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ritingonthewall Apr 18. 2022
인간을 그 보편적 본질로서가 아닌 개별적 실존으로 파악하여 가치를 매기는 대전제에 근거한 일련의 현대적 규정, 곧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은 삶의 보편적인 경로와 근원적인 가치, 규범이라 믿어졌던 사항들의 지위를 흔들었다. 그러한 기성의 가치들은 여전히 전적으로 청산되지는 않았으나, 더 이상 이전 시대에서처럼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맹목적으로 추종되지는 못하며, 전에 없던 멸시를 받기도 한다. 새 시대의 계몽주의자들은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을 인간 해방이 진전된 징후로 해석하며 칭송한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의 판단은 정확하다. 적어도 존중할만한 사실을 담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 이외의 무언가가 되거나, 무언가를 해야만 할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예컨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대를 잇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고 공동체에 기여하거나 시대 정신이라 일컬어지는 거대 담론에 매몰되어 투신할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오늘날 그러한 보편 의지는 개별 인간에 대해 전에 없이 힘을 잃었다. 애국, 연장자, 부모에 대한 공경과 같은 이전 시대에서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치 규정들조차, 오늘날에는 조건에 따른 선택 사항으로 전락했다. 즉, 그 자신에 관한 이해타산에 따라 현대인은 얼마든지 국가를 배반해도 좋은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설정하거나 느끼는 필요 이외에 어떠한 기성의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또는 그에 관한 사회적 강압은 상당량 희석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원하는대로의 제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을 낙관하는 계몽주의자들은 해방과 모종의 상실, 허무에 잇따르는 혼란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해, 외부에 관계하지 않는 순수한 자립, 자존은 한편으로 일종의 고립에 불과하다는 지점에서 그들은 틀렸다. 실제로 기성의 규범을 허물음으로서 형성된 가치의 공백은 신 계몽주의자들의 예상대로 간단히, 그리고 건전하게 메워지지 못했다. 즉, 각자의 실존이라는 이상ideal은 그 공백을 메우기에는 너무나도 왜소한 것임이 드러났다. 대부분의 경우에, 실존은 단순한 생존과 구분될 만큼의 고유함과 매개된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편 의지에 관계하거나 그것을 추종하지 않는, 고립된 자아의 실존은 아무것도 매개하지 않는 그 자체만을 드러냄으로서 상호에 대한 거대한 관계망으로 나타나는 외부 세계에 대해 필연적으로 왜소하고 연약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외부와 분리되어 자신의 의미, 세계관 내부에서의 지위를 상실한 개별 자아는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스스로를, 의지할 곳 없이 고립된 자신을 의식하면서, 분리 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매개할 의미와 규범을 상실한, 어떤 의미에서 더할 나위없이 순수한 자아는 바로 그 순수함, 어떠한 외부적 모티브, 동력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생의 궤적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나가는 실존의 역동성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대의명분, 규범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껍데기뿐인 삶만이 남는다.
또한 남겨진 공백은 그대로 제 자리에 머물며 간극을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충족되기를 갈구하여 간단히 외면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리버럴 엘리트들에 의해 단순히 퇴행적이며 소수적 반동backlash으로 규정되고 있는 최근의 전지구적인 내셔널리즘, 고립주의, 토착주의nativism, 민족주의의 발흥은 실제로는 세태에 역행하여 나타나는 이상 징후라기 보다, 오히려 세태에 부응하여, 가치의 공백에 대응하기 위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외부와의 필연적 연결, 관계, 매개되는 의미를 상실하여 연약한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 자아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연대와 보편적 의미의 획득을 추구함으로서 나타나게 되는 증상일 따름이다.
그에 맞서는, 오늘날 지배적인 세계화globalization의 이상은 피아의 구분을 지우고 무제한적인 통합을 집행하면서 역설적인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세계화의 이상은 공동체의 구획과 공동체가 근거하는 집단적 이상의 성립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세계화의 이상은 (슈미트적인 의미에서의) 적과 친구의 구분을 지우는 것을 넘어, 개별 주체를 서로 동등한 본질을 공유하며 상호 호환 가능한 원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즉, 세계화의 이상은 분류될 수 있는, 서로 결합할 수 있는 상호 이질성의 구분 자체를 소거한다. 그리하여 개별자들은 통합 이전에 이미 서로를 분리할 구획을 상실한 세계global, 곧 단일한 전체의 구성물,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분리될 수 없는, 침해될 수 있는 자존의 기반을 지니지 않는 개별성은 허울에 불과한 것이 되고, 바로 그 점에 의해서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의 지평, 가능성은 소멸한다. 즉, 구획되지 않는, 전체로 부터 분리될 수 없는 성분은 이미 체계안에 포획되어 무력하게 된 원자로서 소외될 뿐이다. 그리고 확장된 사회적 삶, 거부할 수 없는 상호 접촉이 피로를 더한다. 타자와의 간격을 두고 분리될 수 없는 개인은 타자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동질적인, 상호 호환하는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강요된 화합이 오히려 상호간의 대립을 심화시킨다. 왜냐하면 종전까지는 단지 서로 간격을 둠으로서 충돌을 피하고 보존할 수 있었던, 상호간의 조율될 수 없는, 용인되지 못하는 차이를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지향하는 동질적, 상호 호환 가능한 전체의 이상은 그렇게 서로의 차이를 충돌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차이를 마모시킴으로서 진전되는 것이다. 그러한 메커니즘이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초래되고 있는 분열의 정체이다.
탈-주체, 탈-중심의 구호를 강변하며 변증법적 시대 정신의 가능한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포스트-모던은 다름 아닌 자신의 슬로건을 (본래 그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할) 중심이자 주체로 간주하게 되면서, 모순에 빠졌다. 포스트-모던은 그것이 겨냥하고 있던 주체와 타자의 대립 구도를 해체하기는 커녕, 오히려 모더니티를 자신에 대한 타자로 규정함으로서 전에 없던 새로운 대립을 만들어냈다. 독재자를 축출한 혁명가는 자신의 정권을 세우면서 또 다른 독재자가 된다. 감옥을 벗어나고자 하는 죄수는 그가 있는 감옥을 감싸는 더 큰 감옥의 내벽을 향해 달려나가게 될 뿐이다. 그처럼 탈-이데올로기를 주창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포스트-모던에 내재하는 모더니티를 극복하지 못한 포스트-모던은 결국 소수적 컬트, 내지는 문학적 방법론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그것은 새 시대의, 원자화된 개별 자아에 대해 대안이 되지 못했다.
그러한 총체적 혼란과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개별 실존의 주체성에 관한 두 종류의 처방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먼저 자아 긍정의 철학이 등장했다. 자아 긍정의 철학은 각자의 생태와 실존의 개별성 자체를 맹목적으로 이상화idealize하여 개인을 숭상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서 가치의 공백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무엇일 필요없이 자기 자신인 것만으로 이미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개별 인격의 개별성 자체는 하나의 구획에 불과한 것으로 외부에 대한 자아의 왜소함을 감추지는 못한다. 즉, 많은 경우에 자아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신성함을 입증하지 못한다. 자아 긍정의 철학은 개별 인격의 특수성, 대체될 수 없는 측면, 곧 '나다움'being myself이라는 규정을 근거로 자아의 신성성을 도출하고자 하나 기실 각 개인이 타인과의 구분을 가지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은 그 밖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가 각자의 조건과 무관하게 지니고 있는 각 실존의 개별적 구획은 그렇기 때문에 유의미한 특질trait로 간주되지 못한다. 구분되지 않는 형식, 그러한 동등성은 다른 것들과의 차등적 우열 관계로 나타나는 일련의 체계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다움'이라는 규정 자체의 자아에 대해 동어반복적인 내용은 그러한 동질적인 자존만을 반영하고 있음으로서, 근거가 박약한, 그리하여 위태로운 나르시시즘을 조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기형적 미의식으로 왜곡된(즉, 편집 및 보정된) 셀피selfie 이미지, 플렉스flex, YOLO 등의 슬로건과 함께 나타나는 파탄적 소비의 양상은 그러한 위태롭고 근거없는 프라이드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화상이어야 할 셀피 이미지 속에는 정작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고, 이상화idealize된 개인의 가공된 이미지만이 자리하고 있으며, 플렉스라 일컬어지는 과시적 소비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 끝에 나타나는 증상에 그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플렉스는 자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값 비싸기 때문에 치러지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자신을 어떤 무엇이라 스스로 규정하는 자기 규정의 철학이 발흥했다. 이는 개인이 자신을 특정한 정체성 집단의 일원이라 규정하고 그에 편입함으로서 자존의 근거를 구성하려는 시도로 정의내릴 수 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특정한 성소수자 분파(젠더), 주의자, 운동가, 비건 등의 특수한 정체성, 이념 집단, 행위 양식을 따르는 집합 등으로 분류하고 표방되는 정체성을 근거로 서로 교류하며 일종의 정치적 연대를 구성하기도 한다. 그러한 각개의 정체성 분류는 그 협소한 범주 규정을 따라, 일련의 특수성을 매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은연 중에 각 개인의 특수성마저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정체성 규정과 그에 수반하는 행위 양식이 개인의 도덕적, 지적 우월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는 그것들이 나름의 도덕적, 정치적 판단을 근거로 한 자기 규약 체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분류는 근본적으로 자의적이며 각자의 필연적인 이해 관계에 결부되지 않는다는 지점에서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오늘날의 정체성 담론에서 나타나는 각개의 정체성 구분은 실현된 사실, 실재의 구체적이고 국소적인 양상에 대한 범주의 구획, 모종의 체계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분에 대한 지각으로서가 아닌, 그로부터의 일련의 추정되는 가능성에 의한 임의적 규정을 따른다. 즉, 그러한 구분은 각개의 사실, 실재가 인지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사실 자체가 인지적, 사회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 의해 성립한다. 따라서 그러한 구분은 한도없는 분화, 분열의 가능성을 갖는다. 가령, 본래 생식 활동에서의 이분된 성 역할, 그리고 분담된 생식 기능의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하는 성 기관에 근거한 생물학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 성별은 정체성 담론의 장에서 이른바 '젠더'라 일컬어지는 인지적, 사회학적 개념으로 재구되어 그에 기초한 수많은 파생 분류를 만들어내고 있다. 페미니즘 역시, 성별과 그에 기초하는 사회적 역할 구분, 지적, 인지적 성향의 차이 등을 부인하며, 기성의 성 구분에 종속되지 않는 개별적인 실존의 추구를 촉구한다. 그런데 성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실존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의 것일지에 대한 논쟁의 여지에 의해 페미니즘 역시 (페미니스트 자신들 역시 100명의 페미니스트에게는 100개의 페미니즘이 존재한다고 자부심을 담아 말하고 있을 만큼) 수많은 분파로 갈라져 있다. 채식주의, 동물권 운동은 (그렇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가상의 개념에 불과한) 인간의 전유물로서만 인정되었던 불가침의 권리를 기존의 사회적 합의와는 무관하게 쾌고 감수성을 지닌 전 생물에게 확장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자의적인 믿음에 기초한다. 요컨대, 현상이 어떤 특정한 방식, 내지는 관점에 따라 독해될 수 있다는 인지적 가능성에 의거해 이들 정체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오늘날 관찰되는 정체성 정치, 담론의 대대적인 확산과 발흥에는 이러한 개념적 유연성, 엄밀한 사실을 개연적 해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개인은 어떠한 정체성 집단에 편입되기 위해, 단지 자신이 설정한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체성 담론은 아무런 자격 요건없이 자칭될 수 있는, 그러한 자의적 정체성 구분 이외에 별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인터넷의 무산자, 낙오자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엄밀함이 결여된 유연성, 인지적으로 구성되는 (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인지적으로 해체될 수 있는) 개념적 토대만을 지닌다는 점에 의해, 정체성 담론과 그에 기초한 구분은 해소될 수 없는 불안을 내재하게 된다. 즉, 그러한 구분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과시적 선언, 자의식에 대한 보호 및 보강 전략, 노골적으로 말해 '정신 승리'와 구분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사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개인의 인지적 결단, 개별적인 믿음belief에 기초하여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별 인간을 구체적으로 범주화하는 그러한 구분이 일련의 공유되는 속성을 지정하고 공표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개인들간의 집단으로서의 소속감, 공동체적인 동질감을 구성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인 반면, 실제로 그러한 구분은 충분한 구속력을 지니는 공동체적 연대를 구축해내지 못한다. 이는 그러한 구분이 근본적으로 각자의 자가적인 규정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마찬가지로 자의에 의해 간단히 철회될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개인과 분절될 수 없는 일련의 속성에 매개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구분과 그에 기초하는 연대는 그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개인과의 범주적 연관, 구획의 대상이 되는(그리고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실제의 구체적인 측면을 상실함으로서 스스로의 기반을 잃는다. 따라서 그러한 구분에 기대는 개인의 자존 또한 이미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