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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Jul 11. 2021

프랑스혁명 : 영웅의 탄생

프랑스의 새로운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구식 군대를 격멸하다.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베토벤 - 영웅 교향곡 제 1악장

영웅 교향곡은 원래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유럽의 "해방자"로 보고 "보나파르트(Buonaparte)"라는 제목의 헌정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황제가 되자 베토벤은 크게 실망하여 "보나파르트(Buonaparte)"라는 제목을 지우고 "영웅(Eroica)"으로 제목을 바꾼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끝났지만, 당시 유럽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보고 유럽에서 계급의 귀천이 사라질 것이라 희망했다. 새로운 체제를 대표하는 나폴레옹의 군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고,  구체제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군대는 유리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탈리아에서 영웅적인 활약상을 보여주었고, 결국 오스트리아 왕가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


서로를 불신하는 동맹국

피에몬테 지역으로 진격

1793년 4월 나폴레옹의 군대는 샤르데나 왕국의 피에몬테 지역으로 진격했다. 피에몬테 지역은 프랑스와 밀라노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북부 이탈리아를 가기 위한 길목에 있었다. 나폴레옹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피에몬테군과 함께 나폴레옹의 진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피에몬테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를 갈라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먼저 오스트리아 군대를 공격했다. 시간을 끌수록 오스트리아군과 피에몬테군이 합류해 나폴레옹의 원정군보다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역사 지식도 해박하여 오스트리아와 피에몬테 지방의 갈등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먼저 공격하면 피에몬테군이 오스트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피에몬테군을 먼저 공격하는 것처럼 속이고, 오스트리아군과 피에몬테군 사이로 진격해 들어갔다.


오스트리아 군 공략

나폴레옹은 또한 마세나의 부대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마세나는 오스트리아군과 열심히 싸웠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세나의 패배는 나폴레옹이 의도한 것이었다. 의도된 패배로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을 추격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마세나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보자 기세가 오른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을 추격하여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격렬한 저항했고,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이겨 오스트리아군은 일단 후퇴한다. 그런데 프랑스군을 급히 추격하다보니 오스트리아 본대와 떨어진 부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만명의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 본대와 떨어진 4천명의 부대를 공격했다. 몬테노테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오스트리아군은 패배했고, 2,500명의 사상자를 내며 부대가 궤멸되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과 피에몬테 군의 사이를 벌리기 위해 마세나에게 데고를 공격하게 했다. 5천명의 오스트리아 군을 이끌던 아르장토가 있던 데고는 마세나에게 함락 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세나의 군이 약탈에 빠져 술을 먹고 곯아떨어진 사이에, 오스트리아의 그렌츠라는 부대의 급습을 받고 마세나는 도망친다.

나폴레옹은 빠르게 지원 병력을 보냈고, 프랑스군은 1만 5천명의 병력으로 3천 5백명의 오스트리아 그렌츠 부대를 공격했다. 그렌츠 부대는 오스트리아 본대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나폴레옹에게 겁을 먹은 본대는 이미 후퇴 중이었다. 결국 그렌츠 부대는 패배한다.


샤르데나 왕국의 항복

오스트리아가 후퇴하자 피에몬테군은 고립되었고 사기도 떨어졌다. 1만 3천명이던 피에몬테군은 줄지어 탈영했다. 단 며칠 사이에 탈영병만 3천명에 달했다. 피에몬테군은 유리한 방어지점을 찾아 후퇴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들을 빠르게 추격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몬도비 전투에서의 패배로 피에몬테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나폴레옹은 피에몬테군에게 중요 요새와 보급품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도 더 이상 피에몬테군을 믿지 못하고 요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화가 난 샤르데나 왕국의 왕 아마데우스 3세는 오스트리아를 비난하며 프랑스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택한다. 단 2주만에 프랑스군은 피에몬테 지역을 정복한다. 나폴레옹은 다음 목적지는 이탈리아 북부지역이었다. 후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도망가는 오스트리아 군

도망치는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 볼리유 장군은 북부 이탈리아 지역의 수도인 밀라노를 지켜야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빠른 기동력에 밀라노를 버리고 일단 로디강으로 후퇴했다. 

나폴레옹도 다급해졌다. 오스트리아군이 퇴각하면 본국의 티롤 지역에서 대규모 군대를 재정비하여 다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로디강을 건넌 볼리유의 본대는 이탈리아 지역 북부에 위치한 만토바 요새로 후퇴중이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속도를 올려 로디강에 도착했다.


로디 전투

로디강에 다다른 프랑스군은 수 많은 대포를 쏘아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느슨해지는 틈을 타 로디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오스트리아군은 좁은 다리에 총과 대포를 퍼부어 프랑스군을 쓰러뜨렸다. 강을 건넌 병사들이 모두 죽자 프랑스군의 사기도 떨어졌다. 이때 프랑스의 지휘관들이 먼저 나서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결국 노련한 지휘관들의 활약 끝에 로디전투도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이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고 강 서쪽을 장악했다. 또한 밀라노에도 무혈입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밀라노는 과거에도 부유한 도시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군은 현재 가치로 250억에 달하는 귀금속을 얻었고, 병사들은 밀린 급여를 금화로 받을 수 있었다.


만토바 공성전

이탈리아 북부 지역 최후의 요새 만토바

한편, 오스트리아 사령관 볼리유는 일부 병력을 만토바 요새에 두고 오스트리아로 빠르게 후퇴했다. 나폴레옹에게는 이탈리아 북부 장악을 위해 만토바 요새 정복만 남아있었다. 그는 요새를 공격함과 동시에 그동안 정복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도 수행해야했다. 

오스트리아는 만토바를 구하고 나폴레옹을 쫓아내기 위해 4차례에 걸쳐 구원군을 파견했다. 구원군의 매번 대규모였고, 나폴레옹의 방어군보다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4차례의 구원군을 모두 물리친다. 앞서 이야기 했던 네덜란드와는 달리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프랑스군이 열세였다. 어떻게 4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을까? 


구체제와 신체제의 격돌

오스트리아 : 구체제 군대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구체제를 대표하는 군대였다.

첫째, 오스트리아는 불평등한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도 병사 모집을 위해 징병제를 채택했지만, 일부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면제받았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전체 군대 규모는 프랑스보다 적었다.

둘째, 오스트리아 군대는 수동적이었다. 불평등한 징병제는 계급 간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고 단편적인 명령체계로 군대를 움직였다. 귀족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은 능동적인 상황판단 능력이 부족했다. 

셋째, 오스트리아는 연공서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선 군 생활을 아무 탈없이 오래 수행해야 했고, 따라서 진급욕심이 있는 귀족 장군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따라 군을 운영했다. 이들은 새로운 전쟁 형태에 무지했고 옛날 방식을 고수하다 나폴레옹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였다.

넷째, 오스트리아군은 모든 것을 중앙에서 통제하려 했다. 수동적인 병사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지휘부가 모든 정보를 확인하고 일일이 명령을 내려야 했다. 복잡한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체제였다.

다섯째, 계급체계가 고착화되어 의사결정 속도가 느렸다. 모든 정보를 상부에 보고하고 명령에 따르는 방식은 중요한 순간에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나폴레옹을 포위해 섬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한 박자 늦게 움직였고, 나폴레옹은 죽음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여섯째, 확실한 보급체계를 추구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방으로부터 직접 받는 보급체계를 추구했고, 보급로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를 공략해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로를 끈질기게 공격했다.

일곱째, 싸우는 순간에 군대가 분할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의 느린 명령체계로 실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결국 군대를 분할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간파해 오스트리아군이 분할되는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전체 규모는 프랑스군보다 컸지만 정작 전투 상황에서는 항상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보다 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게 각개격파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 신체제 군대

프랑스의 군대는 신체제를 대표하는 군대였다.

첫째, 프랑스는 평등한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평등한 징병제로 모든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했다. 따라서 프랑스 군인의 수는 오스트리아군인들보다 많았다.

둘째, 프랑스의 군대는 자율적이었다. 평등한 징병제로 병사와 하급 장교 모두 평민이었다. 따라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으며 상관의 명령을 받은 병사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셋째, 프랑스는 성과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평민도 뛰어난 성과를 내면 장교로 진급할 수 있었다. 장군들은 진급을 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법을 찾거나 스스로 만들었고, 오스트리아군에 밀려 위기에 처해도 끝까지 싸워 이겼다.

넷째, 프랑스 군대에 대한 통제는 전략적 목표에 맞게 적절한 수준을 유지했다. 나폴레옹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각 사단의 판단하에 문제를 해결하되, 전체적인 전략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명령을 내리며 군대를 지휘했다.

다섯째, 유연한 계급체계의사결정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다.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받은 프랑스군의 사단장은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신속하게 결정하고 행동했다. 그들의 빠르고 적절한 판단은 위험한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기도 했다.

여섯째, 현지에서 조달하는 보급체계를 추구했다. 프랑스군은 부유한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보급품을 조달하는 체계를 추구했다. 따라서 병사들의 짐은 가벼웠고, 오스트리아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공격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일곱째, 싸우는 순간에 군대가 뭉쳤다. 프랑스군은 평시에는 군대를 분산시켰다가도, 결정적 순간에는 결집했다. 나폴레옹은 적의 부대를 궤멸시키거나 보급로를 공격할 때마다 더 많은 병사를 이끌고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전체적인 규모면에서는 오스트리아보다 작았지만, 전투 상황에서는 오스트리아군보다 병사의 수가 많았다. 특히, 프랑스군의 사단제도는 오스트리아의 구체제와 맞서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주역이었다. 나폴레옹의 승리는 어찌보면 항상 예견된 것이다.


1차 만토바 구원대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뷔름저(Dagobert Sigmund von Wurmser, 1724 ~ 1797)

만토바 요새에는 아직 오스트리아군이 건재했다. 오스트리아의 명장 뷔름저가 만토바를 구원하기 위해 티롤 지방에서 만토바로 향하고 있었다. 뷔름저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군대를 나누어 진격했다. 오스트리아의 우세한 병력으로 프랑스 군의 포위를 뚫고 만토바에 입성했다. 만토바 요새 병력은 증원되었고, 물자 보급도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 오스트리아의 만토바 입성도 나폴레옹의 계획이었다. 요새의 문은 나폴레옹이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분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패전보고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주력부대(이하 주공)와 보조부대(이하 조공)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호수를 끼고 오스트리아군이 분리된 것을 알게된 나폴레옹은 조공 공격에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서 만토바를 포위하고 있던 병력까지 총동원하여 오스트리아의 조공을 공격한다. 이 전략은 뷔름저가 주공을 이끌고 만토바에 들어갈 때 빠르게 조공을 포위하여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후방에서 뷔름저의 주공이 공격할 것도 대비하여 오쥬로가 1만의 방어 병력으로 방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샤를 피에르 프랑수아 오쥬로(Charles-Pierre-François Augereau, 1757 ~ 1816)

샤를 피에르 프랑수아 오쥬로

샤를 피에르 프랑수아 오쥬로(이하 오쥬로)는 "탈영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프랑스의 장군이다. 파리의 과일 장수였던 태어난 오쥬로는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프랑스군에 입대한 후, 오쥬로는 장교와 싸움이 붙어 결투 끝에 장교를 살해하면서 탈영을 시작했다. 프랑스 군에서 탈영한 오쥬로는 러시아군에 입대했다가 탈영하고, 다시 프로이센군에 입대한 후 탈영했다. 프로이센군은 탈영병을 추격하고 처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오쥬로는 병사들을 지휘해 집단 탈영에 성공한다.

두려울 것이 없는 오쥬로에게 나폴레옹은 어떤 방법을 써도 좋으니 오스트리아의 주력부대의 공격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각개격파

나폴레옹이 준 임무를 오쥬로는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뷔름저의 부대가 공격하자 오쥬로는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았다. 나폴레옹에게 퇴각로가 막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뷔름저는 갑자기 돌연 공격을 멈추고 다시 만토바 요새로 들어갔다. 그동안 나폴레옹의 본대는 로나토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의 조공을 격파한다.

나폴레옹의 계략에 당했다고 생각한 뷔름저는 다시 요새에서 나와 나폴레옹을 공격한다. 그러자 카스티글리오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뷔름저를 공격한다. 프랑스군에게 퇴각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한 뷔름저는 결국 오스트리아로 퇴각한다.


2차 만토바 구원대

뷔름저의 우회 공격

오스트리아 왕가는 패배한 뷔름저를 질책했다. 왕가의 재촉에 못이겨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재정비하여 2차 구원대를 만들었다. 뷔름저는 지난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후방 보급로를 공격하고, 퇴각로를 막는것에 이골이 났다. 정면으로 나폴레옹을 공격하면 똑같이 당할 것이라 생각한 뷔름저는 우회해서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우회하는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곧바로 따라와 공격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확실한 방어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뷔름저는 군대를 둘로 나눠 이탈리아 베로나 북쪽에 있는 트렌토에 방어기지를 건설하면서 나폴레옹이 지키는 만토바로 들어가려했다.

속도가 빠른 프랑스

이번에는 프랑스가 먼저 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오스트리아군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군은 트렌토에 방어기지를 다 건설하지도 못한 채로 프랑스군과 싸워야 했다. 프랑스 군은 로베레토 전투에서 병력의 우위로 트렌토를 지키는 오스트리아 장군 다비도비치를 물리친다.


만토바 추격전

다비도비치가 오스트리아로 다시 퇴각하자, 프랑스군은 만토바로 향하는 뷔름저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프랑스군은 바사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후방 부대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뷔름저의 뒤를 쫓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생각보다 너무나 빠른 프랑스군의 진격 속도에 놀란 뷔름저는 보급품도 버리고 급하게 만토바로 도망친다. 프랑스 군의 추격 끝에 3만명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이 만토바에 갇히게 되었다. 늪지대에 위치한 만토바는 천혜의 요새였지만 그 안에서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오스트리아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어갔다.


프랑스 라인강 원정군 패배

한편,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던 프랑스의 라인강 원정군이 패배했다. 오스트리아의 명장 카를 대공의 전략에 빠져 대패한 프랑스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대의 공격이 멈추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날뛰는 나폴레옹을 쓰러뜨리기 위해 대군을 모으기 시작한다.  

   

3차 만토바 구원대

요세프 알빈치 폰 보르베렉(Joseph Alvinczi von Borberek, 1735 ~ 1810)

3차 만토바 구원대는 오스트리아의 명장 알빈치가 맡았다. 오스트리아는 만토바 구원대를 전폭 지원하여, 프랑스군 보다 많은 수의 병사가 다시 모이게 되었다.

알빈치는 만토바 구원대의 실패 요인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에게 휘말려 각개격파를 당했다. 그동안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을 쓰러뜨릴 기회를 포착해 공격하면, 어디선가 나폴레옹의 지원군이 와서 포위 당하기 일수였다. 기회로 생각했으나 매번 나폴레옹의 계획에 휘말려 도리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둘째는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로가 취약했다. 나폴레옹은 불리하면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로를 공격했는데, 오스트리아군은 만토바를 빨리 구원하기 위해 보급로 철처하게 방어하지 못했고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전략

알빈치는 나폴레옹에 대항할 새로운 전략을 떠올린다. 철저하게 보급로를 방어하면서 만토바를 향해 움직이는 전략이었다. 프랑스보다 진격속도는 느리더라도 보급로를 철저히 지킬수만 있다면 병사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나폴레옹 군대는 공격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탱크처럼 목표물만 보고 밀고 나가는 전략이었다.

위기에 빠진 나폴레옹

3차 구원대가 출정하자, 이번에도 프랑스가 먼저 움직였다. 프랑스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도 오스트리아의 군에 미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칼디에로 전투를 벌이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이 붙잡힐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오스트리아군은 패배하는 나폴레옹을 추격하지 않았다. 알빈치의 새로운 전략을 고수하고 보급로에 방어기지를 세우며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모험 : 아르콜 다리 전투

나폴레옹은 또 한번 모험을 강행했다.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로를 공격하는 모험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만일 오스트리아군이 알아챈다면 곧바로 포위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디제강 근처의 습지를 이용해 움직였다. 습지를 통과하여 아르콜 다리를 건너면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로인 빌라노바라는 도시를 공격할 수 있었다.


아르콜 다리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Antoine-Jean Gros : Bonaparte at the pont d'Arcole, 1796)

나폴레옹 군대는 알빈치에게 들키지 않고 습지를 가로질러 빠르게 아르콜 다리까지 움직였다. 그러나 알빈치는 보급로 주변에 방어망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콜 다리 주변에도 소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아르콜 다리를 습격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이 막아냈다. 좁은 다리를 통과하려던 프랑스 병사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총과 대포에 쓰려졌고, 결국 프랑스 군은 아르콜 다리에서 병력을 잃어갔다.


보급로를 파괴하려는자와 막는자

나폴레옹이 아르콜 다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알빈치는 만토바로 가려던 원래 계획을 버리고 아르콜 다리로 부대를 지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오쥬로에게 아르콜 다리를 내주고 말았고, 알빈치는 아르콜 다리에서 물러나 빌라노바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보급로를 파괴하려는 프랑스군과 보급로를 방어하려는 오스트리아군은 빌라노바에서 끈질기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질린 알빈치는 결국 오스트리아로 후퇴한다. 

나폴레옹은 아르콜 다리 전투를 자축했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북쪽에 오스트리아의 장군 다비도비치의 부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알빈치와 싸우는 동안 다비도비치 부대가 협공한다면 프랑스는 포위되어 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분리된 상태로 프랑스에 맞섰고 프랑스에게 퇴각로가 막힐 것 같을 때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알빈치가 오스트리아로 후퇴하면서 3차 구원군도 실패로 끝이난다. 그러나 프랑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알빈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나폴레옹을 공격한다면 프랑스군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정도였다. 


4차 만토바 구원대

오스트리아의 포위 섬멸 전략

알빈치는 협공하지 않은 것을 3차 구원대의 실패 이유로 꼽았다. 이번에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사방에서 포위해 협공으로 쓰러뜨릴 계획을 구상했다. 이로써, 알빈치는 다시 4차 구원대를 이끌고 만토바로 출정한다. 나폴레옹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 중요했던 알빈치는 모든 오스트리아군이 동시에 나폴레옹 군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이 동시에 공격한다면 천하의 나폴레옹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인가. 나폴레옹은 알빈치의 만반의 준비가 무색할 정도로 순순히 포위 당한다. 나폴레옹의 그 다음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리볼리 전투 : 내선작전

나폴레옹은 리볼리라는 지역의 높은 곳에서 오스트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이탈리아를 종횡무진하면서 지역 지리를 잘 알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총동원하여 포위하려 든다면 수적으로 불리하겠지만 프랑스군은 기동력을 자랑하고 있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프랑스군을 빠르게 응집시키고 적의 공격을 차례로 격파하면 승리할 가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작전을 내선작전이라 부른다.

리볼리 전투가 일어나자 나폴레옹은 동쪽에서 오는 오스트리아군이 주력부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식간에 병력을 모아 동쪽의 오스트리아군을 섬멸했다. 그 다음 정면에서 압박해오는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정면을 미끼로 하여 서쪽에서 나폴레옹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산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나폴레옹은 추가 병력을 서쪽으로 지원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우회 공격부대도 나폴레옹군에 포위당해 항복한다. 리볼리 전투의 결과로 오스트리아군은 병력의 절반인 1만 4천명을 잃었다. 큰 피해를 입은 4차 만토바 구원대는 큰 피해를 입고 궤멸되었다.    


북부 이탈리아 장악

오스트리아는 가지고 있던 모든 기회를 다 써버렸다. 겨울이 오기 전 만토바를 구원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겨울의 알프스 산은 많은 눈이 내려, 오스트리아는 한동안 구원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만토바에 갇힌 뷔름저에게 좋은 조건을 내걸며 항복을 권유한다. 뷔름저가 항복하면 그 대가로 만토바에 남아있는 병사들을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호위하겠다는 것이었다. 뷔름저는 나폴레옹의 권유를 받아들여 항복하고 이로써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진격

그 다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로 진격한다. 만토바 구원대에 병력을 총동원한 오스트리아는 속절없이 무너진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남부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 시키며 전진한다. 항복을 권유하는 나폴레옹을 계속 거절하던 오스트리아 왕가는 프랑스의 라인강 원정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항복하게 된다.


대프랑스 동맹의 와해 : 캄포 포르미오 조약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에는 프랑스 혁명 정부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프랑스와의 강화로 오스트리아는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한다. 이렇게 1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고, 프랑스 혁명 정부는 자력으로 유럽에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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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쓸모 : 프랑스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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