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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Jun 22. 2021

프랑스혁명 : 반격의 시작

시민군으로 변한 프랑스 혁명군이 대프랑스 동맹을 깨뜨리기 시작하다.

발미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발해 프랑스 주변국들은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이들에게 선전포고한 프랑스는 병력을 모으고 전투 준비를 했지만, 국내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는 변화를 모색한다.

1793년, 국민개병제가 발표되었다. 모든 국민을 전쟁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국민개병제로 청년 남성은 군에 징집되어 전투에 참여했고, 다른 국민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여 프랑스 혁명군을 지원했다. 프랑스 혁명군은 이제 시민들이 나라를 위해 직접 싸우는 시민군으로 변모하였다.

시민군으로 변화한 프랑스 군대는 군개혁안을 수용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는 대규모의 군대가 빠르게 움직이며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반면, 대프랑스 동맹군의 상황은 달랐다. 귀족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약했고 탈영할 기회를 노렸다. 따라서 대프랑스 동맹군은 탈영문제로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국민개병제 이후 프랑스의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대프랑스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플뢰리스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프랑스 혁명군은 대프랑스 동맹군을 네덜란드에서 몰아낸다. 결국 프랑스는 네덜란드 수도를 점령한다.

대 프랑스 동맹의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와 프로이센, 스페인이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는 시민봉기가 일어나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진다. 네덜란드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본 프로이센과 스페인은 프랑스와 바젤조약을 체결하고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한다.


궁지에 몰린 프랑스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혁명 정부는 루이 16세를 처형했다. 이 소식은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고 주변국은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에 동정심을 가졌던 영국조차도 프랑스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것이 제1차 대프랑스 동맹 결성의 배경이다.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한 국가는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프로이센, 스페인, 샤르데나 왕국이었다.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자 프랑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에 1793년 2월 1일, 대프랑스 동맹국에 선전포고 한다.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에 대항할 병력 충원이 필요했다. 1792년 발미 전투의 승리를 이뤄낸 의용군 다수가 만기 제대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 혁명 정부는 1793년 2월에 ‘30만명 모병안’을 통과시켰으나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다. 지역마다 다르게 병사를 모집했기 때문에 차별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프랑스 혁명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들이 여러 지역에서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에 대한 탄압, 국왕 처형, 증세, 불공평한 모병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1793년 3월, 프랑스 서부에서는 방데반란이 일어났고, 남부에서는 혁명 정국을 주도하는 자코뱅파 정권에 대한 반란도 일어났다. 뒤이어 4월에는 마르세이유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5월에는 리옹에서 자코뱅파 정권을 반대하는 정권이 수립되었다. 7월에는 툴롱 항구에서 반란이 일어나 영국군을 원군으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선전포고 이후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이 합류하면서 제1차 대프랑스 동맹군의 규모는 90,000명으로 증가했다. 대프랑스 동맹군의 공격에 무능한 모습을 보인 프랑스군은 콩데와 발랑시엔 지역을 빼앗겼다. 콩데와 발랑시엔이 함락당하면서 프랑스 국경 북쪽이 뚫리게 되었고 네덜란드 군도 대프랑스 동맹군에 합류하면서 프랑스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대프랑스 동맹군 사이의 의견차이로 대규모의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궁지에 몰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프랑스, 어떻게 이 위기를 해결하려 했을까?


프랑스의 국가총동원 체제

국민 개병제(Levee en masse)


젊은 청년들은 전투를 하고, 결혼한 남자들은 무기를 만들고 보급품을 날라라. 여자들은 천막과 군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봉사하라. 어린이들은 천 조각을 줍고, 노인들은 광장에 나와서 전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왕정에 대한 증오와 공화국의 단결을 위하여 연설하라.


- 국민개병제(Levee en masse) 법안의 첫 내용 -


위기에 처한 프랑스 혁명 정부는 1793년 8월 23일, 국민 개병제(Levee en masse)를 발표했다. 이전의 '30만 모병안'과는 달리, 프랑스의 모든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징병제였다. 이로 인해 1년 만에 프랑스 혁명군이 150만명에 달하게 된다. 대프랑스 동맹군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또한, 국민 개병제에는 징병되지 않는 노인이나 여자들에게도 후방에서 군수 물자를 만들고, 병원에서 일하는 형태로 기여해야 한다는 국가 총동원 개념이 들어가 있었다. 국민개병제 법안 작성에 참여한 국방 장관 라자르 카르노는 전선의 병사들에게 효율적으로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것과, 봉화 및 기구를 이용한 명령 전달 체계를 효율적으로 구축했다. 덕분에 프랑스 혁명군은 병력 모집과 운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전술적 변화

새로운 군대에는 이에 맞는 새롭싸우는 방식이 필요했다. 프랑스 혁명군은  개혁가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전술 변화를 이끌었다.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Jean-Baptiste Vaquette de Gribeauval, 1715 ~ 1789)

[1] 대포의 혁신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이하 그리보발)은 대포의 표준화와 경량화에 기여한 장군이다. 첫째, 그리보발은 화포의 규격을 표준화했다. 화포의 표준화는 포신 및 구경을 줄이는데 기여했다. 그 결과 대포를 경량화 할 수 있었다. 둘째, 그리보발은 대포에 필요한 모든 부품을 설계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그리보발의 노력으로 프랑스는 새로운 조준장치를 개발했고, 포병들은 대포를 발사하기 전에 포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리보발은 화약이 포탄에 붙어있는 새로운 포탄을 개발했다. 이는 프랑스 포병이 쏘는 대포의 발사속도를 두 배 가까이 높였다.

그리보발의 혁신으로 프랑스 포병은 전투에서 명중률이 높은 위치로 대포를 이동시키며 적을 포격했다. 조준장치 및 사격각도를 정확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변경시킬 수 있는 장치를 부착하여 포탄을 경량화하는 동시에 발사속도를 단축시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포병은 당대 어떤 유럽국가 보다도 기동력이 높았던 것은 물론 빠른 연사 속도와 정확한 포격술을 갖출 수 있었다.



피에르-조셉 부르세(Pierre-Joseph Bourcet, 1700 ~ 1780)


[2] 대규모의 군대 통솔

피에르-조셉 부르세(이하 부르세)는 프랑스의 참모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장군이다. 부르세는 1775년 그의 저서 「산악전의 원리」에서 지휘관이 지도를 사용해 군사행동의 세부사항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기는 지속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병사의 규모는 늘지 않는 사실에 주목했다. 당시에는 군대 규모가 4-5만명을 넘어서면 지휘관이 군사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부르세의 주장대로 지휘관이 지도를 사용할 수 있다면, 대규모 병력을 효율적으로 군사작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지도를 읽고, 군대 물자의 효율적인 보급 방법을 아는 참모부 조직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브루세는 참모부의 발전을 위해 1764년 그르노블에 학교를 만들어 장교들을 훈련시켰다. 1776년 부르세는 프랑스군에 처음으로 참모본부를 편성하였다. 브루세가 발전시킨 참모제도를 통해 프랑스 군은 대규모의 군대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자크-앙투안-히폴리테 드 기베르(Jacques-Antoine-Hippolyte de Guibert, 1743 ~ 1790)

[3] 전술 혁신 (싸우는 방식의 혁신)

자크-앙투안-히폴리테 드 기베르(이하 기베르)는 새로운 전투방식을 고안한 전술가이자 장군이다. 1772년 그는 저서 「전술개론」에서 3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첫째는 프랑스 군이 시민군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프랑스 군이 빠르게 움직여 싸우는 기동전을 펼치는 것이다. 셋째는 프랑스 군에 사단을 편성하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전 대규모 부대를 모으고 이동해서 전투를 진행했다. 문제는 대규모 부대를 모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동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점이다. 기베르는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대를 작게 쪼갠 사단을 편성하면 현지에서 물자 조달을 쉽게하고, 군대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또한 기베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상설 사단으로 군대를 구성해 각 사단이 독립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더 빠르게 싸우도록 만들자고 주장했다. 기베르의 개혁안은 카르노와 나폴레옹에게 채택되어, 프랑스 군이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민군으로 변모하는데 기여했다.


귀족의 군대가 가진 한계

대프랑스 동맹군은 귀족이 주도하여 싸우는 군대였고, 귀족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병사들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군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대프랑스 동맹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이센 군을 통해 알 수 있다.

프로이센 병사들은 유럽에서 최고로 대접받던 정예병이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프로이센군을 지휘관의 명령에 기계처럼 복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군은 전투에서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으며, 전투에서 이기기 위한 효율적인 대형을 짤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예병의 강력한 모습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했다.

프로이센 병사들은 적군보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귀족들을 더 두려워했다. 프로이센 군의 처벌 제도가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군대에서는 "적군이 무서워 진격하지 못하는 병사가 있다면 뒤에서 총검으로 찔러 죽여도 된다"는 명령이 돌기도 했다. 전장에서 훈련받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병사는 그에 대한 벌로 채찍질을 당했다. 프로이센 병사들에게 적군과 싸워 이기는 것이 감옥같은 군대에서 귀족들에게 학대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였다.

프로이센 병사들에겐 애국심이 없었다. 충분한 군인의 수를 채우기 위해 프로이센 모병관은 외국인이나 연줄이 없는 하층민들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군대는 납치된 사람들에게 힘든 훈련을 시켜 귀족의 말에 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었다. 싸우는 기계가 된 병사들은 귀족들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형을 짜야만 했다.

고된 훈련과 엄격한 처벌로 고통받던 병사들은 항상 탈영을 생각했다. 물론 추격 부대에 붙잡힌 탈영병은 처형당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탈영은 쉽지 않았다. 프로이센군은 이러한 이유로 기동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기동전을 하기 위해 빨리 움직일 경우, 대열에서 이탈하는 병사들이 나올 수 있었고, 추격 부대가 도망치는 병사를 다시 잡아오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시민군으로 다시 태어난 프랑스 혁명군

한편, 시민군으로 다시 태어난 프랑스 혁명군의 병사들은 사회적 계급이나 직업별 또는 출신 지역별로 모인 모든 계층으로 구성된 시민집단이었다. 이들은 동원 체제에 뛰어들어 혁명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군사 개혁가들이 고안안 기동전술을 갖춘 시민군은 더 이상 무능력한 군대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군은 대규모의 군대가 빠르게 움직이며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변화했다. 이는 느리게 움직이는 대프랑스 동맹군과 비교할 때 큰 장점이었다. 첫째, 프랑스 혁명군은 나라를 지키려는 시민군으로 구성되어 탈영의 위험이 적었다. 둘째,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사단은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적들이 군대의 이동방향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셋째, 대프랑스 동맹군보다 많은 수의 병사들로 군대가 조성되었다. 승리의 관건은 혁명군이 가진 장점을 최대로 이용할 수 있는 위대한 지휘관의 손에 달려 있게 되었다.     



대프랑스 동맹에 균열을 내다

프랑스의 반격

1793년 말, 프랑스 북부의 플랑드르 전선에서는 프랑스 혁명군과 대프랑스 동맹군 모두 병력 충원이 이루어졌다. 대프랑스 동맹군은 10만 대군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프랑스의 군의 규모는 국민개병제 덕분에 20만명에 달했다. 대프랑스 동맹군은 압도적인 규모의 프랑스 혁명군과 싸워야만 했다.

프랑스 혁명군은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빠른 이동속도와 예측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속일 수 있었다.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주르당 장군은 샤를루아 북동쪽을 공격하는 척 움직이다가 갑자기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샤를루아의 북쪽을 공격했다. 그 결과, 1794년 6월 25일 프랑스 혁명군은 샤를루아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대프랑스 동맹군이 샤를루아를 지키려 움직였지만, 이미 샤를루아는 함락된 후였다.

샤를루아는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네덜란드 방어를 위한 중요 거점이었다. 대프랑스 동맹군이 프랑스로부터 네덜란드를 지키기위해서는 샤를루아를 탈환해야 했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은 플뢰뤼스 전투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플뢰뤼스 전투(Battle of Fleurus) : 전투를 배경으로 정찰용 기구를 볼 수 있다.

플뢰뤼스 전투(Battle of Fleurus)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플뢰뤼스 전투는 평민으로 구성된 프랑스 군대가 귀족들의 군대보다 강해졌다는 것을 전 유럽에 알린 전투였다. 카르노의 국민개병제로 프랑스 혁명군은 많은 수의 군사를 가지게 되었다. 부르세의 참모제도로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주르당 장군은 대군을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기베르의 기동전 교리와 그리보발의 대포체계는 프랑스 군이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강력한 포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학자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항공대는 정찰용 기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샤를루아 탈환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한 이유는 프랑스 혁명군이 3가지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이다.

    첫째, 프랑스 혁명군은 우월한 속도를 갖추고 있었다.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진 프랑스 혁명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속이고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군이 손을 쓰기도 전에 샤를루아라는 도시를 빠르게 점령했다.

    둘째, 프랑스 혁명군은 수적 우위를 가지고 싸웠다.

    플뢰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70,000명이 참전한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52,000명이 참전했다.

    셋째, 프랑스 혁명군은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프랑스 항공대는 랑트르프레낭(l'Entreprenant)이라는 정찰용 기구(reconnaissance balloon)를 사용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결국, 플뢰뤼스 전투에서 패하자 대프랑스 동맹군은 네덜란드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할 계획을 세운다.



무너지기 시작한 대프랑스 동맹

네덜란드 이탈 : 바타비아 공화국

대프랑스 동맹군은 라인강 너머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네덜란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795년 초, 하천의 결빙으로 네덜란드의 요새 방어력이 떨어지는 겨울철에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네덜란드의 도시는 차례로 함락되었고, 총독은 도망갔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혁명 정신에 공감하는 바타비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네덜란드는 붕괴하여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하였다.


프로이센 및 스페인 이탈 : 바젤조약

네덜란드의 붕괴를 지켜 본 프로이센도 프랑스와 1795년 4월 5일 바젤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은 프랑스 혁명 정부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후 폴란드 점령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같은 해, 스페인도 프랑스와의 강화를 결정해 1795년 7월 22일 제2차 바젤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뺏긴 영토를 돌려받는 대가로 혁명 정부의 권리를 인정하고, 프랑스에게 산토도밍고를 넘겨주었다.


대프랑스 동맹의 균열

네덜란드, 프로이센, 스페인의 이탈로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자력으로 대프랑스 동맹을 깨뜨리고 궁지에서 벗어났다. 이제 대프랑스 동맹에 남은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영국 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라인강 너머로 철수했고, 영국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당장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가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때, 국내반란을 진압하며 무섭게 출세한 장군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나폴레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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