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가 되기까지
애 이름을 정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많이 고민하고 검색하고, 리스트를 만들고 걸러내고.. 불러보고 들어 보고 써보고 읽어보고.
남편과 나의 공통된 의견은 다른 부모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르기 쉬울 것, 2~3음절로 짧을 것, 스페인과 한국 양국에서 같은 소리가 날 것. 다른 의견은 나는 스페인어 이름을 원했고 남편은 한국어 이름을 원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스페인에서 자라게 될 것 같은데 괜히 이름 때문에 자기 고향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지는 않을지, 가뜩이나 생김새가 동양인일텐데 걱정이 되었다. 반면 나와 다르게 남편은 주변에 같은 이름이 없도록, 아이의 또 다른 뿌리가 잘 드러나도록 한국식 이름을 주고 싶어 했다.
임신 중기에 들어서면서 각자 좋은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적어두었고 저녁에 나누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우리의 이름 취향이 많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진지한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막.. 대한 이런 이름이 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알렉산드라 같은 위인삘 이름은 대부분 걸렀다. 남편은 애 같은 이름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라 같은 귀여운 느낌의 이름들을 걸러냈다.
먼저 우리는 양국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이름들을 후보에 넣었다.
유나 lluna(달) : 울 엄마가 자기 손녀가 태양이면 태양이지 달이 뭐냐고 그래서 뺌
하나 Hana : 내가 한 씨라 뺌
소라 Sora : 일본어 하늘이 떠올라서 뺌
남편이 가져온 리스트를 봤다. 여러 개가 있었지만 특별히 두고두고 놀릴 것들이다.
아르테미시아 Artemisia : 이렇게 풀네임을 하고 아르떼라고 부르자고 했다. 무거워도 느으므 무겁다. 게다가 분명 2-3음절로 하기로 했는데? 이러면 수능 볼 때 이름이 칸에 다 안 들어가는데? 음절과 별개로 너무 신화라서 뺌. 거의 ‘내 이름은 아프로디테야. 아프로 라 불러줘’ 수준
옥타비아 Octavia : 무슨.. 고대 이름을 가져옴. 을파소 연개소문 같은 진짜 개 오래된 옛날 이름. 듣자마자 빵 터졌는데 산부인과 태동 검진 갔다가 의사한테 말해줬더니 깔깔대고 웃길래 애가 평생 이 반응 볼 거 생각하니 속 터져서 뺌.
Hope 홉 : 사람 이름이 호프가 뭐냐 호프가. 여기서는 예쁜 이름이라고 좋아하는 반응이 좀 있었으나 한국식 발음이 맥주 같아서 뺌. 호프야 호프 한잔 하자
내가 가져온 이름들은 이랬다.
Arlet 아를렛 : 특이하고 좀 세련 느낌이라 좋아했는데 울 엄마가 어려워해서 뺌. 아를렛.. 지금도 아쉬운 이름이다. 맘에 든다.
Olivia 올리비아 : 내가 전부터 좋아하던 이름인데 남편의 절친 아들이 Oliver올리베여서 세트 같다고 남편이 뺌.
남녀 이름 구분이 아주 엄격한 스페인어 특성상 중성적인 이름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두 가지를 찾아내어 후보에 올렸지만 빠졌다.
Noa 노아: 내가 초기부터 민 이름. 중성적이라서 좋았는데 여기가 카톨릭국가라 그런지 슈퍼 크리스천 같다고 하여 뺌. 근데 요즘 이 이름이 유행이라서 유치원 가면 엄청 많다고 함.
Alex 알렉ㅅ : 조카 중에 알렉스가 있어서 뺌.
Roser 루제ㄹ : 앞에 R소리가 혀를 떨며 나와서 한국 가족들이 부르기가 어려워서 뺌. 하지만 멋지다.
Dante 단테: 아들이면 분명 우리는 이 이름으로 했을 것이다. 너무 남자 이름이라 결국 걸렀지만 파격적으로 가볼까 생각해보긴 함. (이때는 주단태를 몰랐다) 하지만 결국 파격은 우리가 부리고 그 대가는 내 딸이 치를 것을 생각하니.. 뺌.
리스트에 계속 있었지만 남편과 나의 의견이 ‘음. 괜찮은데 딱! 은 아니다. 일단 킵하고 더 찾아보자’ 였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Núria 누리아 : 내가 아는 모든 누리아는 좋은 사람이었다. 스페인 카탈루냐주에 아주 흔한 이름. 스페인식 선영이랄까? 클래식하지만 너무 토박이스럽고 약간 올드하여 뒤로 미뤄둠.
Cloe 끌로에 : Chloé의 카탈루냐어 버전. 너무 상표 클로에가 유명하여+대단히 백인스러워서 뺌.
Neus 네우스(눈) : 네 에 강세가 있어서 네!우ㅅ 라고 소리나는게 멋지게 느껴졌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 이름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름은 예쁜데 자기가 아는 네우스가 성격이 그지같다고, 그래서 나쁜 이미지가 있다고 하여 뺌. 대체 네우스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Aina 아이나: 쉬운 이름이지만 내가 싫어하는 사람 이름이랑 비슷해서 거절.
Catarina 까따리나 : 내 세례명이라 제안해봤으나 듣는 사람들 모두 빵 터짐. 조말자 김복춘같은 넘넘 촌스러운 이름.
Cristina 크리스티나: 울 엄마 세례명이라 제안함. 괜찮긴 한데 아는 크리스티나가 몇 있어서 뺌.
존재하는 게 이상한데 심지어 유행까지 하는 두 이름:
África 아프리카 : 응 그 대륙 아프리카 맞다. 실제로 이름이 아프리카라는 애 몇 봤고 대부분 이 이름 엄청 예쁘다고 한다. 난 전쟁을 벌여본 역사가 없는 민주공화국에서 와서 이런 제국주의 정복광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음.
Asia 아시아 : 맞다 ㅇㅇ우리나라 있는 그 아시아. 이 이름도 왜인지 인기인데 무슨 굉장히 정신적 이국적 리츄얼한 느낌을 주는가 본데 어처구니없다. 몇몇이 내게 이 이름을 추천했는데 심각하게 이 사람들이 나를 멕이려는게 아닌지 고민했다.
추천받은 이름:
Mia 미아 : 예쁜 소리지만 한국어의 뜻이 너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서 뺌.
Aitana 아이따나 : 젊은 십대가 추천해줘서 요즘 이름인가 눈여겨봄. 그렇지만 맘에 안 듦.
Susana 수사나 : 울 엄마가 추천함. ….. 흔한 이름이다. 오십대 위로 올라가면 많은 이름.
Veronica 베로니카 : 울 엄마 추천. 역시 아주 올드하다. + 남편 전여친 이름이라 뺌.
Lucía 루시아 : 울엄빠가 추천함. 친구 중 루시아 있어서 뺌.
Erica 에리카 : 넘 남미 느낌이 나서 뺌. 유전형질상 애 얼굴은 동양인일텐데 사람들이 다시 뒤돌아볼 것 같음.
Sonia 쏘니아 : 무슨 일인지 내 주변 사람들의 절친/넘착한지인/은사의 이름이 쏘니아인 경우가 많아서 다들 이 이름에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음. 그렇지만 쏘냐라고 발음되는 게 나는 자꾸 쏘세지 야채볶음이 떠오름.
Blau 블라우: 파란색.이라는 이름이.. 한국도 스페인도 파란색은 긍정적이고 시원 쾌활 그렇긴 한데 영어의 우울한 이미지가 맘에 걸려서 (내 새끼가 인터내셔널 해질 것을 대비하여) 뺌.
Blanca블랑카: 흰 여자라는 이름 역시.. 흰색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느끼는 이름이 아닌가 싶지만 꽤 흔함. 역시 내 새끼는 나를 닮을 텐데 사람들이 잉? 할 것이라 뺌.
한국 이름 중 고려해 본 것들도 있다.
푸름 Prum : 난 참 예쁘게 느껴지는데.. 소리가 웃기다는 의견으로 뺌. 다들 뿌룸뿌룸뿌룸 기차소리 같다고.. 카탈루냐어로 기차소리를 FumFumFum뿜 뿜 뿜이라고 함
지나 Gina : 스페인어로 중국이 china 치나. ‘중국 여자’가 스페인어로 치나. 지나 치나 지나 치나.. 뺌.
미지 Miji : 남편이 찾아옴. J가 ㅎ소리가 나는 스페인어 특성상 모두가 ‘미히’라고 읽을 것이라 뺌.
사랑 Sarang : 남편이 넘 좋아함. 듣는 사람들 다들 예쁘다고 함. 나도 예쁘게 느껴지긴 하지만 왠지 끌리지 않음.
이산 Isan : 남편에게는 인도 이름, 나에게는 왕 이름, 우리 둘의 조합에서 나올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뺌.
결국 정해진 이름은
Arya 아리아 : 나는 Aria라고 적고 싶었다. 이탈리아어로 Aria가 공기라는 뜻이라고 하여 더 마음에 들었는데 좀 Ariadna, Ariana 아리아나라는 여기에 많은 이름의 약식 버전 같아서 Arya로 적기로 함.
아리랑 같고 내 이름이랑 비슷하고 한국사람들이 부를 때 -아/-야 를 붙이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 부부 마음에 들게 됨. ( 보통 스페인어 남자 이름에 -아를 여자 이름이 된다. 라울(남자) > 라우라(여자). 여자 이름에 -아 를 붙여 부르면 좀 이상해진다. 리아> 리아야
사실 왕좌의 게임의 최종병기인 그녀의 이름을 따서 내 딸은 아리아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