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기 시작
이삼 주 전부터 앉아서 궁둥이를 들썩들썩 하다가 슬쩍 떼보고, 또 슬쩍 떼보고 주저앉고 그랬다. 일어나려고 저러나.. 다리 힘이 부족해서 아직 안 되는 구나 했다.
지난 주부터는 엉덩이를 떼기는 하는데, 팔을 바닥에 짚고 쭉 밀어버리는 바람에 자꾸 뒤로만 기었다. 앞에 장난감이 보여서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점점 멀어져만 가니 짜증을 내다 울기도 했다. 애미야 날 좀 어떻게 해봐라 하는 눈빛을 보내서 앞에서 기기 시범도 보여줬다. 이렇게 엉덩이를 들고 팔을 딱 짚고 다리를 앞으로 옮기는 거야, 봐봐 이러면 몸통이 앞으로 가지? 그럼 또 팔을 앞에 짚는거야. 말 해주면서 시범삼아 아리아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기어다니다 보면 애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내가 얼마나 대단해보였을까. 대단히 빠르게 기어가는 나를 보며 팔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대단하다고 물개박수도 치고 꺅꺅 응원도 해줬다.
애미야 또 해봐라, 또 기어봐라, 하는 성원에 며칠 애 앞에서 기다가 피곤하기도 하고 흥미가 떨어져 요즘은 잘 안기었다. 또 애가 기기시작하면 지옥이 열린다는 사실을 자각한 후로 굳이 내가 그 지옥문을 서둘러 여는 꼴이 될까봐 그냥 가만히 둔 것도 있다. 그냥 앉아서 이번달 놀고 나중에 바르셀로나 가면 천천히 기라고 말해뒀다. 기기 시작하면 운동량이 많아져서 비행기타고 돌아갈 때도 골치아플 것 같았다.
오늘 베란다창고를 청소한다고 남편이랑 온통 끄집어내고 청소하고 있는데, 못 보던 물건들이 사방에 놓이니 정말 간절하게 다가가고 싶어졌나보다. 앉아서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애가 점점 장난감을 밀어내고 내가 방금 꺼내 닦은 김치통, 스케치북, 앨범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엉덩이를 들고 비틀비틀 버티더니 한 팔, 한 다리, 한 팔, 한 다리 하며 기기 시작했다.
기기 시작하는데 결정적인 것은 기술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길 줄 알아서 기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을 탐색하기 위해서 기어가는 것이었다. 스스로 몸을 제어할 줄 알게 되면 그 제어력을 이용해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욕구를 가지면 그를 충족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다 이렇겠지 싶다. 선욕구 후노력이 본능이지. 선기술 후성공이 아닌데. 먼저 뭘 하고 싶어해야 그에 맞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 일단 뭘 배운다음 그걸 써먹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화가가 되고 싶어서 미술을 시작한 나와, 일단 그림그리는 걸 배웠는데 이걸 어디다 써먹지 궁리하는 나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 두 마음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궁금함, 흥미, 욕구.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