이질적인 외부의 차원은 '수요에 대한 공급'을 전제하는 체계의 논리로서 배제된다. 요컨대, 피드, 타임라인 안에서 각 개인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욕구에 합치되지 못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하여 의심의 여지없는 본연의 지향만이 한없이 연장되면서 남는다.


따라서 구독, 팔로우는 특정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수용의 표지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는 표명에 가깝다. 그것은 형식상으로 욕구, 필요의 체계에 의한 포섭 내지는 상호 호혜적인 공급 계약의 양상을 보이지만, 포섭된 욕구는 머지않아 자신을 받아들인 체계를 장악하고, 공급은 일방 의존적인 것이 된다. 사용자의 피드, 타임라인은 언제나 '사전의 선택에 관한 것'들로 빈틈없이 채워지면서, 다른 것이 끼어들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컨텐츠는 타자와의 '대조'를 지워냄으로서, 대조의 가능성 자체를 소거시킴으로서 자신의 편향성을, 외부적 차원을 감춘다. 따라서 피드와 타임라인은 개인의 변동성 없는, 고정된 시야값이 된다.


웹 환경에서 차단 기능의 실효는 단순히 대상에 대한 소통의 단절에 불과하지 않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이고 엄밀하게 타자의 존재를 지워내는 기능을 한다. 차단된 개인은 차단자에게 코멘트, 쪽지 보내기와 같은 일련의 상호 작용을 거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보여지지도 않는다. 차단자는 차단된 자의 글이나 댓글, 웹 환경에서의 개인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을 볼 수 없게 된다. 즉, 차단된 자는 거부되고 기피될 뿐만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있어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그는 거부되다 못해 지워지고, 근본적으로 어떤 개인의 세계관 속에서 가능하지 않게 된다.


차단은 타자에 대한 일체의 다툼, 면역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편리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차단 기능은 어떠한 저항, 상호 작용을 수반하지 않고, 타자를 개인의 세계에서 몰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간단히 제압됨으로서 대립과 충돌, 면역 반응을 빚어낼 수 없는 타자는 구분을 잃고 무력해진다. 저항할 수 없는 일방적 배척의 가능성에 의해 각자를 어떤 고유한 것으로서 성립하게 하는 특유적, 배타적 성질은 필연적으로 억압된다. 왜냐하면 각자의 차이에 의한 분쟁, 합의, 화해의 과정이 개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일정 이상의 자원 투입을 요구하는 한편, 차단 기능의 적용은 대상이 되는 타인의 이름을 올릴 만한 블랙리스트상의 공간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나칠 정도로 간편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배제와 그 가능성은 일체의 '불편한' 타인과의 관계를 소멸시키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도 손쉽기 때문에, 개인은 타자와 교류하고 대항하고 상호 작용하기 보다, 그를 낙인찍고 악마화하고 각 사용자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웹 플랫폼의 체계적 기능을 활용하여, 그를 자신의 가능한 감각, 인지의 범주로부터 추방하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 귀결로서 초래되는 외부에 대한 직접적 대립 양상의 총체적 소실은 '다른 것'에 관한 개인의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불가해하게 만든다. 간단히 소거되고 배제될 수 있는, 따라서 대응할 필요가 없는 타자성은 그리하여 제거 되어야만 할 병적인 이상성으로서만 감지될 뿐이다. 그것은 편협함, 즉, 자의적으로 제약된 인지의 상태라기 보다, 그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믿음, 생각의 양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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