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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May 02. 2018

사랑이 하는 사랑의 단상

[영화평] "렛 더 선샤인 인"의 해피엔딩 없는 사랑타령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공식을 완전히 뒤집는 영화! 결말은 진짜 녹아웃이다."(빌리지 보이스)
"해피엔딩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사랑스런 오류의 코미디"(할리우드 리포터)

영화 <렛 더 선샤인 인(Let the Sunshine In)>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 영화인 클레어 드니(감독)와 줄리엣 비노쉬(주연배우)가 만든 영화이다. 여성의 사랑, 혹은 여성이 주체가 된 사랑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일단 여성영화라고 해도 좋겠다. "허황되지 않은, 진솔한 우리의 이야기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으로써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이라는 화두를 이어가고 있는 동시에 '여성 영화'의 새로운 진화로 보인다"고 국내 배급사는 의미를 부여한다.

"'여성 영화'의 새로운 진화"라는 진단에 동의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원본 텍스트가 프랑스의 남성 지식인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저명한 프랑스 남성 지식인이 사랑에 대해 사유한 것을, 21세기의 (물론 20세기도 살아낸) 여성 감독이 영화로 바꿔 여성의 사랑을 그렸다. 그러한 측면에서도 여성영화의 새로운 진화라고 해도 좋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드니 감독과 작가 크리스틴 앙고가 공동작업한 이 영화의 각본 자체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착안된 영화"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착안'이란 표현이 참 모호한 게 어쩌면 누군가는 '착안'을 통해 바르트의 '단상'을 모양내는 장식처럼 사용했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다.

롤랑 바르트를 '착안'하지 않은 각본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영화에 바르트의 후광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사의 소개 글에 나와 있는 대로 "클레어 드니는 (프로듀서가 당초에 제안한 대로) 단순히 <사랑의 단상>을 각색하기보다 크리스틴 앙고 작가와 함께 그들만의 단상으로 구성된 새로운 각본을 썼다"는 게 '착안'의 내용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 있지 않다고 할까.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은 붕어 모양의 빵을 붕어빵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런 건 없겠지만) 실제로 붕어를 넣어서 만든 붕어빵에 비해 앙꼬를 넣어 만든 붕어빵이 더 먹을 만하고 더 맛있다는 게 진실이다.

요체는 '바르트빵'을 표방한 이 영화가 과연 맛이 있느냐다. 홍보자료에 주렁주렁 달아놓은, 기사 맨 앞과 같은 내용의 극찬 목록을 믿어도 좋겠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맛있는 맛이 아닐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을 끝까지 버텨내기가 아주 조금 만만치 않았다. 막바지에 졸음을 참아낼 무렵 시사회장 어느 구석에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독이나 영화사가 인식하듯,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기"(이문세의 노래 '옛사랑' 가사) 때문이다.

사랑의 단상과 '착안'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의 한 장면.ⓒ 씨네룩스


근사해(adorable)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영상을 산출한다.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사실에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한 자신을 찬미한다."(롤랑 바르트)
"그날은 아침에 정말 행복한 거야. 난 운이 좋은 사람 같고, 내 인생이 근사해 보였어!"(클레어 드니)

왜(pourquoi)
"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가를 집요하게 자문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다만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롤랑 바르트)
"나도 사랑을 하고 싶어, 진짜 사랑을…. 어차피 실패할 건 알아. 그래도 한 번쯤은 다를 수 있잖아. 왜? 왜? 왜? 도저히 모르겠어."(클레어 드니)

부재(absence)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끊임없이 부재하는 너 앞에서만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을.'"(롤랑 바르트)
"같이 자는 게 아니었어…. 음악이나 들을 걸. 모호한 면이 있지만 우리 관계는 사랑이 아냐."(클레어 드니)

견딜 수 없는 것(insupportable)
"사랑의 고통의 축적된 감정이 드디어는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란 외침으로 폭발하는 것."(롤랑 바르트)
"이제 일어날 일을 알려줄 게. 당신은 다시 문을 열고 이 집에서 나가서 다신 안 나타나는 거야. 여기서 끝장을 내! 넌 개새끼야!"(클레어 드니)
 

근사해, 부재, 왜, 견딜 수 없는 것 등 제시된 네 가지 항목의 대조는 롤랑 바르트의 책 <사랑의 단상> 속의 구절을 보여주고 그에 상응(혹은 '착안')하여 클레어 드니가 각색(혹은 재창조)한 대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성된다.(영화사 제공자료)

어떤가. '착안'에 공감하게 되는가. 물론 관객은 이러한 '착안'을 알 수는 없고 '착안'된 결과만을 보기에 이 대조표는 불필요한 감상영역에 속할 수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으나 이러한 '착안'을 포함한 전체적으로 차별화한 구조로 인해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익숙한 기존 로맨틱 코미디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완전히 파괴했다는 지적 또한 타당해 보인다. 한데 애초에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지 않았다면 파괴가 불가능했으리란 지점에 생각이 이르게 되고 좋게 해석하여 결국 다양한 '착안'을 중첩시킴으로써 단상의 중층적 구조화를 꾀했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관객 앞에는 단지 '붕어빵'이 놓이게 될 뿐이다. 붕어빵을 굽는 기계의 구조나 붕어빵 안쪽의 구성은 논외가 된다. 주인공 이자벨에 대해 "카사노바 혹은 쾌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그저 (누구나 그러하듯) 완벽하지 않은 사람일 뿐이며 동시에 진실한 사랑을 찾는 과정엔 슬픔이 뒤따른 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 결코 좌절하지 않는 그리하여 어떤 관계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여성'"이라고 드니 감독은 평했다. '승리할 수 있는 여성'을 그려내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여성 영화'의 새로운 진화라는 주장에도 일부 동의하지만, 특정 부류의 관객에겐 승리감 혹은 그 비슷한 것을 선사하지 못하지 싶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개새끼"란 선언의 울림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의 한 장면.ⓒ 씨네룩스


이 영화에서는 이자벨이 하는 '사랑의 단상'의 대상으로 모두 7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중후한 중년 몸매를 뽐내는 돈 많은 은행가,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인지 장애와 무엇을 할지 매순간 망설이는 결정 장애까지 갖춘 연극배우, 지긋지긋하기 그지 없는 이혼한 전 남편 등. 영화 속 남자들이 다 왜 그 모양인지, 영판 현실의 남자와 판박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이자벨로 분한 줄리엣 비노쉬가 다양한 남자를 만나면서 끊임없이 사랑을 모색한다는 이야기다. 이자벨의 반복된 모색과 하염없는 사랑 타령이 전라도 사투리를 써서 좀 "징허게" 다가온다. 상대만 바꿔가며 같은 감정을 확인하려다 실패하고 매번 고통으로 귀결한다. 그러다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사랑이란 게 사실 지겨울 때가 있긴 하다. 그렇긴 해도 지겨움을 확인하기 위해 사랑에 다시 빠져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는 고전음악의 형식처럼 풀어나간다(실제로 영화에 사용된 음악은 재즈다).

또한 사랑의 목표는 사랑이며, 결코 인간(혹은 인간 여성)이 사랑에서 모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는 상기시킨다. 뚜렷한 메시지는 '인생 컨설턴트'로 분한 제라르 드빠르디유와 줄리엣 비노쉬가 따듯하게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완충 장면으로도 변경되지 않는다. 나는 판이한 구성과 형식에도 불구하고 <렛 더 선샤안 인>을 보며 영화 <연인>(The Lover, 1992)을 떠올렸다. "사랑을 사랑했고 사랑하기를 사랑하였다"고 한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대목에서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읽어보자.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 내 욕망을 욕망 그 자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어느 섬광 같은 순간에 그 사람을 일종의 무기력한, 박제된 사물로 보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구조였으며, 나는 그이/그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사랑의 단상> 중에서, 롤랑 바르트, 동문선, 2004)  

사랑을 사랑하는 이러한 유형의 사랑에서 (이런 유형의 사랑이 아닌 사랑이 존재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주체는 필사적으로 대상을 설정하지만 영구적인 부재 상태의 대상을 마주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단언컨대 영화 <렛 더 선샤인 인>은 롤랑 바르트 책의 이 한 대목을 옮겼을 뿐이다(영화 <연인>도 거의 그렇다).

마지막 장면을 찍으면서 기존의 가제 "암흑의 안경"을 대신하여 떠오른 최종 영화 제목 "Let the Sunshine In(렛 더 션샤인 인)" 또한 암암리에 '사랑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한다. 고정된 주체에게로 Sunshine을 끌어들이려는 (주체의) 몸짓은, 어느 Sunshine이든 "개새끼"로 호명될 전락을 예비한다. 

즉 "Let the Sunshine In"의 "Let"은 주어와 목적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짓는 이른바 '사역동사'로, 대상 혹은 목적어에게 주체 혹은 주어가 개입하는 필사적인 관계맺기를 상징하고(이때 let 자체에선 대상이 괄호쳐져 있다), 사랑의 비유로서 "Sunshine"을 '관계' 안(In)으로 들여오는 행위는 상호대상화가 아닌 '사랑을 사랑하는' 한 방향만의 대상화를 의미하기에, 눈을 사랑한 해의 이야기처럼 사랑의 결말은 사랑의 소멸로 이어져 마침내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파괴하는 것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귀"(바르트)이기 때문이다. 

이때 누군가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혐오한 죄로 "개새끼"가 되어야 한다. "개새끼"를 호명하는 것과 "개새끼"로 호명되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사랑을 갈구하였지만 사랑에서 좌초하여 사랑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전락의 호명. 그것은 가끔 화면 전체를 꽉 채우는 불안한 얼굴과 영화적으로는 등가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아무튼 로맨틱 코미디인 게, "개새끼'가 말 그대로 "강아지"로 변환될 잠재력을 곳곳에 묻어두었다. 사랑은 "개새끼"로 급전직하의 전락을 겪다가, 도대체 아무런 근거 없이 예컨대 "강아지"와 같은 사랑의 부활을 막무가내로 기도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사랑에 내재한 이러한 본유의 슬픔과 모면되지 않는 고통을 엄숙하지 않게 포착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이 슬픔과 고통의 근원은 "개새끼"를 보면서 "강아지"라고 말하거나 반대로 "강아지"를 보고 "개새끼"라고 말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화에서 무너지기는커녕) 주체로서 바로 서지 못해 사랑 자체에서 실각한 사람들에겐 슬픔과 고통이 심드렁한 얘기일 수도 있다. 아무려나, 그런 이들에게 이 영화는 심드렁해질 수 있다.

4월 26일 개봉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오마이뉴스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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