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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흐름 Oct 23. 2020

3반 선생님은 영웅이만 좋아해

편애가 학생들에게 위험한 이유와 교육자의 바람직한 자세


 '3반 선생님은 영웅이(가명)만 좋아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사회 교과목을 맡는 옆반의 담임은 소위 말하는 우등생, 모범생을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선생으로서 공부를 잘하고 착실한 학생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교사도 사람이기에 학생 중에 똘똘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 선생님은 자기가 영웅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분이었다. (남자 교사분이었고 학생도 남자였기에 뉴스에 나올법한 말도 안 되는 '좋아함'은 아니다. 남교사가 여학생을 좋아하거나 여교사가 남학생을.. 그런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미리 알린다.)


 '어우, 그럼 우리 영웅이 착하지!'


 어느 반에서나 똑같이 말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저 모습이 선생님의 컨셉이라고 여겼다. 그 선생님의 솔직한 태도는 영웅이가 아닌 다른 학생들도 모범생이었으면 하는 마음, 혹은 선생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향한 조금의 질투심 유발 작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 반의 학생도 아니었고, 그분과 친하지도 않았기에 그 모습에 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학생 중 누군가는 속앓이를 했을 것 같다. '저 선생님은 말 잘 듣는 학생만 좋아하지.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걸?' 하며 말이다. 사실 교실이나 교무실의 풍경을 들여다보면 다른 교사에게도 모범생 편애 경향이 깔려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등생과의 상담에서는 친절한데, 다른 여타의 학생들에게는 형식적으로 대하는 교사의 모습이 그 예이다.


 '쌤~ 또 철수랑 상담해요~?'


 교무실을 지나가다 모범생과의 대화가 길어지는 선생을 본 몇몇 학생은 선생님에게 농담 던지는 말투로 그 현장을 꼬집고 지나간다. 실제로 여러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교과 선생님은 똑똑한 친구들만 챙겨서 속상하다는 마음을 내비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로써 편애라는 어딘가 부족한 사랑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나온 학교는 이러이러했다.'라며 중학교 친구들, 다른 고등학교를 나온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준다. 물론 다른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어째서 이런 게 뉴스에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때로는 이게 나라냐 싶을 정도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애'만 다루도록 한다.


 이야기의 화두는 교실 속의 사회 선생님으로 시작했지만, 편애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취업문턱에서도 학연과 지연을 앞세워 편애를 하는가 하면, 문턱을 넘어선 직장 환경에서도 기이한 풍경은 계속된다.


 편애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안정감과 우월감을 느낀다. 대체로 편애를 주는 쪽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선생, 선배, 직장 상사 등)이기 때문이다. 편애를 받지 못한 쪽은 상대적으로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윗사람으로부터의 신임을 받지 못한다는 점, 노력해서 공을 세워도 저 친구만큼 칭찬받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들 탓에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편애는 대상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고 기만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편애는 그 대상 여부와 관계없이 양쪽 모두를 위해 없어져야 하는 반사회적 가치이다.


 편애는 한 번 드러난 순간부터 인간관계를 계속 갉아먹는다. 다시 사회 선생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학생 입장에서 그 선생님은 '모범생만 좋아하는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인상이 결정된 이후로는 교사 쪽에서 공평한 사랑을 실천하려 한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왜? 학생들 입장에서는 '저 선생님 안 하던 짓 하시네. 기분이 좀 좋으신가 봐.' 정도의 판단에서 생각이 그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학생이 잘 되길 바라는 선생 입장에서는 어떠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걸까? 나는 교사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우리 반 학생들이 이러이러한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 혹은 '지금 펑펑 노는 것보다 열심히 공부하면 더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은데?' 정도로 말이다. 솔직한 바람을 전한 이후에는 선택의 몫이 학생에게 돌아간다.


 만일 편애를 통해서라도 한 학생이 모범생이 되고 싶어 하는 조금의 질투심과 동기가 전해졌다고 해보자. 그 학생에게 있어 공부의 의미는 모범생의 반열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전부가 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성장과 자율성은 찾아볼 수 없고 교사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는 인정 욕구만이 남는다.


 다시 돌아와서, 교사가 솔직한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바라는 바를 전하면 어떻게 될까? 편애라는 애매한 도구를 빌려오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 말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학생에게는 잔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적어도 학생들에게 오해를 사지 않는 방법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잔소리처럼 들릴 뿐, 그것이 맞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일부 학생들은 자신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모범생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위한 공부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교사 역시 한 명의 사람이므로 교무실 사이의 억지스러운 위계질서와 학연, 지연으로 얽힌 악습을 체험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교사가 그 문화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도 학생들을 편애하거나 구분할 경우에는 사회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반사회를 가르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교사는 모든 학생에게 공평한 사랑과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문제 발표를 시킬 때 누가 봐도 티 나듯이 모범생만 골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 끝에 있는 학생들도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것, 학급에서 소외되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이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들이 교사의 몫 아닐까? 편 가르기가 아니라 학생 모두가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교사의 아름다운 자세라고 생각한다.





                                                                                                                                                                      

영화 <지상의 별처럼>


 영화 <지상의 별처럼>의 이야기다. 임시 미술 교사로 부임한 니쿰브(오른쪽)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샨(왼쪽)을 발견한다. 그는 오답으로 가득한 이샨의 시험지와 수업에 임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이샨에게 난독증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스스로 멘토가 되어주었다. 니쿰브 선생의 꾸준한 도움으로 이샨은 자신의 학습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창의력을 발산하는 학생으로 도약하게 된다.


 니쿰브 선생은 모범생을 편애하지도 않았고, 소외되는 학생을 나 몰라라 하지도 않았다. 그가 실천한 것은 모든 학생에게 공평한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사랑의 시선이었고, 이샨이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한 사람이 곧바른 길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의지와 멘토의 알맞은 도움이 필요하다. 이 둘의 관계는 닭과 달걀의 관계이다. 학생의 기본자세와 마음이 좋아 자신의 멘토를 찾는 경우가 있으며, 멘토가 학생을 격려함으로써 학생이 나아지기도 한다.


 이 글에는 편애가 위험한 이유와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교육자에게 전하는 바람을 담아보았다. 작은 외침이지만, 이 글이 혹시나 교육계에서 일하는 분에게 닿았다면 생각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반복에 지쳐 잊힌 첫 출근 때의 각오라든가,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진중한 고민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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