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끼워놓고 잊어버린 묵은 낙엽 같은 이름들

by 안치용

30년도 훨씬 더 지나 창가에 다시 앉았다. 능곡, 벽제, 일영, 장흥, 송추…. 책갈피에 끼워놓고 잊어버린 묵은 낙엽 같은 이름이 역마다 적혀 있다. 이모씨(56·여)는 이대 재학 중이던 1970년대 초반 교외선을 타곤 했다. 꽃다운 나이의 동기생들과 함께였다. 창밖을 보기보다 동승한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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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향하는 나이가 됐다. 교외선이 4월1일 없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어렵게 시간을 내 혼자 기차에 올랐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보니 교외선이 없어진다는 소식이 더 서글프다.


지난 24일 오후 1시35분 남은진 기관사(26)는 서울역에서 정시에 통일호 열차를 출발시켰다. 14개 역마다 서고, 다시 출발하고, 기적을 울리고, 역무원과 수신호를 교환하느라 분주했다. 3월 들어 교외선에 투입돼 이날 두번째로 교외선 기관석에 올랐다. 남기관사로서는 어머니뻘인 승객 이씨의 추억이 잘 와닿지 않는다. 이씨는 48.3㎞를 1시간반 정도 달려 의정부역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모셔야 할 20여명 승객 중 한명일 뿐이다. 그에게 교외선은 양편으로 아파트숲이 펼쳐진 별 볼품없는 노선이다.


사흘 뒤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교외선은 지난 63년 8월 개통됐다. 정확하게는 능곡~의정부 사이 31.8㎞, 9개 역만이 교외선이다. 일반인들은 주로 서울시내에서 경기 북부를 왕래하기 때문에 서울~의정부 전체 구간을 교외선으로 착각한다.


교외선은 경기 북부지역 주민들의 주요 출퇴근 및 통학수단이었다. 70년대 이후에는 서울지역 대학생, 특히 연대 이대 등 서부지역 학생들이 수련회를 가면서 애용한 ‘젊음의 기차’이기도 했다. 일영·장흥·송추는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 연애가 본궤도에 오를 무렵 젊은 남녀는 교외선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함께 여행을 떠나자는 제의를 수락하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그래도 여행은 여행이었다. 탐색과 설렘 속에 더불어 길을 떠난 남녀는 한결 가까운 사이가 돼 서울로 돌아왔다. 교외선 철길은 적잖은 젊은이들에게 본격 연애의 통과의례였다.


80년대 교외선에서는 또한 울분과 비탄이 떠돌았다. 교외선 객차의 한쪽 구석에서 들뜬 청춘의 낭만이 넘쳐났다면, 다른 쪽에서는 군부독재 시대 젊은이들의 진지하고 간절한 목소리가 자리했다.


일영쪽은 80년대 운동권이 MT 장소로 즐겨 찾던 곳이다. 학원사찰이나, 학내 도청 등을 피해 교외선 차표를 샀다. 역시 지리적인 근접성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곳곳에 대학생이 넘쳐나 눈에 덜 띈다는 점도 고려됐다. 그러나 젊은 탓에, 기차를 타면서 기분이 들뜨는 것만은 어쩌지 못했다.


이러한 수요를 겨냥해 아예 운동권 민박까지 등장했다. 오래 전에 문을 닫은 ‘평화의 집’은 한때 교외선 민박의 명소였다. 사찰의 표적이 될 수 있었지만 사회전반에서 운동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 가능한 일이 됐다. 방마다 ‘동지가’를 힘차게 불렀고, ‘독재타도’와 같은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사방 벽에는 온갖 민중가요가 빼곡히 적혀 있어 굳이 노래책을 펴지 않아도 됐다.


그곳에서는 앞마당으로 철길이 지나갔다. 선로와 마당 사이엔 경계가 없었다. 늦게 기차를 탄 사람들은 ‘평화의 집’을 지나면서 마당에 도착해 라면 같은 걸 끓여먹고 있던 동료들에게 기차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새벽이 오도록 격론을 벌이고 격앙된 마음에 소주잔을 기울이다 한두명씩 차례로 서로를 베고 잠이 들면 멀리서 기적소리가 울렸다. 잠 못 이룬 젊은이들은 철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비를 만나 지독한 독감에 앓아 눕기도 했다.


이진광 차장(49)은 교외선의 낭만과 열정이 한풀 꺾인 뒤에 서울발 의정부행 열차와 인연을 맺었다. 81년 철도청에 입사한 뒤 88년 처음 교외선 열차를 탔다. 지난 15년5개월 동안 자동차가 많이 보급되면서 교외선 이용객이 서서히 줄어드는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3년 전부터는 다른 노선을 거의 안 타고 교외선에서만 일하고 있다. 어쩌다 대학생들이 단체 수련회를 갈 때가 아니면 3량짜리 열차에 승객이라곤 20여명이 전부다.


하루 3번 서울~의정부를 오고 가는 교외선은 이날도 텅텅 비어있었다. 철도청은 누적적자를 못 이겨 다음달부터 노선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폐쇄 결정 전부터 승객 중에는 이씨처럼 젊은날의 기억을 찾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고 이차장은 전했다.


어떤 노부부는 ‘추억의 기차’에서 준비한 김밥을 나눠먹고, 종착역에서도 내리지 않고 출발점으로 되돌아 갔다. 교외선이 사라지면 이러한 추억여행도 끝이다. 그러나 젊음, 사랑, 열망, 분노, 낭만의 기적소리는 한때 교외선의 승객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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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8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글이다. 그때 어느 부에 소속돼 있어서 이런 기사를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사가 나가고 며칠 뒤인 2004년 4월 1일 교외선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기사 속의 누군가처럼 나 역시 일영 평화의 집으로 MT를 가서 토론을 하고 술을 먹고 민중가요를 밤새 부른 기억이 있다. 그때 타고 갔다가 돌아온 기차를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탑승하여 마지막을 기록했다. 그러고도 16년이 지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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