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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흐름 Oct 26. 2020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시간대가 있다.

나의 시간표를 믿으며 산다면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을까.


 이번 학기에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학원으로 일을 나간다. 학원에서의 내 역할은 '(수학)첨삭쌤'이다. 학생들이 푼 문제들을 채점해주고, 그들에게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는 보조 선생님 정도의 일이다. 지금은 초등 5학년부터 고등 3학년까지의 학생들을 맡는다.


 중학교 2학년들이 공부하고 있는 교실은 다소 시끌벅적하다. 문제가 안 풀려 끙끙 대고 있는 학생이 있는 반면, 옆 친구랑 답을 공유하며 집에 일찍 돌아가고 싶어 하는 학생도 있다. 더러는 나를 찾으며 "쌤, 인생이 너무 허무해요~" 하며 칭얼대는 학생도 있다. "글쎄, 그걸 벌써 알아서 어떡해~" 하고 받아주면 그 학생은 마스크 안에서 몇 번 웃고는 다음 문제를 푼다.


 학생들이 있는 교실에 있다 보면 생명력을 느낀다. 물론 다들 문제를 푸느라 힘들어하는 모습밖에 없지만, 옆 친구랑 티격태격하면서 떠드는 친구, 수업시간이 끝나고도 학원에 남아 모르는 문제를 꼼꼼히 따져가며 풀고 있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스크 속에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가끔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감동과 도전을 받을 때가 있고, 그렇게 공부하던 내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학원 일을 시작한 것은 20년도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부터였다. 고등학교 동아리 선배가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내게 학원 일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봐주셨다. 선배는 곧 군문 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에 학원 일을 정리하며 자신의 자리를 메워 줄 후임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나야 원래 쭉 수학을 좋아한 학생이었고, 더군다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장래 희망이 수학 교사였던 학생인 만큼 '가르쳐 주는' 업에 선망을 품고 있었다. 나는 선배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1학기를 다 마치기 , 학원 원장 선생님의 간단한 면접을 본 뒤 출근을 허락받았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건데, 코로나 시대에 작은 일자리나마 얻은 건 어마어마한 감사 제목이었다.)


 유독 내 학과의 종강이 늦은 탓에 학원 첫 출근은 무더위가 강해지는 7월 중순 무렵이었다. 친구들은 종강 후에 꿀 같은 여유를 누리고 있는데, 나는 방학의 참맛을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주 3회를 학원 일정에 고정해야 했다. 그 때문일까, 방학에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주위 친구들을 보며 아주 조금은 질투심이 났다.


 학원 시스템에 적응하는 동안에는 힘이 많이 들었다. 먼저는 교재와 프린트의 가짓수가 워낙 많았기에 채점을 매기기가 어려웠다. 교재 답지가 교실 안에 없어 한 층을 내려가 책꽂이를 살펴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가뜩이나 학생들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첫 몇 주 동안에는 폭풍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어떤 힘듦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학원 일에 적응한 이후로는 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내가 알고 있는 수학 지식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쓰이고 있다는 즐거움을, 느리지만 조금씩 배워가고 성장해 가는 학생들을 보며 성취감을 느꼈다. 슬램덩크의 안 감독이 강백호의 성장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딱 이랬을 거다.


 

 


 방 안에만 갇혀 있는 오전 수업시간보다 학원에서 수학 문제를 쳐다보고 있는 오후 시간이 더 좋았다. 학원에 있으면 사람 실루엣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 방 안에서는 느끼지 못한 사람 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이 나보다 밝다. 마스크에 가려 그들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서글서글한 인상들이 내게 위로감을 준다.




 


 얼마 전, 스트레스가 쌓여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만 같았던 하루가 있었다. 출근 중에도 '아, 이러다가 오늘 폐 끼치는 거 아냐?' 싶을 정도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무거워져 처음 한 시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숨긴 채 학생들 문제를 보고 있었다. 어둑어둑해지고 일이 잠깐 한가해진 찰나, 학생들이 쭉 앉아 있는 중학생 교실을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머리에 침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면서 침을 맞아본 경험은 없지만, 그건 분명 침을 맞은 느낌이었다.


끙끙대며 문제를 풀고 있는 학생,

살짝 졸고 있는 학생,

친구한테 답을 물어보며 히죽거리는 학생-


  평소랑 완전히 동일한 교실이었지만, 내 머릿속에 비친 모습은 사뭇 달랐다. 마치 그 순간에는 학생들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보였다.


'세상에는 나만 살고 있는 게 아니구나. 정말 여러 사람이 살고 있었네.'


 뜬금없는 관찰이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눈으로 보고 나니 나의 마음속 짐이 저절로 덜어졌다. 그날의 처음 몇 시간은 마치 뭘 잘못 먹어서 체한 것만 같았는데, 그 관찰을 통해서 전부 토해낼 수 있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그때 내 눈앞에 있어줘서 참 고맙다고 말이다.






 주변을 잘 둘러보다 보면 자신의 어려움이 녹는 경우가 있다. 혼자 조용히 걷거나, 또는 친구와 고민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번 내 케이스는 기존의 방법들과는 아예 달랐다. 학생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컨디션이 회복되다니, 진짜 신기하지 않은가? 실은 이 경험을 간직하고 싶어서 학원의 이모저모를 끌어왔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하, 대체 언제까지 공부해야 하는 거야. 진짜 지루하다.' 하고 신세 한탄한 순간이 한 둘이 아니었다.


 입시라는 폭풍을 직격으로 맞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힘들었었다. 개인적인 상처도 그 무렵에 생겼고, 친구 중 몇몇은 재수를 결정해 저마다 인생 스케일이 바뀌기도 하더라.


 회상을 마치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면-

끝이 없을 것 같았던 12년의 공부는 이미 지나가 있고, 지금 내 앞에는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 있다. 그래,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늦은 밤 10시,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에일리 명언'으로 알려진 글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학원에서 깨우친 배움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뉴욕은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캘리포니아가 뒤쳐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22세에 졸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5년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CEO가 됐습니다.
그리고 50세에 사망했습니다.

반면 또 어떤 사람은 50세에 CEO가 됐습니다.
그리고 90세까지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미혼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오바마는 55세에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70세에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시간대에서 일합니다.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앞서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보다 뒤처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자기 자신의 경주를, 자기 자신의 시간에 맞춰서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맙시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대에 있을 뿐이고, 당신도 당신의 시간대에 있는 것뿐입니다.

인생은 행동하기에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긴장을 푸세요.



 정리하자면, 우리는 각자에게 마련된 시간대가 있기 때문에 남과 자꾸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남을 의식하는 건 딱 한 번이면 족하다. 그 한 번은 세상에는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재빠르게 자신의 시간대로 돌아오면 된다. 내게는 다른 누구의 시간표가 아닌 나의 시간대가 있다는 것을 믿고 산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친구 중에는 재수 끝에 진로를 바꾼 벗이 있는가 하면, 이번 겨울에 세 번째 수능을 치르는 친구가 있다. 졸업 일정이 계획한 것과 달라져 속상해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고등학교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는 학생도 있다. 그들 모두에게 이 글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을 꼭 나누고 싶다. 마침 이 글을 적기 시작한 날, 내가 맡는 학생에게 내 브런치를 소개했으니 한 명은 더 읽어줄 것 같다.


 우연히 이 글을 만난 아무개 씨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유독 고되고 지치는 중에 이 글을 읽었다면 더더욱.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긴장을 풀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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