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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Oct 10. 2020

시체 치우는 남자들이 탁아소까지 운영한 이유는?

영화평(영화리뷰) ‘소리도 없이’

영화평(영화리뷰) ‘소리도 없이’

이 글에는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리도 없이’는 신인감독 홍의정의 패기와 창의가 넘쳐나는 영화이다. 영화의 통상적 소재인 범죄를 특별한 방식으로 소화하여 범죄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칭찬을 받아도 좋겠다. 이 영화는 비대칭, 역설, 반어를 기본값으로 취하면서 주변화와 상황화의 문법을 정색하지 않으며 보일 듯 말 듯 채색해 내는 데 성공한다. 영화가 그리는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어둡다. 도덕과 윤리보다는 존재에 관한 전제를 재검토하며 등장인물을 구축한 데서도, 비록 자신이 의식한 것 같지는 않지만 연출하고 각본을 쓴 홍 감독의 재능이 발휘된다. 


‘소리도 없이’는 일종의 ‘느와르’인데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느와르’라서 이것을 ‘블랑 느와르’로 불러야 할지 고민이 생긴다. 추가적인 고민은 만약 그런 명명법을 택한다면 이 영화가 ‘블랑 느와르’인지 ‘느와르 블랑’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악의 평범성일까선의 평범성일까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근면성실하고 전문적으로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 어느 날 단골이었던 범죄 조직의 실장 ‘용석’에게 부탁을 받고 유괴된 11살 아이 ‘초희’(문승아)를 억지로 떠맡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아이를 돌려주려던 두 사람 앞에 ‘용석’이 시체로 나타나고,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영화사에서 소개한 줄거리다. 태인과 창복의 극중 직업은 ‘범죄 조직의 청소부’이다. 동시에 두 사람은 낡은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계란을 판다. 어느 게 본업이고 어느 게 부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이 범죄세계에서 수행하는 청소부라는 역할은 범죄의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특별히 죄성(罪性)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살인현장에 함께하는 두 사람은 살인과는 무관하고 살해된 인간, 즉 시체를 처리할 뿐이다. 시체는 말하자면 물화한 인간이라고 할 것이기에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인 살인에 관여함에도 이들은 죄악에서 내용상 자유롭다. 극중에서 이들이 저지른 행위 중에 악의 발로로서 행사된 범죄가 없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홍의정 감독은 “인간은 선과 악이 모호한 환경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변화한다는 생각에서 이야기가 출발했다”라고 말한다. ‘소리도 없이’의 태인과 창복이, 주어진 환경과 자신들이 처한 생존 조건에서 각자의 기준으로 성실한 일상을 살아내고 그 조건에서 변화를 선택하였다는 뜻이다. 복잡한 현실 안에서 선악의 판단을 유보한 채,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내는 무감각한 우리의 모습을 대변한다는 홍 감독의 견해에 약간은 동의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타인에 의해 납치된 아이를 억지로 떠맡았다가 상황이 꼬이면서 ‘유괴범’으로 변모하는, 즉 ‘진짜 범죄자’가 되지만, 영화의 시종일관 이들에게서 죄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란 프리즘으로 소개한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학살자를 알고 있다. 일상에서 법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선량한’ 많은 독일인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이히만처럼 유대인 학살에 동조하고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사실은 충격을 주었다.


죄성에선 거의 자유롭다고 할 ‘소리도 없이’의 창복과 태인은, 말단이지만 자의로 범법에 가담하였고 내켜 하지 않지만 스스로 유괴범이 되기로 한 결과적으로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다. 사회를 운용하는 거대 시스템에 소속되어 그 시스템의 규범을 내면화한 아이히만과 같은 유형과는 대척점에 선 인물일 수 있다.


이들은 형식논리상 이론(異論) 없는 악한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삶을 열심히 산 것과 동일한 가치에 기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유괴범이 된다. 그러나 사체를 일상적으로 또 무감각하게 처리하는 이들의 내면에서는 신기하게도 ‘진짜 범죄자’가 되는 것에 대해 윤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예를 들어 창복과 태인이 ‘아동위탁소’ 업무를 넘어서 진짜 유괴범이 되는 계기에는, 무엇보다 우연이라는 운명의 장난이 작용했고 또한 돈 욕심이 발동한 것이 사실이지만 ‘위탁아동’ 초희에 대한 동정심이 작동한 것이 포함된다. 초희의 생명을 잃게 될 ‘판매’에 동의해 원래 유괴범들에게 초희를 넘기기보다는 유괴가 그들이나 초희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윈윈 방식임을 두 사람은 인식하였다. 무엇보다 이 방식이 모든 당사자 중에서 초희에게 가장 최선임을 창복과 태인이 알고 있었으며, 이들은 전적이진 않아도 초희의 입장을 감안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선택하였다. 

결론적으로, 초희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태인은 일상의 악 속에서 선의 평범성을 찾아내고 선을 행한다. 그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나아가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 선택을 하면서 초희의 일상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그 과정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비되는 선의 평범성을 실현한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길항관계는 선과 악 사이보다는 윤리와 생존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윤리와 생존그리고 존재     


태인에게 윤리와 생존은 제로섬 관계이다. 선과 악 사이에는 홍의정 감독 말대로 구분선이 모호하다. 태인에게 제로섬게임으로 주어진 윤리와 생존 사이에 구분선이 분명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제로섬은 극중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태인이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수록 태인의 생존확률이 떨어진다. 따라서 태인에게 부여된 과제는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바뀌게 된다. 사실 영화가 불러일으킨 착시와 달리 이 영화는 애초에 존재론을 다룬 작품이었다. 윤리와 생존을 포괄하는 하나의 범주를 찾으라고 한다면 존재론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인과 창복은 주변화한 존재이자 걸쳐진 존재로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주변화가 종종 우아한 걸쳐짐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반면 ‘소리도 없이’에서는 남루하고 슬픈 걸쳐짐으로 그려진다. 태인은 말을 못하고 창복은 다리를 전다. 태인이 말을 못 하는지 안 하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창복이 선천적 장애를 가졌는지 사고를 당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략은 작품의 결을 더 풍성하게 하면서 열린 해석의 장을 만든다. 배우는 정보가 아닌 연기만으로 캐릭터를 보여주어야 하므로 더 많은 공력이 필요하게 된다. 유아인과 유재명의 연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특히 대사 없는 연기로 특이한 캐릭터를 소화한 유아인에 대해서는 평소 개인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캐릭터와 연기를 논하자면 초희를 연기한 문승아를 반드시 말해야 한다. 토끼 마스크를 쓰고 등장한 문승아는 관객을 이상한 나라로 순식간에 납치한다. 그가 연기한 유괴당한 어린이 초희가, 비주류 의식과 행태가 만연한 창복-태인과 달리 주류 마인드와 대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흥미로운 전복을 성취한다. 행태만으로 평가하면 창복-태인이 미숙한 아동 같고 초희는 성숙한 성인 같다. 


범죄세계의 말단에 속한 채 선과 악의 구분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선의 평범성에 빠져들어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되는 창복-태인과는 판이한 존재론을 초희는 보여준다. 만약 마지막 장면에서 초희가 교사에게 다르게 말했다면 영화 속 이 인물의 일관성은 무너졌을 터이다. 주어진 여건에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고 생존을 절대가치로 떠받든다는 측면에서 초희는 현대사회의 전형적 인물이다. 세련된 신자유주의의 구현이란 수사도 가능할 텐데, 문제는 초희가 11살 어린이라는 점이다. 


초희에게서는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것의 흔적이 없다. 마지막 장면으로 쉽게 상상할 법한 가벼운 보은 또한 행동목록에서 제외된다. 그에게서 선의 평범성에 관한 고민이 엿보이지 않는다. 극중에서 그가 어린이가 아니라 다른 인간형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태인은 역(逆) 스톡홀름 증후군 같은 것을 드러내며 윤리와 생존의 균형을 파괴한다. 마지막에 태인이 용석의 재킷을 벗어 던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주변화와 상황화에 관한 나름의 서사를 완성한다. 그 장면이 아마 존엄한 존재를 선언하는 일종의 의식으로 모색되었을 것인데 존재론적 균형이 무너지고 일상의 활로가 사실상 차단된 상태에서 그 선언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느와르’로 불러도 무방하겠다. 혹은 ‘블랑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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