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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은정 Mar 12. 2018

"생각하고 말하자": 무엇을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서술이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할 거라고.


나는 직업 상 많은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친구들도 많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보다 많은 대화 자리를 갖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고 나의 반응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같이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지 않고 그런 자리는 피한다. 특히 이것은 나를 스스로도 떠올려보면 아주 의외의 모습이긴 하다. 예전에는 그런 자리를 주도하거나 분위기를 진전시키거나 끝까지 남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소위 '변했다'에는 몇가지 경험적인 이유들이 있다.
일단 대화에 있어서 힘들어하는 경우 4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말을 길게 하고 장황하게 하고 또 끊임없이 말한다.
2) 같은 하소연을 볼 때마다 하고 패턴이 동일하다.
3) 사소한, 거의 모든 것들에 습관적으로 투덜댄다.

자 그러면 하나씩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모든 설명은 나를 위한 것이겠지만.
1) 말을 길게 하고 장황하게 하고 또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연민이 있다. 안타깝다는 뜻인데 왜냐하면 상대방이 듣지 않는 말을 왜 계속 하려고 하는 것일까? 어떤 말이든 말이 길어지면 상대방의 동공이 흔들리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상대방도 공감의 말을 하고 싶은데 기회도 없을 뿐더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서 또 설명하고 또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한 것이 말을 하는 것은 나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심일터인데, 가장 전달이 안되는 말이 바로 길게 말하는 것이다. 
장황하게 말하는 것은 말의 스킬의 문제일 수 있지만 길게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고 자신의 입장에만 몰두해있을 때 나오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상대방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시작의 말조차 희석해버린다. 
물론, 말을 길게 하는데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핵심이 딱딱 들어가있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으며 나의 리액션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그런데도 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말을 길게 하는데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핵심이 딱뜩 들어가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이 왜 길어지겠는가. 분명 군더더기가 많기 때문에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가장 전달이 안되는 말을 혼자 부여잡고 길게 또 하고 또 하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화자 입장에서도 눈치가 있기 때문에 지금 내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이 안되고 있는 것 같으면 초조한 마음에 또 이 말을 더하고 저 말을 더하면서 말이 길어진다. 눈치를 챘다면 딱 끝내야 서로가 힘든 불편함이 사라진다.
대화는 주고받음이다. 내가 말을 했으면 상대방에게 마이크를 넘겨줘야 한다. 그리고 나는 듣는 것이다. 말을 길게 하는 사람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욕구가 너무 많아서 상대방이 말할 때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이크를 뺏어온다. 
아무도 보지 않는 무대에서의 공연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럴 거라면 굳이 소리를 내는 에너지를 쓰지 말고 혼자 글을 쓰는게 맞다. 말을 길게 하고 장황하게 하는 것처럼 말의 전달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없다. 미괄식 말고 두괄식으로 그리고 간결하게 마무리.

2) 같은 하소연을 볼 때마다 하고 패턴이 동일하다.
가장 좋아하지 않는 유형으로 3)번과 거의 동률이다. 힘든 상황과 곤란한 마음을 친구에게 동료에게 하소연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건강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소연 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스스로 이겨낼 힘을 얻는 구조라면 말해 뭐하겠는가. 아주 훌륭하지. 그런데 지난번에도 들었던 하소연을 또 한다. 아니 사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지지난번에도 들었던 하소연을 또 한다. 또 하고 또 하고. 같은 내용의 하소연이 아니면 이번에는 패턴이 동일하다. 그 자리에 등장인물이 바뀌고 사건이 바뀔 뿐 늘 패턴이 동일하다. 늘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왜 그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것일까? 늘 나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이 왜 그 사람에게만 많은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지. 사람의 삶이 어찌 늘 좋을 수만 있겠는가? 문제는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신호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나에 의해서 그렇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을 바꾸거나 나의 의식을 바꾸거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기운이 빠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힘든 걸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어서 목소리 톤, 표정, 단어 등을 총동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 나아질 것은 알리면 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안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아니라면 묵상하다. 그렇게 성토해야만 마음이 진정된다면 내 안에 힘이 아직 부족하다는 말이다. 더 묵상하고 묵상해서 그것이 진짜 나에게 힘들고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혹시 내가 그러고 있다면 그 패턴을 발견하고 가능하다면 멈춰라. 패턴은 내가 거기에 휩쓸려 돌지 않고 멈추면 사라진다. 혹은 그럼에도 하소연을 하고 싶다면 다양한 아이디어로 다른 하소연인 것처럼 위장하던지.

3) 사소한, 거의 모든 것들에 습관적으로 투덜댄다.
나는 최근에 이런 이유로 친구 하나와 결별을 했다. 물론 그 친구는 내가 결별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계속 만나자고 연락이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의 20년이 다 되는 세월 속에서 그 친구를 만나기 전에 나의 심호흡은 늘 '또 투덜대겠지.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였다. 커피를 마시면 여기 커피는 맛없는 원두를 쓰는 곳이고, 도넛을 먹으면 너무 설탕 범벅이고, 영화를 보면 너무 억지라고 한다. 그런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매우 '둔한' 나는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할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참 듣기가 싫다. 영혼이 쪼그라드는 느낌. 
나는 그 친구와 어느 술집에 가도 마음에 드는 안주를 먹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앞에서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기에는 미각이 형편없는 사람이 될 용기가 필요했으니.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자주 만나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영향을 받는다. 나도 어느새 그렇게 보게 되고 나도 어느새 그렇게 말하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년 간 관찰한 바로는 이렇게 사소한, 거의 모든 것들에 습관적으로 투덜대는 사람들은 '습관'인 듯 하다. 말 그대로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듣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의미이거나 큰 의견인 것처럼 동요된다. 그리고 그래도 되는 줄 알고 같이 동참하게 된다. 아니 아니~~ 세상은 그렇게까지 투덜댈만큼 영 아닌 곳이 아니다.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살고 먹고 걷는 곳인데 좀 좋게 좋게 보면 어떤가. 암튼 정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스타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대화'를 할 때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주고 받음'이 잘 되어야 한다. 내 말을 주고 상대방의 말을 받음이 자유자재로 되어야 한다. "대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봐도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상대방과 이야기를 잘 주고 잘 받으려면 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하고 상대방을 생각해야 한다.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운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상대방에게 내가 하는 말이
1) 나에게 이로운지
2) 상대방에게 이로운지
3) 관계에 이로운지
"이롭다: 이익이 있다. 유의어-좋다1, 유익하다1, 유리하다1" 길게 말하는 것이, 같은 패턴으로 하소연을 하는 것이, 투덜대는 것이 나에게, 상대방에게,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 어느 곳에도 이롭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맞다. 어떤 단어가 더 이로울까, 어떤 문장이 더 이로울까, 어떤 대화가 더 이로울까를 생각하고 말하면 다 해결된다. 정말.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뭐 굳이 에너지를 잔뜩 들여가면서 하나. 안하는 것만 못하는 것을 말이다.

원은정. <어느 날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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