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도 출신 목수가 바라본 인도네시아의 시위
시위를 촉발하고 주도한 것은 인도네시아(이하 인니) 대학생들이다. 사회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 불의에 항거해 들고일어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소명 같은 것일까? 곧 일반인과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불과 일주일 만에 급속도로 커졌고, 수도 자카르타뿐만 아니라 인니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마치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대학가에서 촉발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것과 비슷하여 기시감마저 든다. 이 같은 대규모 시위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인니 정부는 깜짝 놀랐다. 가난에 찌들어도, 교통이 불편해도, 매연이 너무 심해 호흡기 질환을 달고 살아도, 수돗물이 더러워서 못 마셔도, 하수가 그대로 흘러가서 하천에서 악취가 진동해도 전혀 불만을 표시하지 않던 고분고분한 시민들이 갑작스레 들고일어났으니 인니 정부로서는 놀랄 만도 하다. 불과 한 달 전 유력 일간지 자카르타 포스트에는 인도네시아 시민들은 가난마저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며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무력감을 질타하는 기사가 났었다.
... Our research found people’s fatalistic attitude had prevented them from being lifted out of poverty. Most of our respondents believed being poor was God’s fate, and there was nothing they could do. This attitude is believed to come from a Javanese philosophy of acceptance called “nrimo”...
... 우리 연구진은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않는 치명적 태도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가난이 신의 뜻이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태도는 받아들임을 뜻하는 자바 철학 'nrimo(은리모)'로 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약 90%가 무슬림이다. 인니 사람들은 아랍어 '인샬라'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인샬라의 태도는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nrimo(받아들이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랍어 '인샬라'(알라의 뜻대로)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평소에 이렇게 고분고분하고 수동적이기만 하던 시민들의 갑자스런 봉기에 놀란 인니 정부는 최루탄과 물대포를 발사하며 시위대를 무리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3명이 죽고 3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시위대의 규모는 32년 장기 독재자 수하르토 대통령을 끌어내린 1998년 인도네시아 민주화 시위 이후 최대 규모다.
큰 반발을 일으킨 개정 법안은 약화된 부패방지법, 국가(원수) 모독 죄 조항, 그리고 혼외 성관계 금지법 등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결혼 전 성관계를 하면 1년 징역에 처해질 수 있고, 혼외 동거는 6개월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의학적으로 위급한 상황이거나 강간 등의 사유가 없이 낙태를 하면 최대 4년의 징역을 받는다.
외신들은 시대착오적인 혼외 성관계 처벌 법안에 대해 일제히 비판했다. 가까운 나라 호주는 인도네시아 여행 관광 지침서 개정하면서 개정 법안에 적극 대응했다. 발리는 호주와 가깝고 물가도 싸기 때문에 호주 젊은이들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몇백만 원 정도 모은 다음 발리로 날아가서 한.두달 실컷 놀다 오는 문화가 있을 정도다. 젊은 친구들이 발리를 여행하는 동안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하게 될 수도 있는데, 이제 인도네시아에서 혼인 관계가 아닌 사이에 성관계를 하면 위법으로 감옥에 가게 되기 때문에 호주 정부에서 선제적으로 지침서를 개정한 것이다. 호주 내무부는 "(인도네시아) 법이 많이 바뀔 예정이며 이는 외국인과 관광객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했다. 참 부지런한 호주 정부다.
인니 정치인들은 이번 형법 개정안이 기존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의 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낡은 법을 대체하는 시도이므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정신을 드높이는 법안이라며 개정안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또한 이슬람교도가 90%에 달하는 국가의 종교 정신에 부합하는 혼외 성관계 금지 법이 이들의 독실함을 잘 나타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하지만 이번 형법 개정안은 인도네시아 현지의 문화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인도네시아는 SNS 사용자가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은 나라다. 넷플릭스를 통해서 배드신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미드를 매일같이 보고, 달달한 연애 스토리가 나오는 한국 드라마도 많이 본다. 온라인으로 전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인니 젊은이들은 그들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고, 서로 만나고 연애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에 느닷없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시대를 역행하는 혼외 성관계 금지 법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문제가 혼외 성관계 금지법 한 가지였으면 시위대의 명분이 약했을 것이다. 보수적이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하여간 요즘 것들은 발랑 까져가지고 쯧쯧' 하며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시위대가 반발하는 개정 법안에는 대통령, 부통령, 종교, 국가기관, 국가 상징물(국기, 국가) 등의 모욕을 금지하는 부분도 있다. 이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법안이다. 이 국가(원수) 모욕 금지 법안을 듣자마자 나는 다음과 같은 옛날이야기가 바로 떠올랐다.
구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 때의 일이다. 한 기자가 "흐루시초프는 멍청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체포되었다. 그 기자는 무려 21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구체적인 선고 이유로는 국가원수 모독죄 1년, 국가기밀 누설죄가 20년이었단다. 믿거나 말거나 >_<
흐루시초프가 대체 언제 적 사람이지? 흐루시초프는 1950~60년대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무려 70여 년 전에, 그것도 공산주의 국가에서 유행했던 국가 원수 모독죄를 인도네시아에서 구경하게 되다니! 참 대단하다. 혼외 성관계 금지법에 더해 국가(원수) 모독죄에 대한 반대가 시위대의 명분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 형법 개정안에 며칠 앞서 부패방지법 개정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특히 심각하다. 인도네시아는 손꼽힐 정도로 부패가 심한 나라다. 교통사고 뺑소니를 당해서 경찰에 신고를 하러 가면 뺑소니 차가 어디 있냐며 오히려 되묻는다. 사고를 내고 도망갔으니까 뺑소니지 라고 말하면, 경찰은 '돈을 주면 뺑소니를 한 번 찾아보겠다.'라고 말한다. 피해자에게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인 친구가 있다면 물어보라, 열이면 열 모두 일반적인 경찰의 반응이 위와 같다고 수긍할 것이다. 경찰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관료 사회는 전반적으로 완전히 썩어 빠졌다. 뇌물 요구가 너무 지나쳐서 수많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침을 뱉고 돌아설 정도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는 부패방지위원회라는 곳이 있고, 이 곳에서 나름대로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데 부패방지위원회의 그 가냘픈 몸부림 조차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위원회의 권한과 자율성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국회가 만들어버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썩어 빠진 정치인들이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기구를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부정.부패에 책임을 쉽게 벗어날 수 있도록 법안을 개정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항거가 이번 시위 명분에 크게 방점을 찍어 주었다. 인도네시아 시민들도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정.부패가 그야말로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큰 명분도 있고, 개인의 아랫도리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정부가 기분도 나쁘고, 또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원수) 모독 죄 개정안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으니 시위대는 결집할 동력을 겹겹이 얻은 셈이다.
이번 시위는 표면적으로는 형법 개정안 등에 반발하여 발생했지만, 시위의 규모가 큰 만큼이나 시위대의 요구 또한 다양하다. 약 한 달 전부터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도무지 진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파푸아 섬의 소요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고, 몇 달째 꺼지지 않는 칼린만 탄(보르네오) 섬과 수마트라섬 열대림 화재로 인한 극심한 환경파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정치인이 사업을 같이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현대 자동차 회장이 국토교통부 장관도 겸하고, LG화학 사장이 환경부 장관을 겸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부정.부패가 판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도네시아는 그야말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주물러 왔다. 인도네시아는 마치 중세시대처럼 돈 있는 귀족들이 정치를 전유하며 그들의 신분을 세습해왔다.
그러한 환경에서 조코위 대통령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구를 팔다가 정치에 입문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로 직선제를 통한 민주적 정권 교체를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초의 문민정부 대통령인 김영삼과,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조코위 대통령은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가 큰 인물이다. 그리고 올해 재선에 성공해서 2기 내각이 곧 출범한다.(인도네시아는 대통령 5년 중임제다) 인도네시아를 더 안전하고, 청렴하고,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조코위 대통령이 열대림 화재를 묵인하고, 파푸아 섬의 시위를 총.칼로 억압하며, 부정.부패 척결에는 외면하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혹자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조코위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했고, 때문에 부패 척결에 나설 수 없게 된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이다. 이번 형법 개정안과 반부패방지법 약화 등은 인도네시아 국회, 즉 입법부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국회가 안 도와주면 어려운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회가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그토록 기대와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조코위 대통령이 전 방위로 무기력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실망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부정.부패를 방치하고,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서 실패한 정부가 될 것임이 자명하다.
인샬라의 나라, 고분고분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의 나라인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이번 대규모 시위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시위는 지금도 한창 격렬하게 진행 중이다. 인니 정부가 이번 시위를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그리고 문제의 법안들은 하나 하나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에 대해서 외국인인 내가 다 궁금할 지경이다. 그리고 과연 조코위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이 비견될만한 사람인지도 궁금하다. 이번 시위를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시위로 인한 사상자가 더는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