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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목수 Jun 15. 2019

자카르타로 떠난 한국 목수

짐을 간소하게 싸서 출국 비행기에 훌쩍 올랐다. 2016년 3월이었다. 

  예전의 나는 커다란 꿈과 포부가 있는 무한 긍정의 이상주의자였다. 나의 자유로운 대학 생활은 나의 정신까지도 자유롭게 해방시켰더랬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 내 허파의 바람은 신속하게 빠졌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이었던 해운회사를 다닐 때는 신입사원 주제에 무려 회사 상무와 싸웠다. 김모 상무와는 아프리카 가나 지사에서 같이 일을 했는데, 현지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가나에서 찾기도 어려운 유흥 업소에 나를 데려가서 놀려고 하였다. 나는 상무가 인종차별주의자에 변태라며 대놓고 문제제기를 하다가 상무와 싸우고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지록위마가 안 되는 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회사 생활을 오래 못 버틴 것이다.


 나중에 목수가 되어 현장 목공사를 할 때는 힘들고 위험한 작업도 많이 했다.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 공사 때는 좁은 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구부리고 앉아서 작업을 하느라 무릎 관절이 망가지기도 했고, 무늬목을 붙일 때는 다리미로 내 손등을 다려서 화상을 입기도 했다. 경기도 화성의 가구 공장에서 일할 적에는 공장이 망해서 야근 수당을 포함한 3개월치 임금 1,000 만원 정도를 못 받은 적이 있다. 사회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이상주의적 국제정치학도에서 현실주의적 노동자로 변화시켰다. 


 정치학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젊어서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고, 늙어서도 진보주의자면 머리가 없다.' 나이가 마흔에 가까운 지금의 나는 글쎄, 예전만큼 진보적이지 않으니까 머리가 있다고 해야하나? 하지만 난 보수주의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보수적 입장을 취하기에는 나는 본 바탕이 너무 보헤미안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원목 책장 / White Oak, 천연오일 마감 / 2010년 제작 


 체게바라는 이런 말을 했다. '리얼리스트가 돼라,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져라' 체게바라 때문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현실주의자가 됐다. 그렇다고 마음마저 차가운 보수 꼰대 목수로 늙기는 싫었다. 정치학에서 말하는 '현실주의'와 '보수주의'는 맥락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뜻이 사뭇 다르다.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학교에서 공부한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은 뛰어난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 훈련이었던 셈이다.


 NGO 활동을 하는 박 팀장은 인도네시아에서 빈민층 아이들에게 목공 기술을 무료로 가르치는 교육 시설을 만들 거라고 했다. 그런데 목공 교육 시설에 어떤 기계가 필요하고 무슨 내용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으니 나에게 NGO 사업 기획서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사업 기획서의 목공 설비 예산과 교육 커리큘럼 구성안을 만들어줬다. 나중에 그 인연이 빌미가 되어 나는 NGO 프로젝트에서 목공예 교육 책임자로 인도네시아에 직접 가게 됐다.


 나에게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과도 같은 결정이었다.  목조주택도 짓는 일도 하고, 인테리어 현장일도 하면서 목수로서 나름 잔뼈를 키운 나는 서울 한 복판에 목공방을 열어서 잘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공방을 비워 놓고 인도네시아로 훌쩍 떠난다는 것은 공방 운영에 큰 타격이 올 수도 있는 무리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떠나고 싶었다. 아프신 어머니와, 파혼문제, 그리고 무기력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내 삶에서 상당히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 1년간 공방 운영을 맡기고 떠났다. 1년, 딱 1년만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효창동 목공방 / 2014년 개업한 뒤로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던 추억의 장소 


 아버지는 '네 나이가 벌써 서른여섯인데, 결혼 안 하고 어디 외국을 나가느냐'며 언짢아하셨다. 나도 죄송했다. 결혼을 안 해서 죄송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게 된 상황 때문에 죄송했다. 서울에서 지낼 때 나는 한두 달에 한 번씩 고향에 내려가서 장작도 패고 부모님 농사일도 거들어 드리곤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오로지 두 분 힘으로만 수천 평의 밭농사를 지으셨는데 어떤 일은 너무 힘들어서 이제 당신들 스스로 마무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점점 자주 생겼다. 하지만 이제 고향의 부모님이 고구마를 캐거나 생강을 수확하셔도 가서 무거운 박스를 대신 옮겨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고향집에 자주 내려가는 것은 부모님의 고된 농사일을 도와드리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의 복잡한 일들을 잊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땀을 흘리면서 마음을 평온을 되찾는 안식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인도네시아에 떠나 있는 기간 동안 부모님을 찾아뵐 수도 농사일을 도와드릴 수도 없을 터였다. 


고향집은 장작을 피워 난방을 하는 온돌방이다. 어렸을 적부터 장작을 패온 나는 돌쇠만큼 장작을 잘 팬다. 

 대학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했기 때문에 NGO의 활동과 ODA 기금 지원에 대한 논리와 내용을 알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에 나는 NGO 활동가가 되어 해외의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꿈을 꾼적도 있다. 한비야의 책을 읽으며 세계를 유람하며 지구촌 구석 구석의 살아 있는 숨결을 느끼고 싶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뛰곤 했다. 그런데 졸업 후에 취직한 곳은 해운회사였다. 그 후 경실련이라는 시민단체와 한국발명진흥회에서도 잠깐씩 일 했지만 곧 전업 목수가 되었다. 목수가 된 후로는 이 일을 내 천직으로 여겨 다른 직업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내 일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쩌다 NGO에서 나의 대학교 전공과 관련이 있는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세상 일은 참 아이러니하다.


 어찌 됐든 나는 인도네시아에 가서 현지 아이들에게 아주 멋진 목공예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짐을 간소하게 싸서 출국 비행기에 훌쩍 올랐다. 2016년 3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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