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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Feb 26. 2020

이화여대가 성취한 것

친밀하게 교류하는 대학생 그룹에 농담 삼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광화문이나 신촌 에서 한 500명이 모여서 100일만 타이어를 태우면서 농성해봐라. 세상이 바뀌나 안 바뀌나.” 대학생들도 농담 삼아 대답했다. “영어학원도 가야 하고, 알바도 해야 하고, 인턴도 해야 해서 그렇게 오래 시간 못 내요.” 농담 같지만 진실이다. 대학생들의 현실참여 부재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압박의 강도는 기성세대의 상상을 초월한다. 타이어를 태우지는 않았지만 이화여대생들이 농담 같은 일을 해냈다. 100일에 근접하는 긴 시간동안 이대 본관 농성을 통해 130년 이화여대 역사 최초의 교수 시위를 견인하고, 결국 최초로 총장을 중도 사퇴하게 만들었다. 외형상으로는 최경희 총장의 전횡과 사퇴가 가장 두드러진 시위의 원인과 결과이고,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입학 및 학점 관련 의혹이 세간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대 사태의 본질은 우리 사회에서 대학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는 데 있다.


 “대학이 기업화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는 꽤 오래 됐다. 많은 대학의 총장이 스스로를 CEO(최고경영자)로 부르는 현상은 대학 기업화의 극적인 상징이다. 알다시피 CEO는 기업에서 쓰이는 단어다. 기업은 효율성을 추구하며, 천민적 자본주의에서의 기업은 사회책임과 무관한 이윤 추구 기관으로서 돈을 버는 기계로 간주된다. 효율성은 투입(Input) 대비 최대 산출(Output)의 추구를 의미하며 이때 효율성은, 측정돼 드러나지 않으면 의미를 갖지 못하기에 불가불 투입과 산출을 수치화한다.


 대학의 기업화란 효율성 추구의 조직화를 의미하며 이에 따라 대학운영 또한 투입 대비 최대 산출의 추구를 도모한다. 그러나 대학의 ‘매출’구조가 단순하면서 동시에 특이하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대학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신입생을 늘려 등록금 수입을 늘릴 수는 없다. 그래서 대학의 효율성 추구 방식은 기업과는 원천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즉 CEO인 총장의 경영방침 아래 대학이 공급 측면에서 ‘시장’에 참여해 주요 수요층인 대학신입생을 두고 경쟁을 벌이지만, 교육시장이란 게 여러모로 제한적이어서 대학 운신의 폭은 좁다. 


 대표적으로는 대학이 자율적으로 공급량, 즉 입학정원을 늘릴 수는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편입생을 수요층으로 하는 시장의 경쟁구도 또한 매우 제한적이어서, 시장이 명문대를 중심으로 국지적으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시장규모가 작고 수요가 항상 초과상태다. 대학이 기업화·시장화 되고 있지만 대학이 위치한 교육시장은 매우 특수한 성격의 시장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 정확하게는 어쩌면 시장과 닮지 않았을 수 있다.


 등록금 수입은 안정적이긴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획기적인 ‘매출’ 확대가 불가능하며 드물게 ‘반값 등록금’ 운동 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 ‘매출’이 줄어들기도 한다. 더불어 엄밀하게 말해 등록금이 ‘매출’이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대학회계에서 등록금 수입은 기업 회계처럼 ‘매출’로 잡히지 않는다. 따라서 매출계상과 동시에 대손충당금을 쌓았다가 나중에 예측한 만큼 손실이 나지 않으면 환입되는 방식이 쓰이지 않는다. 교비회계에서 등록금은 성격상 일단 ‘부채’로 분류되며, 학기가 끝나면서 (즉 교육서비스가 완전히 제공된 이후에야) 수입으로 전환된다. 교육서비스가 실현돼 부채가 수입으로 전환되는 기간이 비교적 짧고, 회계상으로는 받은 등록금을 ‘부채’로 묶어놓는 것과 동시에 기존 ‘부채’가 수입으로 바뀌기에 사실 등록금을 부채로 잡는 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대학이 기업처럼 매출을 일으키지 않으며, 선수금을 받은 후에 그 부채(선수금)를 교육서비스를 제공해 갚아가는 구조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신뢰자본과 사회의 비(非)물질적 인프라에 근거하여 작동하는, 재삼 강조하자면 특수한 시장 또는 ‘시장 아닌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등록금 외의 대학의 수입원은 크게 동문이나 기업이 내는 기부금, 정부의 지원금으로 나뉜다. 기부금 쪽은 상위권 대학일수록 수입이 커지고 하위권 대학에서는 거의 수입이 발생하지 않는 부익부빈익빈 구조이다. 반면 정부 지원금 쪽은 정부의 교육정책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정도에 따라 대학별로 수입이 달라질 수 있는 구조이다. 물론 정부 지원금의 배분에서도 부익부빈익빈과 유사한 편중이 일어나지만 학교 서열처럼 고정적이지 않아서, 선제적으로 정부 정책을 움직이거나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에 순응하면 어느 정도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번 이대 사태의 발단 또한 이 파이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려는 CEO 최경희 총장의 욕심에서 비롯됐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는 체육과학부(스포츠과학·글로벌스포츠산업) 2015학번으로 입학했다. 체육과학부는 올해 기존 의류산업학과, 국제사무학과, 식품영양학과, 융합보건학과, 신설 융합콘텐츠학과와 통합돼 ‘신산업융합대학’에 속하게 됐다. 신산업융합대학 신설 계획은 2015년 2월에 발표됐다. “신산업융합대학 설립을 통해 미래 경제를 주도할 신산업분야 인재를 양성한다”는 게 이대가 내세운 명분이다. 그러나 스포츠, 의류, 보건, 영양 등 판이한 성격의 학과들을, 말하자면 거의 즉흥적으로 한데 묶어버리겠다는 발상에 학내 구성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번 이대 농성 사태에서 반복해서 지적되었듯, 학생들의 의견 수렴 없이 몇 달 만에 논의가 끝났고 신산업융합대학의 설립이 결정됐다. 


최 총장이 무리수인 줄 알면서 이처럼 신산업융합대학 설립을 전격적으로 밀어붙인 이유는 정부의 대학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교육부는 프라임사업(이공계 중심 대학 재정지원 사업)을 추진하면서 선정 대학에 300억 원을 지원키로 했는데, 선정 기준으로 융복합학과 신설 등을 내세웠다. 당연히 이대는 프라임사업에 선정된다.


이번 이대 사태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미래라이프대 신설도 신산업융합대학 설립의 복사판이었다. 모두 정부 지원 사업에 참여하여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한 대학개조였고, 그 과정에 학내의 민주적 토론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이 없었으며, 교육적 고려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더 많은 지원금을 받아내는 것. 이 목표에 이대가 매진하다가 이번에 결정적으로 좌초하고 말았다. 문제가 불거지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대학에서도 물론 사정이 같다.      



배제와 순치     


대학이 돈벌이에 급급하게 된 작금의 배금적 행태는 분명 우려스럽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대학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영삼 정부에서 추진한 자유화는 사립대학 숫자를 마구잡이로 늘렸고 대학진학률을 70~80%대로 끌어올렸다. 대학교육서비스 공급자의 ‘시장’진입 장벽을 낮췄고 이에 따라 거의 모든 수요를 흡수했다. 국가 전체로 보아 고등교육을 받은 숫자를 어느 정도로 유지할지, 향후 인구절벽에 직면하여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수요’ 위축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한 청사진은 없었다. 무조건 시장이 해결하리라는 소위 신자유주의적 신념이 현재 교육‘시장’의 틀을 형성했다.


문제는 가치와 철학을 차치하고라도, 앞서 살펴보았듯 교육‘시장’이 여타의 시장과 비교해 매우 특수한 구조여서 흔히 말하는 시장논리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사이 기업화와 시장화의 폭력적 세례를 받은 대학사회는 요즘 보듯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긴급한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 버렸다(몇 년 뒤부터 대학들이 문을 닫기 시작할 텐데, 이후 이어질 대학의 무더기 퇴출은 일반적인 상품시장에서 기업의 철수때와는 또 다른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1987년 체제의 수립 이후 사학은 자본 및 기존 정치 엘리트들과 연대해 지배블록을 형성했고 이념적으로 현 체제의 온존과 재생산을 돕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 기능 중에는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대응해 지배블록이 고등교육을 이수하는 숫자와 기간을 늘림으로써 청년실업률에서 착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포함된다는 음모론적 설명 또한 가능하다. 그렇게 많은 고교 졸업생이 대학교육을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학교육을 받은 대학졸업생의 혜택 또한 졸업생의 상당수에겐 사실상 전무한 반면 사학은 크나큰 혜택을 누렸다. 대학이 대학생이란 이름으로 잡아 놓지 않았다면 사회에서 청년 실업자로 불렸을 많은 청년들이 캠퍼스에 머물게 됐고, 결과적으로 지배블록은 청년실업 증가에 따른 사회불안의 완화를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비용은 사회가 아니라 가정에서 부담한다. 


그러나 청년을 캠퍼스 내에 머물게 하는 것만으로 사회불안의 완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핵심 동력이 학생운동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배블록 입장에서는 대학진학률의 제고가 화근을 중첩시키는 우(愚)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은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조류와 조응하며 지성의 상아탑에서 직업훈련소로 격하된다. 조금 과하게 칭하면, ‘젊은 산업예비군의 수용소’라고 할 수 있다. 가치와 철학은 소거되고 무한경쟁과 취업이란 ‘지상명령’이 대학사회를 지배한다. 그동안 대학교수 집단의 성격도 크게 변화했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자 시대의 양심을 대변했던 대학교수들은 교수집단의 양적 확대와 병행하며 등장한 실적경쟁으로 인해, 대학에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고용인 신분으로 강등됐다. 교원 집단 내에 존재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교수사회에 배제를 기본사양으로 장착케 했고, 과거처럼 쉽사리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는 고용형태는 대학교수의 관심사를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 즉 자신의 안위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할당된 논문 편수를 채우거나 학생들 취업시키는 일 외에 소위 지식인으로서 역할은 거들떠 볼 엄두를 못 내는 게 현재 대학교수의 모습이다.


마침내 이대 사태가 일어날 즈음에는, 대학은 대학대로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하고 학생은 취업과 학점·스펙에, 교수는 자신의 고용상태 개선과 논문 작성 등에 전념하는 등 학생·교직원·교수·동문·지역사회의 대학공동체는 각자도생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딜레마게임을 방불케 하는데, 칸막이를 통해 주체들을 고립시켜 개별 주체는 물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감소케 하는 방식을 구조화한다. 이러한 마이너스의 구조화를 통해서 사학과 지배블록은 플러스의 이익을 챙겨간다. 그 이익은 한 마디로 현 제제의 유지와 강화다. 대학에서 가치와 철학을 배제시키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가치를 증식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대생들의 농성은 최순실 게이트의 뇌관을 건드려 예기치 않게 박근혜 정권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정치와 별개로 대학은 이대 사태를 계기로 대학 재구조화에 착수해야 한다. 대학 내 민주적 거버넌스의 구축과 공동체의 복원, 가치와 실용의 조화, 민주시민으로서 건전한 소양을 배양하는 대학 본연의 기능 회복, 비판적 지식인의 전당이란 명예 복구 등 답은 나와 있다. 그러나 대학의 개혁 혹은 올바른 재구조화는 사회 개혁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이대 사태가 우연찮게 사회를 바꾼다면, 사회개혁이 죽어가는 대학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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