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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Jul 09. 2021

프랑스혁명 : 함수와 나폴레옹

함수에 기반한 사고로 미래를 설계하다.

나폴레옹의 등장

툴롱(Toulon) 탈환전

프랑스 내부의 왕당파들은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프랑스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와 툴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1793년 8월 말 마르세유를 탈환하여 왕당파의 반란을 저지한다. 그러나 왕당파가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프랑스 최대 군항인 툴롱항 탈환에는 실패한다.

같은 해 12월까지 영국이 점령한 툴롱항 탈환을 위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혁명군 포병사령관의 부상으로 사령관을 교체하게 된다. 1793년 9월, 나폴레옹은 새 포병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툴롱항 탈환 과정을 지휘하였다.

1793년 12월 14일, 나폴레옹의 지휘에 따라 프랑스 포병부대는 대대적인 포격을 실시해 영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공격이 성공하자 영국군은 스페인군과 함께 툴롱항에서 물러났다. 결국 나폴레옹은 1793년 12월 19일 툴롱항을 탈환하고 왕당파들을 체포했다. 나폴레옹은 툴롱 탈환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로 1793년 12월 24일 준장으로 진급한다. 이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방데미에르(Vendémiaire) 13일 쿠데타 진압

1795년 10월 5일 왕당파는 파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국민공회가 새로 채택한 헌법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때 프랑스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에게 반란군 제압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를 수락한 나폴레옹은 반란군에 대한 진압 책임을 맡았고 파리의 생로슈(Saint-Roch)성당에서 무자비한 포격을 통해 진압한다. 이 공로로 1795년 10월 16일 나폴레옹은 육군소장으로 진급한다.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모험에 나선 나폴레옹     

방데미에르 쿠데타를 진압하자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을 국내 치안군사령관으로 진급시킨다. 혁명 정부의 국내 치안군사령부는 우리나라의 수도방위사령부와 비슷한 위상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대로 파리 혁명정부에서 안정된 지위를 얻을 수 있었지만,  돌연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부의 이탈리아 원정군(Army of Italy)에 자원하여 원정군 사령관 자리를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한다. 결국, 그는 혁명 정부의 실세인 폴 바라스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원정군은 프랑스 혁명 전쟁의 주력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지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왜 모험을 선택한 것일까?


나폴레옹은 어떤 사람인가?

수학을 잘하는 군인

나폴레옹은 어린시절 점잖은 성격에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특히, 역사와 수학에 빠져있었다. 파리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나폴레옹은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에서 뛰어난 점수를 받았다. 대체로 4년이 걸리는 과정을 그는 11개월 만에 수료했다. 나폴레옹은 수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함수와 친숙해졌다.


함수란 무엇인가?


함수(function)은 어떤 집합의 각 원소를 다른 집합의 유일한 원소에 대응시키는 이항 관계다. 즉, 한 변수의 값에 따라 정해지는 다른 변수의 값을 먼저 주어지는 값에 상대하여 일컫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집합 X의 원소 x 한 개에 집합 Y의 원소 y 한 개가 대응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거꾸로 y 한 개가 x 여러 개에 대응하는 관계도 함수라고 한다.


- 위키백과, 함수(function) -

 

함수라는 개념은 변수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변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함수(function)라는 용어는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f(x)라는 기호는 18세기 스위스의 수학자 오일러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함수는 현실 세계의 여러 변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실 우리는 식사 메뉴를 고를 때에도 함수를 사용하고 있다. “아침, 점심, 저녁, 야식으로 무엇을 먹을지 사다리타기를 통해 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함수이다.

    식사 메뉴를 선택해야 하는 {아침, 점심, 저녁, 야식} 상황의 집합을 수학에서는 정의역 X라고 부른다.

    식사 메뉴로 선택될 수 있는 {치킨, 짜장면, 피자, 떡볶이} 음식의 집합을 수학에서는 공역 Y라고 부른다.

    우리가 메뉴를 고르는 것은 바로 정의역과 공역을 연결하는 것으로 수학에서는 대응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받은 메뉴들인 {치킨, 짜장면, 피자, 떡볶이} 집합을 치역 f(x)라 부른다.

위의 사다리타기로 식사 메뉴를 정하면, 아침에는 치킨을, 점심에는 짜장면을, 저녁에는 피자를, 야식으로는 떡볶이를 먹게된다. 이것을 순서쌍 (x, y)로 정리하면, (아침, 치킨), (점심, 짜장면), (저녁, 피자), (야식, 떡볶이)의 대응관계를 얻을수 있다. 이러한 대응관계의 집합함수 f 라 부른다.


함수와 필연적인 사건의 연결고리 : 유일성

사람들은 함수의 유일성을 통해 필연적 사건을 분석하고 예측하기 시작했다.

수학의 세계에서 함수는 유일성을 갖는다. 유일성이란 집합 X의 원소 한 개에 집합 Y의 원소 한 개대응한다는 것이다. 집합 X의 원소 한개에 집합 Y의 원소가 두 개 이상 대응될 경우 함수가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필연적인 사건 원인 하나에 따른 필연적인 하나의 결과를 갖는다. 수학 세계의 함수와 현실세계의 필연적인 사건은 공통적으로 유일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사람들은 필연적인 사건 함수를 통해 분석하고 예측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탄도학이다.


함수의 쓸모 : 탄도학

수학세계의 함수와 현실세계의 사건을 연결하는 학문 체계

탄도학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수학세계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발사된 총알이 목표에 명중하는 사건은 수학세계에서 이차함수와 대응되는 것이다. 탄도학의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총알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것과 동일한 행동인 것이다.

나폴레옹은 포병연대에서 탄도학을 배우며 함수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훨씬 복잡한 일들로 가득하다. 함수가 복잡한 일들도 예측할 수는 없을까? 그 문제는 합성 함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합성함수란 무엇인가?


두 함수 f : X → Y, g : Y → Z가 주어져 있을 때 집합 X의 임의의 원소 x가 함수 f에 의해 집합 Y의 원소 y에 대응되고 함수 g에 의해 y가 집합 Z의 원소 z에 대응되고 있다. 즉 y = f(x), z = f(y)의 관계식이 성립한다. 이 때 집합 X를 정의역 집합 Z를 공역으로 하면서 x를 g(f(x))에 대응시키는 새로운 함수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함수를 f와 g의 합성 함수라 하고 g ∘ f로 나타낸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g ∘ f : X → Z ⇒ z = (g ∘ f)(x)  


- 네이버 지식백과,  합성함수(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함수의 합성이란 한 함수의 공역이 다른 함수의 정의역과 일치하는 경우, 두 함수를 결합하여 하나의 함수로 만드는 연산이다. 함수의 합성으로 만들어진 함수를 합성함수라고 부른다. 함수를 합성하는 과정은 결합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합성함수에서는 결합법칙이 성립한다.


함수의 합성


수학의 세계에서 “1”이라는 원인은 “a”란 결과가 되고, “a”는 또 다시 원인이 되어 “8”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을 한번에 정리하면 g(f(1))=8이라 표현할 수 있다.

수학세계에서는 여러 함수를 묶어 하나의 합성 함수로 생각할 수 있다. 현실세계 또한 여러 사건들이 연결되어 복잡한 사건이 된다. 합성함수 개념과 같이 여러 복잡한 사건들을 결합해 하나의 사건처럼 정리할 수 있다면  분석과 예측이 가능해진다.


복잡해진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은 이전과 달랐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전쟁의 주체였다. 혁명 이전의 전쟁의 주체는 왕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국민이 전쟁의 주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성격 또한 변화했다. 왕들 간의 싸움은 성을 점령하고 적국의 왕을 쓰러뜨리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국민이 주체가  싸움은 적국의 정부 지도자를 쓰러뜨리거나 성을 점령하는  이상의 목표를 추구했다. 따라서 전장의 규모가 커지고 전투 기간도 길어졌다.


7년 전쟁 VS. 프랑스 혁명 전쟁

프랑스 혁명 이전의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지역을 빼앗긴 것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공격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전쟁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프로이센 동맹군을 로이텐 전투에서 물리쳐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유럽 어느나라보다도 잘 싸웠지만, 전장으로 부대를 이동시키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국민이 주체가 되어 치른 프랑스 혁명전쟁은 그 양상이 매우 달랐다. 대프랑스 동맹국들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려 전쟁을 벌였지만, 프랑스 혁명 지도자를 쓰러뜨리는 것으로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사실 프랑스 혁명 전쟁 중에 많은 프랑스의 정치 지도자와 장군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전쟁을 주도했던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들은 공포정치를 펼쳤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고, 대프랑스 동맹군에 대항해 잘 싸웠던 장 니콜라 우샤르 장군은 적을 끝까지 추격해 섬멸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국민들의 자유를 위한 의지는 사그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가 네덜란드, 프로이센, 스페인을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시켰지만, 아직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대프랑스 동맹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군은 뛰어난 군사 기술을 가진 귀족들과 영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와 싸울 여력이 많이 남아있었다.

프랑스 혁명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서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군이 전투에서 이겨 오스트리아 군을 밀어내면 다시 오스트리아군이 힘을 모아 프랑스 군을 몰아내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다.

전쟁은 점점 더 복잡해지게 되었다. 전투에서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를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도 오스트리아도 누가 이길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전쟁의 교착상태를 끝내기 위해 나폴레옹은 함수적 사고에 기반해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함수와 군사 작전

나폴레옹은 합성함수의 아이디어를 현실에 적용해 미래를 설계했다. 나폴레옹은 전투의 승리와 패배를 적절히 조합한 천재적인 군사작전으로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때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이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 승리는 나폴레옹이 지휘한 프랑스가 거두었다. 함수적 사고에 기반한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작전 구상 덕분이었다.


합성함수 복습

나폴레옹은 복잡한 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학을 활용하였다. 합성함수에서 원인 x가 함수를 통해 결과 f(x)를 만들고, f(x)는 새로운 원인이 되어 함수를 통해 새로운 결과 g(f(x))를 만든다. 함수의 합성은 복잡한 연산이지만, 적절히 조합하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합성함수를 만들수 있다. 그렇다면 수학세계에서 사용하는 합성함수를 전쟁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나폴레옹은 합성함수의 아이디어를 전쟁에 적용하여 군사작전을 만들었다. 전투1이 낳은 결과는 새로운 전투2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전투2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전투1과 전투2를 적절히 조합한다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여러 개의 전투를 적절히 조합해 자신이 원하는 전쟁의 최종상태와 연결짓고자 했다.

나폴레옹이 세운 이탈리아 작전; 빨간색 선은 나폴레옹이 생각한 작전선(operational line)


나폴레옹의 대프랑스 동맹 격파 작전     

나폴레옹은 전쟁의 최종 상태를 대프랑스 동맹을 격파하는 것으로 정하고, 그 중간 단계들을 고민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의 강화를 성사시켜야만 했다. 강화의 내용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혁명 정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공격받을 정도로 오스트리아가 큰 위기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할리 없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정부의 존재 자체가 오스트리아 왕가의 존재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항복을 얻기 위해 오스트리아 수도로 프랑스군이 진격하는 것을 이탈리아 작전의 최종 목표로 계획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 수도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와 붙어있는 이탈리아 북쪽 지역을 점령해야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쪽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 사이에 있는 샤르데나 왕국의 피에몬테 지역을 점령해야만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진격하기 위해서 결국 오스트리아군과의 직접적으로 대결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섬멸하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작전을 구상했다.

나폴레옹이 설계했던 복잡하지만 확실한 인과관계를 후대의 전략가들은 작전선(operational lin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단일 작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전투에서 일부러 패배하거나, 도망치기도 했다. 때로는 필요하다면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서라도 승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작전선은 대성공이었다. 이탈리아 북쪽을 점령하였고 오스트리아는 항복했다.


이탈리아 원정군 이야기

지원을 받지 못하는 부대

프랑스 혁명 정부는 라인강 원정군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라인강을 넘으면 오스트리아 땅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지역은 달랐다. 이 지역은 매우 넓었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북부 지역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프랑스와 붙어있는 샤르데나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고,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공격해 점령해도 대응할 시간이 충분했다. 라인강 원정군에 집중된 예산과 지원은 이탈리아 원정군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지원이 부족해 옷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병사들이었다. 나폴레옹이 행군 훈련을 시키자, 병사들은 "행군을 시키려면 먼저 군화부터 달라"며 명령을 듣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정부에 부대를 운영할 예산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혁명정부의 사정도 넉넉하지 못했다. 오히려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지역을 점령하여 받은 보상금으로 전쟁에서 진 빚을 갚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수도로 진격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원정군 재편

(1) 사단 재편

나폴레옹은 기베르의 「전술학개론」에서 배운 내용을 이탈리아 원정군에 도입했다.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을 6개 상설 사단으로 편성하여 독립적으로 전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사단 재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사단장에게 자율성을 보장했다. 사단장에 사단의 운용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는 전투 중 적시에 위기를 모면하면서 전체적인 임무 수행에 가담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둘째, 여러 특기를 가진 병사들로 사단을 조직했다. 사단 내에 포병대, 기병대, 보병대 등을 혼합하여 혼자서도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셋째, 사단을 가능한 한 넓게 배치시켰다. 이는 적들에게 프랑스군이 어디에 모여서 공격할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만들어 혼란을 일으켰다.

사단 조직은 나폴레옹의 마음을 읽는 장군을 만나 뛰어난 성과를 거둔다.

앙드레 마세나(André Masséna, 1758 ~ 1817)

앙드레 마세나 - 나폴레옹의 마음을 읽는 사단장

앙드레 마세나(이하 마세나)는 프랑스 혁명군의 장군으로 나폴레옹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서 많은 전투를 이끌었다. 마세나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마세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자라나 군에 입대했다. 마세나는 이탈리아 지역 연대에서 열심히 군생활을 했지만,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준위로 제대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마세나는 다시 군대에 복귀했고, 항구도시 니스를 한 달만에 점령한 공로를 인정받아 1792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이후 마세나는 이탈리아 원정군에 배속되었고 여기서 나폴레옹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 참모부 수립

나폴레옹은 부르세의 참모제도를 이탈리아 원정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에 참모부를 편성해 뛰어난 지식을 가진 병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의 작전은 치밀했지만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 작전의 구체적인 실행안이 필요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부대의, 몇 명의 병사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는 지리와 수학에 뛰어난 참모부 병사들과의 회의를 통해서 결정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작전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참모장을 만나 치밀한 군사 작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모부는 잘 짜여진 군사 작전을 전투부대에게 전달하였다.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 1753 ~1815)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 나폴레옹의 상상을 현실로 만든 참모장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이하 베르티에)는 프랑스 혁명군의 장군으로 나폴레옹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서 작전을 수립했다. 베르티에는 1764년 왕립 메지에르 공학교에 입학하여 수학과 공학, 지리학 등을 배웠고 1766년 학교를 졸업한 뒤 지형측량관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측량 겸 참모장교로 복무했으며, 1793년 3월에 방데 지방으로 파견되었다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4개월 만에 해임당하고 지방에서 은둔하였다. 그러던 중 베르티에는 나폴레옹을 만나 이탈리아 원정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이탈리아 작전이 성공할 수 있을까?

나폴레옹의 구상은 참모부와의 협력을 통해 작전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부족한 예산으로 월급조차 받지 못한 이탈리아 원정군 병사들을 모아두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지금 혁명 정부는 제군들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제군들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이탈리아로 데려갈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를 적대하는 샤르데나 왕국과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밀라노가 있다.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귀족들에게 억압받는 시민들을 구하고, 노예 상태의 유럽을 해방하자.
새로운 시대를 만든 제군들의 영광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진심이 이들의 마음을 울린 것일까. 병사들은 사기를 얻어 1796년 4월 샤르데나 왕국의 피에몬테 지역으로 진격한다.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이탈리아 원정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은 적었다.

이탈리아 원정군이 출발한 곳으로부터 오스트리아 수도까지의 거리는 400km가 넘었고, 나폴레옹은 샤르데나 왕국 소속의 피에몬테군과 오스트리아군을 동시에 맞서야 했다. 무엇보다도 원정군은 가난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빠르게 승리하지 못하면 병사들이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나폴레옹과 이탈리아 원정군의 행보는 어디로 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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